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나이 | 15세 |
국적 | 동부여 |
가족 | 할아버지 충구 남동생 용 남편 무휼 아들 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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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화 바람의 나라의 등장인물. 무휼의 차비이며 실제 역사상의 차비 해씨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등장 기간은 짧지만 그 영향력은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는 인물이다.
2. 작중 행적
대소왕의 막냇동생인 갈사국 왕 충구의 손녀로, 그녀의 아버지는 후사가 없던 대소왕이 가장 총애한 조카였다. 그러자 대소왕의 다른 동생들은 왕위 계승권에서 조카한테 밀릴 것을 두려워해 자객을 보내 조카를 죽여 버렸다. 그렇게 아버지를 잃고 얼마 뒤에는 어머니마저 자신의 눈 앞에서 독살당한다. 당시 연이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일찍 감당하기 힘든 끔찍한 일을 겪은 셈.몇 년 뒤 고작 열한 살의 나이로 당시 고구려 태자였던 동갑내기 무휼의 차비(次妃)가 된다. 비록 연은 무휼의 차비로 들어왔으나 그녀 생전에 무휼에게 부인이 그녀뿐이었기에 원작과 소설판에서는 모두가 그녀를 태자비라 불렀다.[1] 사실 무휼과 연의 혼사가 성사된 것은 철저히 정략적인 이유에서였다. 대소왕은 이미 유리명왕에게 태자를 볼모로 보낼 것을 요청한 바가 있는데, 유리왕의 장남 도절태자가 볼모로 가길 거부하다가 갑자기 죽었고 차남 해명태자는 유리명왕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다가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죽었다. 그래서 대소왕은 이미 태자를 둘이나 잃은 유리명왕에게 더는 볼모로 태자를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자로 즉위한 무휼이 학반령에서 부여군을 대파하자, 무휼이 비범한 것을 알고 전략을 바꿔 정략혼을 제안했던 것.
당시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를 감안하면 무휼의 차비로 보내질 왕녀는 고구려에 반 볼모로 보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부모가 모두 죽어 가장 만만한 연이 혼인 상대로 낙점됐다. 게다가 연이 선천적으로 몸이 무척이나 약했기 때문에 고구려에 시집 가서 죽어 버리면 그것을 빌미로 전쟁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왕비가 되면 이를 핑계로 고구려를 압박할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도 하고 보낸 것이라 하니 참으로 냉혹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연의 할아버지인 갈사왕은 무휼이 범상치 않음을 꿰뚫어 보고 이대로 연이 부여에 있으면 부모처럼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생각해 손녀라도 살리기 위해 고구려로 시집을 보냈다.
무휼에게도 연과의 결혼이 초혼이라 원비 자리가 비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이 무휼의 차비로 들어가게 된 것은 당시 고구려 태왕이자 연의 시아버지인 유리명왕이 장차 왕비가 될 태자의 원비 자리를 동부여가 가져가지 못하게끔 견제했기 때문이었다.[2] 부여에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부모를 모두 잃고 숨죽이며 살았는데 시집 온 고구려에서도 떨려나온 왕족이라는 이유로 천대받았으니 참으로 기구한 팔자.
유리명왕의 두 번째 왕비이자 연의 시어머니인 서화도 연을 홀대한 건 마찬가지였다. 서화는 무휼의 안위에만 모든 신경을 쏟았으며 연이 호동을 낳을 때를 제외하고는 연에게 특별히 관심을 써 주는 일도 없었다. 소설판을 보면 무휼의 후사를 보전하기 위해 연에게 한 짓은 사실상 아동 학대에 가깝다.[3] 서화는 연의 초경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무휼과 합궁할 것을 강요했고 이 때문에 연은 미처 자라지도 못한 몸으로 임신을 한다.[4] 그러나 산달이 임박해서 연의 유모인 부자가 산청 얘기를 계속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서화는 산청을 차리는 일을 계속 미뤘다.
