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 에드먼드 그레이 Edmund Grey |
| 출생 | 1416년 10월 26일 |
| 잉글랜드 왕국 루틴 | |
| 사망 | 1490년 5월 22일 |
|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 |
| 아버지 | 존 그레이 |
| 어머니 | 콘스탄스 홀랜드 |
| 배우자 | 캐서린 퍼시 |
| 자녀 | 앤서니, 조지, 존, 엘리자베스, 앤, 테시 |
| 직위 | 제4대 그레이 남작, 초대 켄트 백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했다가 노샘프턴 전투에서 요크 왕조 편으로 돌아선 뒤 큰 보상을 받았다.2. 생애
루틴의 그레이 기사 존 그레이와 초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의 딸 콘스탄스 홀랜드의 외아들이다. 아버지는 제3대 루틴의 그레이 남작 레지날드 그레이의 후계자였지만, 1439년 레지날드 그레이보다 먼저 사망했다. 1440년 조부 레지날드 그레이가 사망한 뒤, 에드먼드는 조부의 상속인이 되었으며, 루틴의 그레이 남작 작위 외에도 루틴 성이 있는 덴비셔의 영지를 받았고, 베드퍼드셔의 위원이 되었다. 또한 가스코뉴 방면 잉글랜드 군이 복무했고, 1440년 10월 9일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443년 추밀원의 위원이 되었다.그는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와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간의 분쟁이 벌어졌을 때 에드먼드 보퍼트 편을 들었다. 1449년, 그의 부하들은 요크 공작의 지지자인 윌리엄 트레샴을 살해해 물의를 일으켰다. 에드먼드는 1457년 반역 혐의로 고발당했지만, 1459년 12월 의회에서 자신이 무죄임을 입증할 수 있었고, 고발은 기각되었다. 1460년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 우익을 지휘했던 에드먼드는 요크군과 내통해 그들이 전선을 돌파하는 걸 방관했고, 막판에 부하들과 함께 랭커스터군 우측면을 급습했다. 그의 배신으로, 랭커스터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했으며, 랭커스터군 지휘관 여러 명이 사살되었다. 또한 헨리 6세는 생포되어 런던 탑으로 보내졌다.
에드먼드 그레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랭커스터파를 배신한 대가로 큰 보상을 받았다. 암프틸 영지를 받았고, 왕의 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1463년부터 1464년까지 잉글랜드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1465년 5월 30일 어머니의 친척이 지녔던 켄트 백작이라는 작위가 그에게 다시 부여되었다. 또한 웨일스의 메리오녜스 백작령의 대법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그의 둘째 아들 조지는 에드워드 4세의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자매인 앤 우드빌과 결혼했다. 1470년부터 켄트 위원이 되었고, 1471년 베드퍼드셔와 노샘프턴셔의 위원이 되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한 뒤, 에드먼드 그레이는 그 해 7월 7일 리처드 3세의 대관식에 참석해 두 번째 검을 들었다. 1484년, 리처드 3세는 에드먼드 그레이에게 그가 소유한 영지와 관련된 모든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1485년 보스워스 전투 후 헨리 7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된 후에도, 에드먼드는 지위를 유지했다. 1487년, 헨리 7세는 그가 소유한 영지와 관련된 모든 보조금을 승인했다. 1490년 5월 22일에 사망했으며, 장남 앤서니가 그보다 먼저 자녀 없이 죽었기 때문에 모든 재산과 작위는 차남 조지 그레이에게 넘어갔다.
3. 가족
- 캐서린 퍼시(1423 ~ 1499):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엘레노어 네빌[1]의 딸.
- 앤서니 그레이(1443 ~ 1480): 루틴의 그레이 경.
- 조지 그레이(1454 ~ 1505): 제2대 켄트 백작, 제5대 루틴의 그레이 남작.
- 존 그레이: 유년기에 사망.
- 엘리자베스 그레이(1448 ~ 1472): 로버트 드 그레이스토크 경의 부인.
- 앤 그레이: 제8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 존 그레이의 부인.
- 테시 그레이: 엘모어의 존 가이스의 부인.
[1]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곤트의 존의 딸인 조앤 보퍼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