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월간 말. 진보 성향을 대표했던 거물급 시사월간지. 1985년 6월 15일 해직언론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기관지로서 창간되어 1989년 정기간행물로 정식등록되었다. 상업광고는 거의 전무하며 이 잡지에서 보도한 보도지침 폭로 특집은 20세기 한국언론 10대 특종 중 하나로 손꼽힌다.2. 역사
1988년에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면서 진보일간지의 역할을 한겨레가 맡음에 따라서 월간 말은 본격적인 사사 월간지로써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 당시에는 진보언론의 종가를 자칭할 정도로 유명했다. 참고로 1990년대 중반 당시에 평균 발행부수는 3만 부에서 3만 5천여 부 가량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와 함께 1999년 인터넷을 기반으로 기존 PC통신에서 활동하던 논객들과 일반인들이 참여하는[1] 웹진 대자보, 세이월드, 넷피니언 등 본격적인 인터넷 언론의 시대가 열리고 주간 혹은 월간지는 매일 새로운 정보와 기사가 올라오는 인터넷 미디어의 속도에 당해낼 수 없고 이렇게 점점 경영 사정 악화와 인재 유출이 이어지는 악순환을 겪게 된다.[2] 대표적으로 말 지 출신의 오연호 기자가 만든 오마이뉴스가 있으며 이외에도 프레시안을 창립한 박태견 편집국장 등 개혁/진보 성향 언론사에는 '말' 지 출신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국회의원을 지냈던 정봉주 전 의원도 역시 이곳 기자 출신이었다. 결국 2004년 말 더 이상 발행을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고, 2005년부터 파행적인 운영을[3] 하기 시작했으며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2006년 중순부터 다른 진보언론인 민중의 소리가 운영에 개입했다.[4] 그러나 사정이 어렵긴 매한가지인 민중의 소리가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을 리도 없고 그렇게 식물인간 상태를 유지하던 잡지는 2009년 3월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앞서 말한 진보성향 인터넷 언론들[5](고발뉴스, 뉴스타파라든지), 친민주당계 유튜버 등의 대체재가 많아진 만큼, 현 상황에서 월간 말이 다시 부활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월간 말의 최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주간경향 기사를 참조.
3. 기타
전성기였던 1990년대엔 당대 톱스타였던 한석규, 신현준, 최종원 등이 이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문화부 담당 김종원 기자는 이 잡지 외에도 키노, 스크린 등의 영화잡지에 투고하기도 했었다.
박형준 부산광역시장은 1991년 무렵 말지의 편집위원이기도 했는데 이 당시에 민중당(1990년)에 참여했을 정도로 진보성향이 강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 지금의 시민기자 제도의 시작이다.[2] 기존의 언론사와 달리 인터넷 언론사들은 최소한의 인원과 비용으로 설립이 가능했다. 대표적인 인터넷 언론사 중 하나인 오마이뉴스의 경우에도 기자 2명, 수습기자 3명으로 설립했다. 이런 인터넷언론은 시민기자와 거대 커뮤니티의 유명 논객들의 참여라는 비슷한 방식으로 초반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2000년대 활약을 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또 다른 형태인 1인 미디어의 등장으로 기존 언론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구독자들과 소통하는 시대가 열려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다.[3] 어느 정도냐면, 일단 외부 필진에게 글을 부탁한다. 하지만 고료는 지불하지 않는다. 이 외부필진이 돈에 대해서 말을 하길 꺼리는 유형이라면 그대로 계속간다. 하지만 이에 언급하면 그 외부 필진을 교체한다. 이하 반복. 이 외부 필진 중 하나였던 이후 딴지일보 펜더 이성주는 이 문제를 말 홈페이지에 게재하였고,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외부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4] 이 개입방식에 대해선 월간 말 출신 인사들과 민중의 소리 출신 인사들 간의 증언이 조금씩 다르다.[5] 월간 말지가 이들의 산실 역할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