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魚有鳳1672년 ~ 1744년
조선의 문신, 유학자.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순서(舜瑞). 호는 기원(杞園). 경종의 장인 어유구(漁有龜)의 형이며, 선의왕후의 백부이다. 아내는 신 안동 김씨 김수증[1]의 딸로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의 고모이다. 사위는 홍상한으로 홍상한은 혜경궁 홍씨의 당숙이다. 그의 외현손은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2]이다. 아내의 사촌오빠인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2. 생애
사마시를 거쳐, 1699년 대과(大科)에 응시했다가 시험의 부정을 보고 과거 응시를 단념하였다.뒤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가 건원릉(健元陵) 참봉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1719년 사헌부집의를 거쳐 양주(楊州)목사에 전임되자 사퇴하였다. 1722년 신임사화로 김창집(노론4대신)의 동생이었던 그의 스승 김창협이 화를 입자 신원(伸寃)을 상소하였다.
1732년 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거쳐 사헌집의(執義)가 되고, 34년 호조참의, 1735년 승지, 찬선(贊善)을 지냈다.
3. 사상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이 심성변(心性辨)으로 논쟁할 때 이간의 편에 서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동일하게 오행(五行)의 이치를 갖추었다고 주장하였다.김창협의 성리학을 계승하여 1716년 권상하와 금수오상설(禽獸五常說)에 대해 논변을 벌였다. 김창협의 농암집 간행시 그의 사단칠정설을 잡지(雜識) 편에 넣자고 주장하였으나, 이이, 이황의 학설과 달라 당시부터 논쟁의 대상이었기에 호락 사이의 대립을 우려한 김창즙의 만류로 문집에서는 결국 빠지게 된다. 김창협 문하의 뛰어난 유학자였으나 동생 어유구가 경종의 장인이 되고, 본인도 소론과 교감한다는 혐의를 받으며 낙론 학맥에서 김창협, 김창흡의 뒤를 잇지 못하고 소외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의 학풍은 사위와 후손을 통해 제한적으로만 전수되었으며 제자로 이보천(李輔天, 1714~1777)[3]과 홍상한(洪象漢, 1701~1769)[4]과 그의 아들[5]인 홍낙성(洪樂性), 홍낙명(·洪樂命)과 이양신(李亮臣, 1689~1739)[6], 어석정(魚錫定, 1731~1793)[7]이 있다. 그리고 어유봉 본인의 손자인 어용림(魚用霖, 1721~1774), 어용빈(魚用賓, 1736~1781)도 그의 학맥을 이었다. 어용빈의 현손자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훗날 조선 개화 시기의 온건 개화파로 활동하게 된다.[8]
4. 저서
- 《기원집》
- 《경설어록》
- 《오자수언》
- 《논어상설》
- 《어류요략》
- 《대월첩》
- 《풍아규송》
5. 가족 관계
- 증조부 : 어한명(魚漢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