뿐만 아니라 출산에 필요한 용품도 미리 챙겨주지 않아서 유리명왕의 후궁인 영채가 배후인 배극의 지시에 따라 아기용품을 선물로 가져다 줬을 정도였다. 산청을 차려주는 일은 계속 미뤘으면서 후궁인 영채가 연을 미리 챙겨줬다는 소식을 듣자 순서를 어긴 일이라 여겼고, 이에 분노한 서화는 곧바로 연의 궁으로 달려가 연의 앞에서 부자에게 영채의 선물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 호되게 질책하여 만삭이 된 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곁에 있던 무휼이 이를 보다 못해 "이쪽에서 챙겨주지 못하고 있으니 영채마마께서 미리 챙겨 주신 것 아니냐?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라며 부자를 편들어 사태를 수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화는 자신이 연에게 잘못한 것을 반성하지 않고 며느리가 보는 앞에서 아들에게 망신당한 것만 생각하며 부끄러워했다.
나중에 정말 오늘내일할 정도로 연의 출산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서화는 그제서야 만월당에 산청을 차려줬는데, 이 만월당은 유리명왕의 첫 번째 왕비이자 서화의 친언니인 선왕비인 송씨가 도절태자를 출산하고 숨진 곳이다. 이 소식을 듣고 유리명왕조차 "그 곳은 터가 좋지 않은 곳인데 어찌 그 곳에 산청을 다시 차렸나? 자기 아들은 귀히 여기면서 며느리는 어찌 그리 대하누?"라며 기막혀 했다. 연이 목숨 바쳐 남긴 호동에게도 소홀한 건 매한가지였기에 후에 이지가 호동을 참소했을 때 이지의 편을 들어 호동을 축출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이렇듯 철저한 정략혼으로 무휼과 맺어졌으나 무휼과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의 결실로 아들 호동도 낳았다. 무휼은 자신이 즉위하면 부여를 정복하여 주몽을 위한 사당을 세우면서 연을 위해 예쁜 궁도 지어주고, 더 나아가 사랑하는 연을 원비로 올리고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여 다시는 연을 울지 않게 하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호동이 막 태어났을 무렵에도 무휼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을 자주 보지 못하고 영채를 보러 가려는 유리명왕을 보좌하기 위해 두곡 별궁으로 행차하게 된다. 이에 연은 출산 이후 더 약해진 몸으로 궁녀의 등에 업혀 근처 산에 올라가 무휼이 떠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본다. 이때 궁녀에게 사실 어젯밤에 무휼이 오랜만에 자신의 궁에 들렀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바라만 봤다고 말한다.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궁금했지만 말을 꺼냈다가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고[5]. 무휼도 이때 숨어서 자신을 지켜 보는 연을 봤는지 주변을 살피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하산하던 연을 기다렸다가 만났다. 그리고 이게 연 생전 마지막 부부 상봉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부여에서 호동을 죽이려고 현무 사구를 보낸다. 하지만 연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호동이 울어대는데도 사구의 농간으로 궁 내에 요상한 기운이 흘러서 도움을 청해도 아무도 와주지 않는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6] 연이 호동을 낳던 순간부터 호동의 목숨을 노려왔던 사구는 연에게 '네 부모 모두 부여 사람으로서 부여 왕에게 충성을 바쳤는데 너는 왜 부여 왕의 명을 받들고 온 내게 맞서느냐? 그리고 신기 없는 자가 귀신을 받아 싸우면 죽게 되니 칼을 거두라'며 호동을 포기하면 네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라 했으나, 끝내 연은 본인의 죽음을 감수하고 '신기'를 갖지 못한 보통 사람의 몸으로 호동을 지키러 나타난 시아주버니인 해명태자의 혼을 받아들인 채로 무휼의 검을 들고 사구와 싸웠다.
