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의 첫 페이지 |
프랑스어: 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
영어: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woman and of the woman citizen
여성은 단두대에 올라설 권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단에 올라설 권리를 지녀야 한다.
1. 개요
《여권선언》을 작성한 올랭프 드 구즈 |
2. 내용
여권선언의 내용은 대체로 콩도르세[2]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는 곧 계몽주의적 시각에서 모든 이성을 지닌 존재는 동일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구즈는 남녀의 성별 차이를 강조하지 않고 대신에 남녀의 공통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남녀가 공통적으로 이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그 당연한 결과로서 여성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구즈는 당시 프랑스 사회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남성들의 불합리한 폭거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폭거를 계몽과 이성의 빛으로 쫓아내버리고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것이 프랑스 혁명의 진정한 완성이라고 본 것이다.그대들(남성)과 우리들(여성) 사이에 공통의 것이 존재하는가…(중략)…그것은 모든 것이다.- 전문(前文) 중
전문과 17조항으로 이루어진 인권선언의 구성을 그대로 채용한 여권선언은 현재에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일부를 소개하자면, 제4조는 이성과자연법에 관한 것이다. 자유와 정의는 타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되돌려 주는 데 있기 때문에 자연법과 이성을 근거로 여성들에게 그녀들의 자연권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7조는 엄정한 법 집행에 관한 것으로, 여성들이 법에 따라 처벌받으며,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준엄한 법에 복종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제12조는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에 대한 보장이 개인적 유용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수립되어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제13조는 남녀의 조세 부담은 평등해야 하며 여성은 모든 부역이나 고된 일자리는 물론 관직과 일자리의 배분에 참가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또한 구즈는 결혼제도를 혁파하고 사회적 계약으로 이를 대신하며, 사생아들에 대해서도 동등한 재산상속권을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이어서 구즈는 국민교육이 중요한 만큼 입법자들이 여성들의 교육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즈에 따르면, 여성의 정신이 발전하지 못한다면, 그 국가 또한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것은 가장 유명한 구절인 10조이다.
10조. 여성은 단두대에 올라설 권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단에 올라설 권리를 지녀야 한다. 단, 자신의 의사표현이 법으로 수립된 공공질서를 교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맺는말에서 구즈는 이성과 진리와 자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남성들의 교만함과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여성들에게 각성할 것을 강하게 촉구하였다. 그녀는 혁명으로 여성들이 얻은 것은 멸시와 부당한 대접뿐이었다고 단언한다. 구즈는 여성들의 정치적 참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혁명은 결국 실패한 혁명이 될 것임을 선언했다. 구즈의 선언이 저주로 작용한 까닭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혁명이 결국 나폴레옹의 쿠테타로 실패하고 말았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3. 영향
단두대에 올라서는 올랭프 드 구즈 |
먼저, 구즈 본인이 당시 정치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파리에 처음 왔을 때, 구즈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당대의 민중들은 루이 16세를 '민중의 아버지', '평화의 보증인'으로 생각했는데 구즈 또한 평민 출신으로 대중적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렌 사건 이후에 민주주의자로 돌아섰음에도 이러한 생각은 여전히 잔존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구즈는 확고한 지롱드파로 머물렀으며 국왕에 대한 온정적 시선을 내비쳤던 것이다. 구즈는 왕권의 정지를 가져온 1792년 8월 10일 사건에 지지를 보내면서 공화주의자임을 자처했지만 동시에 자연인으로서 루이 16세에게 이미 왕권을 박탈하였으므로 더이상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1793년 이후 자코뱅파가 정국을 장악하게 되면서 구즈는 자신의 신념으로 인해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구즈는 국민공회의 적법성을 부정하며 국민투표로 정부형태를 정해야한다는 내용의 벽보를 붙이는 도중에 붙잡혔다. 그녀는 '민중주권을 침해한 저술을 발표한 죄'로 처형당했다.[3]
