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해남 윤씨[1] |
출생 | 1913년 2월 12일 |
전라남도 강진군 고읍면 도림리 (現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도림리[2] 390번지[3]) | |
사망 | 1992년 4월 21일 (향년 79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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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3년 2월 12일 전라남도 강진군 고읍면 도림리(現 강진군 성전면 도림리 390번지)에서 아버지 윤영호(尹英浩, 1868. 11. 23 ~ 1950. 8. 21)와 어머니 함양 박씨(1872. 8. 24 ~ 1950. 8. 24)[4] 사이의 3남 5녀 중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이후 문화 류씨 류풍렬(柳豊烈)과 결혼했으며, 광주군 광주면 성저리(現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3·4·5가 37번지)에 거주하면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現 전남여자고등학교)에 다녔다.1924년 9월 고향 마을 내에 설립된 여자야학원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고향 친구 이정임(李貞任)과 함께 야학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1927년 5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1회로 입학했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했다. 이 일로 인해 1930년 1월 15일 학교 당국으로부터 자택에서 3일간 근신할 것을 명받았고, 같은 해 3월 23일 결국 제적 처분을 받고 퇴학당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92년 4월 21일 별세했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전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추서받았다.
[1] 정릉참봉공파(定陵參奉公派) 25세 주(柱)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오빠 윤주환(尹柱煥, 1899. 1. 12 ~ 1928. 4. 4), 윤주헌(尹柱憲, 1901. 2. 23 ~ 1979. 3. 19), 남동생 윤주흠(尹柱欽, 1933. 1. 19 ~ )이 항렬자를 썼다.[2] 윤일영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3]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5년 당시 윤오례의 아버지 윤영호(尹英浩, 1868. 11. 23 ~ 1950. 8. 21)의 소유였다. 이후 1948년 4월 9일 장조카 윤방하(尹芳夏, 1922. 3. 24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4] 박지상(朴知相)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