힘겹게 싸우던 중에 시동생인 해색주가 이상한 기운을 눈치채고 사구의 주술로 잠들어버린 호위병들을 깨워 이끌고 연의 궁으로 서둘러 들어오면서 그 양기를 못 견딘 사구가 급히 떠나는 바람에 가까스로 사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은 신기 없는 몸으로 해명태자의 혼을 받아들여 싸운 탓에 이내 그 반동으로 숨지고 만다.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이 목숨 걸고 지켜낸 호동을 바라봤고, 자신의 죽음을 예상했기에 나타날 때부터 울고 있던 해명태자를 보며 그제서야 해명태자의 눈물을 이해한다. 그러면서 '나는 당신과 달리 신기가 없어서 다시 이승에 오르지도, 우리 아기를 품에 안지도 못할 거다.'라고 생각하며 갓난 아들과 영영 헤어지게 되는 것을 슬퍼한다. 그리고 임종의 순간 곁에 없던 무휼을 그리워하며 '그래도 연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잊지는 않으시겠지요?'라는 애절한 대사를 친다. 한편 연이 사망하는 순간, 무파의 공격에 부상을 입었던 무휼은 연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가 치료를 받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와중에도 신기 때문인지 사랑 때문인지 알 수는 없어도 연의 죽음을 직감으로 알아차린다.
너무나 이른 죽음을 맞았지만 사실 원작이나 소설판 모두 연이 일찍 세상을 떠날 것을 암시하는 복선이 많다. 원작에서는 출산 과정부터가 대단히 힘들었고, 출산 후에는 평소에도 좋지 못하던 몸이 더더욱 약해지고 있어서 연의 궁에 있는 궁인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언급된다. 호동이 아직 아기였는데도 힘이 들어서 자주 안아주지 못했다는 대사까지 나올 정도. 소설판에서는 연이 임신한 이후 식사를 못해 계속 여위어 가서 유모인 부자가 애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연이 목숨 바쳐 지켜낸 호동은 다섯 살 무렵에 흑귀사조의 공격을 받는데, 이때 연이 나타나 호동에게 빙의되어 함께 흑귀사조를 물리친다.[7] 무휼이 기억하는 연이 평소에 소심하고 눈물 많았던 데다가 사망 당시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호동에 대한 모성애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3. 평가
단행본 분량으로 보면 1권에서 등장이 끝나는 인물로, 한국 만화 역사상 가장 빨리 사망한 히로인이다.[8] 그러나 작품 내에서 연의 영향력은 그녀가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막강하며, 비련의 여주인공이지만 강인한 어머니이기도 했기에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차도남을 넘어서서 냉혹남으로 거듭나 버린 무휼이 평생을 바친 단 하나뿐인 사랑이었으며, 연 역시 무휼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사망한 후에도 무휼의 회상씬에서 간간이 등장하면서 왕으로서 냉혹해져만 가던 무휼의 얼마 남지 않은 따뜻한 일면이나 약한 마음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무휼은 즉위한 직후부터 연을 잊고 왕으로서의 소임에 치중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나는 왕이고 더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계속 다짐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아들을 둘 필요성 때문에 결국 이지와 합방하면서 회상 속 연에게 "그때 우리가 뭘 알았겠느냐?"며 그만 떠나라고 혼잣말을 한다. 그렇게 연을 잊으려고 애쓰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에는 계속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실제로 의지할 만한 몇 안 되는 사람인 세류에게 힘든 상황일수록 그녀가 계속 생각난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무휼은 아들 호동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데, 이는 연이 궁에서 호동을 지키기 위해 홀로 싸우다 죽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동은 갈수록 연을 꼭 닮은 아름다운 외모와 선량한 성격을 가진 모습으로 자라났기에 무휼에게 있어서 여러모로 연을 떠올리게 만들어 복잡한 감정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유일한 사랑을 잃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지만 그 유일한 사랑이 남긴 하나 뿐인 혈육이었고, 모본왕 해우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어쨌든 단 하나 뿐인 아들이니 그럴 만도 했다.