이어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혁명적 여성운동의 전개에 우려를 표하며 그것을 멈추게 하려고 하였다. 구즈는 대혁명 당시 처형당한 여성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공공연하게 표현한 것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었다. 또한 구즈가 처형되기 사흘전에 모든 여성클럽의 활동이 중지된 바 있었음을 보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 1793년 모니퇴르 신문에는 그녀가 '그녀의 성에 적합한 덕목을 망각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녀의 '죄'는 여권선언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금기시되던 여성의 정치 참여를 스스로 실천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마지막으로, 그녀 자신이 민중운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까닭에 후대에 대두된 여성 상퀼로트들이 그녀에 대해 호의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여성 상퀼로트들은 보편주의에 입각하여 "l'homme, citoyen"을 "인간, 시민"으로 해석하였다. 그들은 굳이 그것을 여성형태로 바꾸지 않고 원래 쓰던대로 써도 충분히 모든 '시민(여성을 포함)'을 지칭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할 때, 근거조항으로 인권선언을 내세웠다.[4] 또한 사상적으로는 콩도르세의 저작과 발언을 자주 인용하고 의존하고 있어 독창적이지 못한 것도 있다. 콩도르세 또한 "여성 시민권을 위한 청원"이라는 이름의 팜플렛을 내놓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권선언이 주목받은 것은 프랑스 혁명 200주년(1989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이때 여권선언이 재조명되면서 구즈가 재발견되고 200년의 시간을 건너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게 된 것이다. 구즈의 유해는 2007년 프랑스의 국가 묘지로(우리나라의 현충원) 이장되었다. 다만, 공포정치기에 처형된 이들 모두가 그렇듯이 남아있는게 없어서 이장은 여성권리에 대한 상징적 행사였다. 어떻게 보면, 1989년에 와서 그녀가 다시 읽혀지게 된 것은 그녀가 말한 '혁명의 완성'이 이 시대에 들어서야 진정으로 성취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평가
구즈의 여권선언은 1791년의 프랑스 사회에서 불쑥 솟아난 돌맹이와 같았다. 여성의 정치참여가 금기시되던 사회에서 구즈는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으며, 외부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다. 구즈는 계몽사상이 제시한 이성과 진보를 믿었으며 그것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성을 가지고 생각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신념은 시대를 앞서나간 생각이었으며, 그 자체로 '혁명적'이었다. 그녀는 남성의 야만적 폭력과 사회적 억압으로 인해 불합리하게 고통받는 여성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제시하였으며, 남성들의 어리석음을 규탄했다. 여권선언을 통해 구즈는 여성도 남성만큼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임을 주장하고 대등한 참정권을 요구한 것이다.하지만 구즈가 프랑스 혁명의 모순을 지적하였듯이 우리도 구즈를 신격화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철저한 계몽사상의 신봉자였던 그녀는 스스로가 계몽주의와 배치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녀는 인권선언이 일부 부유한 계층의 남성에게만 해당한다고 비판하였으나, 구즈 본인도 그러한 구조와 공생 혹은 그것을 이용하여 이득을 본 사람이었다. 구즈는 남부 프랑스의 푸줏간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녀 자신이 이를 부정하고 귀족적 삶을 꿈꿨다. 그녀는 스스로를 퐁피냥 후작[5]의 사생아로 칭하면서 귀족출신임을 내세웠고 1748년생임에도 젊어보이기 위해 1755년생으로 속이고 다녔다. 그녀는 17살에 납세 관리인 남편과 결혼하여 아들도 두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남편이 죽었다. 남편이 죽자마자 그녀는 아들 피에르를 데리고 바로 파리로 상경했다. 그녀는 반자서전적 글에서 밝히길, "나는 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부유한 것도, 귀족가문 출생도 아니었다. 나는 아무 이유없이 희생되었고 그것은 이 남자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은 이유가 '부유하지도, 귀족 출신도 아니라서' 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자기 변명이다. 파리로 넘어온 그녀는 여류 문인으로서 꿈꿔왔던 사교계에 데뷔했다. 하지만 평민 출신의 그녀는 사실상 문맹이었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없었다. 따라서 조수를 불러 자기가 말한 것을 받아적게 하였다. 한 왕당파 작가는 구즈가 부유한 상인의 환심을 사서 그를 파산시켰으며 또 어느 도매상의 재산을 축내게 만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 작가인 레티프(Restif)는 그녀를 매춘부로 혹평하였고 변호사인 뒤베리에는 그녀가 광적이며 사랑에 미쳤다고 표현하였다. 실제로 구즈는 대혁명 전까지 파리의 화려한 귀족적 사교계 생활을 즐기기 위해 남자들에게서 8만 리브르에 달하는 자산을 뜯어내어 부유한 삶을 누리면서 문학 활동을 했다.
