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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의조(毅祖) → 태종(太宗) |
시호 | 선위건무영명장정성덕신공효철황제 (宣威建武英明莊正聖德神功孝哲皇帝) |
존호 | 현주(賢主) |
작위 | 용군공(勇郡公) |
성 | 응우옌(Nguyễn, 阮, 완) |
휘 | 푹 떤(Phúc Tần, 福瀕, 복빈) |
부황 | 신종(神宗) |
모후 | 효문황후(孝文皇后) 막티자이(莫氏佳) |
생몰년도 | 1620년 7월 18일 ~ 1687년 4월 30일 |
재위기간 | 1648년 3월 19일 ~ 1687년 4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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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후 레 왕조 시기 응우옌씨 정권의 제3대 왕. 응우옌푹란의 아들이다.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철황제(哲皇帝)이고 생전 봉호는 용예후(勇禮侯), 용군공(勇郡公)이고 신하들에게 현주(賢主)로 불렸다.2. 생애
어릴 때부터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친이 찐씨 정권의 왕 찐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1648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응우옌푹떤이 즉위 하자마자 응우옌 주는 찐씨 정권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 남북국시대에 한동안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1655년, 응우옌푹떤은 우위인 것을 이용해 찐씨 정권을 공격, 남강(藍江) 이남 7개 현을 빼앗았으며 본인이 직접 친정해 군대의 사기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남강 일대로 교착을 유지하는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응우옌 군 내부 다툼과 지속된 전쟁으로 병사들도 지쳐가자 이 틈을 노린 찐깐에 의해 응우옌 군은 패퇴하였다.
태종조(太宗朝) 후반인 1672년, 두 왕국은 서로의 병력을 모아 총력전을 벌였고 두 왕은 서로의 아들을 대리로 내세워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도중에 찐 주가 휴전을 제안해 린강(𤅷江) 일대를 국경으로 삼아 100년간 이어질 평화를 구축하였다. 이후 응우옌푹떤은 남방의 참파 및 캄보디아를 공략하여 21세기 베트남과 비슷한 면적의 영토를 완성하였다.
1687년 4월 30일 사망하였고 유해는 해갈산(海葛山)에 매장되었으며 왕위는 아들 응우옌푹타이가 이었다. 본래 묘호 없이 대원수 총국정(總國政) 및 공고덕후용철왕(功高德厚勇哲王)이란 시호만 추시되었으나 현손자 응우옌푹코앗이 의조(毅祖) 선위건무영명장정성덕신공효철왕(宣威建武英明莊正聖德神功孝哲王)으로 다시 추시했다.
1806년 7월 23일, 곤손자 자롱 황제가 의조의 묘호를 태종(太宗)으로 개정했으며 시호를 1급 격상시켜 앞 부분을 활용한 채 황제(皇帝)로 추존, 능호를 장흥릉(長興陵)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