<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덕로(德老) |
본관 | 우봉 이씨[2] |
출생 | 1896년 7월 3일[3] |
공주부 옥천군 이남일소면 윤동리 (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미동리 대동마을) | |
사망 | 1950년 7월 20일[4] (향년 54세) |
충청북도 옥천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8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6년 7월 3일 공주부 옥천군 이남일소면 윤동리(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미동리 대동마을)에서 아버지 이명구(李鳴九, 1874. 8. 5 ~ 1949. 6. 29)와 어머니 양주 조씨(1873. 10. 25 ~ 1951. 2. 23) 조원화(趙源華)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9년 3월 27일 오후 1시경 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육창문(陸昌文) 등이 이원면 장날을 이용하여 300여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였다.
그 뒤 주동자인 육창주와 허상기, 그리고 김용이 등이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그는 격렬하게 만세를 불렀으며, 짱돌과 곤봉을 갖고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고 연행된 주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던 중 결국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하여 그해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그해 8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50년 7월 20일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금봉에게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당초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윤정리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2002년 10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