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04:56:59

오쿠야마 레이코

1. 개요2. 특징3. 생애4. 대표작

1. 개요

奥山玲子

일본애니메이터. 생년월일은 1936년 10월 26일 ~ 2007년 5월 6일. (향년 70세) 미야기현 센다이시 출신. 일본 최초로 작화감독의 자리에 오른 여성 애니메이터이다. 2007년폐렴으로 사망했다.

2. 특징

남편은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슈퍼 마리오를 디자인한 코타베 요이치. 서로 없으면 못 사는 잉꼬부부였다고 한다.

동화 책같은 작화가 특징으로 주로 동화 책 원작 애니메이션이나 마법소녀 애니메이션의 작화를 담당했다. 동시기에 같이 일하던 동료 미야자키 하야오도 매우 뛰어난 실력의 애니메이터라고 평한 실력자이다. [1]

3. 생애

아버지는 교사가 되라고 했지만 반항기라 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고 그림에 흥미가 있어 그림으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토에이 동화동화책을 만드는 회사로 잘못 알고[2] 1957년에 임시채용으로 입사했다. 당시 토에이에서는 여성 직원은 임시직으로 고용해서 쓰다 버리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정직원과 임시직원 사이에는 임금차별이 심했고, 그래서 오랜 시간 낮은 급료로 잔업을 하며 일해야만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직원은 동화만 그리다 그만두었다고 한다.
  •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여성은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었고, 직장이란 남편감을 찾는 곳 또는 결혼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일하는 곳쯤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토에이 회사 입장에서도 결혼하면 그만 둘 것이 뻔하고 여성은 기술이 필요없는 단순노동인 시아게(채색)팀에서 일을 시켰기 때문에 굳이 정직원으로 뽑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계약직 비정규직 동화맨은 하루 20장~40장을 그려야 하는 할달량이 있었는데, 정규직은 그런 것도 없어서 놀면서 5장~10장 정도 그렸고, 퇴근 후에는 다른 애니메이션 회사(무시 프로덕션)의 일감을 부업 삼아 그렸다고 한다. 나중에는 이런 정규직의 직업 윤리의 결여로 인해, 토에이 동화측은 정규직을 대거 짜르는 조치를 하게 된다.

오쿠야마 레이코는 이런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오기로라도 토에이에서 계속 일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동화에서 원화로 승격하고, 원화에서 작화감독까지 승진되는 쾌거를 이룬다.

그러나 토에이 측에서는 그녀가 출산 휴가를 끝내고 돌아오자 아이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테니 비정규 계약직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했고 오쿠야마 레이코가 이를 거절하자 남편을 트집을 잡아서 해고를 시키고 사내 이지메를 하기에 이른다.

회사에서는 그녀가 회사 방침에 자꾸 대들고 하니까 건방지다고 극장용 영화 제작팀에서 TV용 광고 제작팀으로도 좌천시킨 적도 있었는데, 그림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결국 다시 영화 제작팀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

오쿠야마는 이에 반발하며 사내에서 노동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여성 애니메이터의 대우를 개선하고 부당 해고된 직원들을 복직시키는 성과를 얻는다. 오쿠야마는 목적을 다 달성하고 할 일을 끝냈다며 토에이를 퇴사한다.

토에이를 퇴사하기 전, 1973년 무시 프로덕션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슬픔의 벨라돈나>에 가명으로 참여한다.

이후로는 주로 남편을 도우며 애니메이터 활동을 하고 원래 자신의 꿈이었던 동화책, 동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부터 패션 센스가 매우 좋았다고하며[3] 가난한 후배 애니메이터 들에게 비싼 밥을 대접할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로선 여성은 아이를 낳으면 은퇴하는 게 일반적인 사회 인식이었는데 끝까지 일을 하겠다고 했고 남편 코타베도 그 의지를 알기 때문에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2019년 남편 코타베 요이치가 시대 고증 자문으로 참여한 드라마 나츠조라의 주인공의 모델이 된다. 대신 드라마의 내용은 대부분 픽션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매우 히트하면서 시대를 앞서간 여성 애니메이터이자 노동 운동가로 재조명되며 관심을 끌고 있다.

애니메이터 츠노다 코이치와 친해서 공동작업한 적이 많았다.

은퇴후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일했던 토에이 동화의 극장용 '만화영화'도, 당시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은 좋아한다고 말했다. 본인은 상업용 애니메이션 보다는 이런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애당초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서 토에이 동화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서 진짜로 애니메이션이 재미있구나 라고 생각한 작품은 주문이 많은 요리점(미야자와 겐지 원작의 오카모토 타다나리 감독의 예술 단편 애니메이션 작품#)이었다고 한다. 유튜브 보러가기

그러면서 요즘에는 이른바 아트계의 개인적인 예술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데, 당시에 그런 것이 있었다면, 자신은 절대로 그쪽으로 갔을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활동했을 때는 애니메이션이라면 토에이 동화 밖에 없었다. 마치 결혼을 잘못해서 실패한 사람처럼 토에이 동화에서 열심히 일한 그 10여년은 뭐였을까 라고 후회한다고 했다. 오쿠야마 레이코의 본인 말로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일개 동화맨으로 입사해서 원화맨으로 승격하고, 원화맨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작화감독까지 승진하고 회사방침에 반발해서 노동운동도 적극적으로 하고 결국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사직했다고 한다.

4. 대표작

오쿠야마 레이코 작화 모음 작화보루 제공

[1] 평론가 오구로 유이치로 말로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인터뷰하러 갔을 때 성격이 매우 까칠한 미야자키는 등을 돌리고 제대로 응하지 않았는데 애니메이션 '해저 3만 마일'과 오쿠야마 레이코에 대한 질문을 하자 대단히 기뻐하면서 태도를 바꾸며 취재에 적극 응해줬다고 한다. #[2] 일본어로도 저 두 단어는 한자는 다르나 발음이 같다. 심지어 한자도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자세하게 안 보면 잘못 읽을 가능성이 크다.[3] 토에이 동화의 선배였던 오오츠카 야스오가 그녀가 출근할 때 입은 옷을 스케치한 그림들이 남아있다. 매일 옷이 바뀌니까 도대체 옷을 몇 벌이나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날 입고 온 옷을 그림으로 스케치해 봤는데, 한달 정도 후에야 같은 옷을 다른 옷과 겹쳐입으면서 돌려입는 것을 알고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그만뒀다고 한다. 오쿠야마는 처음엔 무슨 스토킹인가 생각하고 기겁해 도망다녔으나 곧 창작자로서의 의도를 이해하고 허락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츠노다 코이치도 오오츠카 야스오를 따라서 오쿠야마 레이코의 스케치를 그렸다고 한다. 이 노트는 남아있어 오오츠카 야스오의 저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드라마 나츠조라에도 나오는 에피소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