사실 무휼은 왕이 되면 사랑하는 연을 원비로 올려 주고 연을 위해 부여를 정복할 생각을 했기에 연에게 약속한 그 어떤 것도 해 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애달팠던 것. 연에게 "장차 우리 아이가 내가 이룬 것을 물려받아 네가 원하던 대로 살게 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연과 사별하고 몇 년 뒤에 즉위하여 정치적, 군사적인 이유로 이지를 원비로 들인 후에도 무휼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지가 차지한 원비의 자리를 "내 아버지가 연에서 뺏어갔기에 언젠가는 연에게 돌려줄 자리였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유리명왕의 처사를 부당하다고 계속 느끼고 있었으며, 이지가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끝내 마음을 주지 않은 것 역시 이지에게 연이 가졌을 원비 자리를 준 것만으로도 자신으로선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호동이 원비 이지의 모함에 휘말려 자결하자 무휼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그리운 사람을 또다시 울리고야 말았다."며 당시 임신 중이던 이지를 그 자리에서 죽이려 할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이지에게 "네 아이는 절대로 왕이 될 수 없을 거다."라는 말까지 남긴다.[9]
4. 여담
- 현무인 사구의 말로는 용과 누이인 연은 닮은 면이 있다고 한다.
- 같은 잡지에 단편으로 나온 패러디에서는 모든 캐릭터를 휘어잡고 갈군다.
- MMORPG 바람의 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서버의 이름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대륙 서버로 불리며 기타 농촌 서버들에 비해 압도적인 인구 수를 자랑한다. 또한 이 캐릭터의 이름을 본떠 바람의 나라 모바일판의 제목이 바람의나라: 연이 되었다.
[1] 조선에서 왕비를 한 명만 두었기 때문에 현대의 한국에선 차비가 후궁인 걸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차비는 정실 부인이 맞다. 원비(정비)보다 서열이 낮긴 하지만, 후궁은 아니다.[2] 소설판의 묘사에 따르면 유리명왕은 연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노골적으로 탐탁찮아했고 급기야 "너는 내 눈에 띄지 않도록 궁에서 나오지 말아라."는 말까지 대놓고 한다.[3] 다만 이 시대에는 14~15세에 아이를 낳는 게 흔한 일이었고, 조선 후기나 일제강점기까지도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4] 무휼과 연이 모두 15세였던 해의 여름에 호동이 태어났으니 늦어도 14세가 되던 해 가을부터 합궁했던 듯하다.[5] 사실 연은 유리명왕이 그래도 무휼을 사지로 보내진 않을 거라고 믿지만 무휼도 위의 두 형들처럼 잘못될까 늘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휼은 오늘 본 자신이 내일은 차가운 이름으로만 돌아오지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해주며 우는 연에게 '나는 왕이므로 비굴하게 살아선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한다. 이 말은 연 사후 신분상 의무와 책임 때문에 한없이 냉랭해진 무휼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6] 당시 궁에는 신기가 있거나 무력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태자였던 무휼은 부왕인 유리왕이 애첩인 영채를 보기 위해 두곡 별궁에 행차하는 바람에 함께 두곡 별궁에 가 있었고, 호동이 태어날 때 해명태자의 도움을 받아[10] 호동을 흑귀사조로부터 지킨 적이 있던 세류는 현무를 추적한다고 궁을 비웠던 상황이었다. 이때 세류와 중간에 합류한 괴유가 "이상한 흐름이 국내성으로 가는데도 두곡으로 가겠냐?"고 하자, 세류는 일단 무휼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해서 두곡으로 가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답변을 하고 방향을 틀었다. 물론 세류의 결정 덕분에 두곡에서 홀로 사구의 처인 무파와 싸우고 있다가 수세에 몰렸던 무휼은 세류와 괴유의 지원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7] 이때 호동이 들었던 검이 바로 연이 호동을 위해 들었던 무휼의 검이다. 무휼은 호동에게 그 검을 물려 주면서 '너를 사랑한 사람이 너를 지키기 위해 들었던 검'이라고 했다.[8] 잡지 '댕기'에서 연재되던 시절에 연이 사망하는 분량이 연재되자 독자들의 항의가 엄청났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9] 사실 이것이 이지의 가장 큰 목표였으니 생각해보면 최고의 저주를 한 셈. 그러나 어쨌든 무휼의 바로 아래 동생인 해색주가 민중왕으로 즉위해서 짧은 치세 끝에 사망하자 이지 소생인 해우가 모본왕으로 즉위했기에 이지는 왕의 모후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해우 역시 5년 남짓 즉위하며 폭정을 일삼다 부하들에게 살해당했으니 이지의 말년 역시 좋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무휼의 저주가 통하기는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