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21:38:10

왕창근


성씨 왕(王)
이름 창근(昌瑾)
생년 9세기 추정
몰년 10세기 추정

1. 개요2. 생애3. 기타4. 기록

1. 개요

당나라의 상인. 후삼국시대태봉으로 건너와서 장사를 했다. 918년 고경참문 사건과도 얽힌 인물로 《삼국사기》, 《동국사략》 , 《고려사》 등에서 등장하나 내용은 상이하다.

2. 생애

당나라에서 건너온 왕창근은 철원의 시장거리 가게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918년 3월, 시장에서 옛 의관을 착용한 백발의 건장한 남성에게 오래된 거울 하나를 쌀을 주고 샀다. 창근은 거울을 벽에 걸어두었는데, 해가 거울 표면에 비치자 글자로 쓴 글이 나타났다고 한다. 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리니 먼저 닭(鷄)을 잡고 후에 오리(鴨)를 쥘 것이다.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몸을 청목(靑木) 중에 숨기고 한 마리는 모습을 흑금(黑金)의 동쪽에 드러낼 것이다.”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己年中二龍見, 一則蔵身青木中, 一則顯形黒金東."
삼국사기 권제50 궁예전 중

거울의 쓰인 글을 기이하게 여긴 왕창근은 거울을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는 담당 관리와 창근에게 거울의 주인을 찾도록 하였으나 찾지 못했고, 다만 발십사(㪍颯寺) 불당에 진성(鎭星)의 소상(塑像)이 있었는데, 그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1]

궁예는 이 일을 기이하게 여겨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옛 거울에 적힌 글을 해석하게 했다. 송함흥 등은 거울의 글이 왕건궁예를 멸망시키고 계림(신라)와 압록(압록강)을 차지한다고 해석되자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 해석한 내용을 거짓으로 꾸며 궁예에게 아룄다고 한다.

3. 기타

현대에는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왕건 세력이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로 보는 의견이 많다. 왕창근의 거울 사건 이후 918년 음력 6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장수들이 왕건에게 역성혁명을 권할 때 왕창근의 거울 사건을 언급하며 정변을 정당화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하고.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배우 오성열이 왕창근 역을 맡았다.[2]

4. 기록

이보다 앞서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당(唐)으로부터 와서 철원의 시장 거리 가게에 우거(寓居)하였다. 정명 4년 무인(918)에 이르러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생김새가 크고 건장하였고, 귀밑털과 머리카락은 모두 희었으며, 옛 의관을 착용하고, 왼손에는 자기 사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다.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는가?”라고 하니 창근이 곧 쌀을 주어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은 쌀을 거리의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후에는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에 걸어두었는데, 해가 거울 표면에 비치자 가는 글자로 쓴 글이 있었다. 그것을 읽어보니 옛 시(詩) 같았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리니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쥘 것이다.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 한 마리는 몸을 청목(靑木) 중에 숨기고 한 마리는 모습을 흑금(黑金)의 동쪽에 드러낼 것이다.”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그것을 보고서는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담당 관리[有司]에게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찾도록 하였는데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발삽사(㪍颯寺) 불당에 진성(鎭星)의 소상(塑像)이 있었는데,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한참 동안 기이함을 탄식하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그것을 해석하도록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렸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말한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나 하나는 몸을 청목(靑木) 중에 감추고, 하나는 모습을 흑금(黑金)에 드러낸다고 한 것에서 청목(靑木)은 소나무[松]이고 송악군(松岳郡) 사람으로 용(龍)자를 이름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자손이니 지금 파진찬 시중을 말함이다. 흑금(黑金)은 철(䥫)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을 말함이다. 지금 임금이 처음 이곳에서 일어났으나 마침내 이곳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쥔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후에 압록(鴨緑)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송함홍 등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잔학하고 난폭하기가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만일 사실대로 말하였다가는 비단 우리들만〔죽어서〕 소금에 절여지는 신세가 될 뿐만 아니라 파진찬도 또한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이에 거짓으로 말을 꾸며서 아뢰었다. 왕이 흉악하고 잔학하여 자기 멋대로 하니 신료들이 두렵고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 《삼국사기》 권제50 궁예전 중 -

[1] 고려사에 의하면 발십사는 동주(東州)에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강원도 철원군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발십사는 철원 일대에 있던 절로 추정되나 위치는 알 수 없다.[2] 해당 드라마에서 기훤에게 간 양길의 사자, 서남해 호족, 입전, 김행, 박영규 집사 역을 연기하면서 1인 다역 연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