구즈와 여권선언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구즈의 사상은 1791년의 외침이다. 2018년의 대한민국은 구즈가 말한 대부분의 혁명이 완수된 상황이다.(여성참정권, 교육권, 사생아의 권리 등 대부분이 완수되었다) 구즈를 2018년의 대한민국에 억지로 끼워맞추기 보다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구즈를 이해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좀 더 올바른 평가를 내리는 길이다. 구즈가 가지는 모순점은 구즈가 여성인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영웅'이 아니라, 대혁명기의 프랑스를 살았던 한 명의 '사람'이기 때문에 존재한다. 구즈는 당시의 이상적 삶이었던 귀족적 삶을 추구하였다. 또 그것을 이루는 방식으로 자신의 젊음과 성을 무기로 삼았다. 이는 시대적 상황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구즈 본인이 귀족적 삶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성을 이용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구즈는 "사회 클럽(Social club)"이라는 계몽주의 단체에 출입하면서 콩도르세를 비롯한 당대의 저명한 계몽주의 인사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계몽주의에 대한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이같은 모순적 인물들은 대혁명의 시기에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스스로가 귀족이거나, 귀족적 삶을 추구하여 그것을 누리는 사람이지만 공화주의와 계몽주의를 주장한 사람들은 많았다. 구즈도 그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유명한 계몽주의자이자 여성권리를 주장한 콩도르세의 사상에 감화받은 구즈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열렬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자만큼 여자의 목소리를 더 잘 대변할 사람은 없다. 그것이 구즈의 외침이었다. 따라서 구즈는 여권선언을 발표하고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한 것이다. 구즈는 개인적 결함과 모순이 존재한 인물이었지만,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구즈는 계몽사상에 입각한 여성운동의 효시가 된 인물인 것이다.
[1] 다만 l'homme는 영어에서의 man과 마찬가지로 남성명사이지만 동시에 보통명사로 인간을 지칭한다. citoyen도 기본적으로 남성명사이지만 보통명사로서 모든 시민을 뜻한다. 구즈가 굳이 보통명사를 여성명사로 바꿔 쓴 것은 자신의 의도를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2] 이론적 계몽사상가인 콩도르세는 1789년 8월 26일에 선언된 인권선언의 원칙에 따라 인간을 이성을 지닌 존재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모든 남녀가 똑같은 자격과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콩도르세에게 인권선언의 "l'homme"는 남성명사보다는 일반명사로서 '사람'의 뜻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콩도르세는 여성의 자유를 박탈할만한 차이를 남녀로부터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히며 여성들에게 자신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투표권을 가지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이러한 그의 사상이 "사회 서클"의 일원이었던 구즈에게 상당부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3] 여권선언 10조의 단서조항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4] 하지만 "l'homme, citoyen"자체가 남성을 기본값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비판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보편주의적 입장에서야 이를 시민으로 본다지만, 기본값이 남성으로 전제된 것은 프랑스 혁명 자체가 남성중심적이었음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일반명사 citoyen을 cité라는 오래된 단어로 대체하기에도 너무나 어색하였다. 애초에 남성, 여성명사를 따로 쓰는 프랑스어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citoyen을 남녀차별적 언어라고 단정짓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모든 시민을 뜻하는 보통명사라 보아야 한다. 단, 여성학적 입장을 강조할 때 citoyenne을 쓰는 것은 구즈의 선례를 따른 것이며 이러한 맥락에서는 남녀차별적 언어로서 강조되는 것이다.[5] 저명한 문학가이자 반계몽주의 세력의 우두머리격으로서 순수한 문체와 고귀한 인품으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다. 퐁피냥 후작의 사생아라고 주장한 것은 필시 그녀의 귀족적 삶에 대한 열망과 문학가로서의 데뷔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다만, 퐁피냥 후작은 그녀를 자신의 딸로 인정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