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남북조시대 양(梁)의 역대 전투를 정리한 문서로 시기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기준으로 정리되어 있다.2. 목록
2.1. 신호문의 변(神虎門之變)
<colcolor=#000> 신호문의 변 神虎門之變 | ||
시기 | 502년 7월 8일 ~ 502년 7월 9일 | |
장소 | 양주(揚州) 단양군(丹陽郡) 건강(建康) 남북액문(南北掖門) 신호문(神虎門) | |
원인 | 옛날 제의 총신(寵臣) 손문명(孫文明)의 난 | |
교전 | 양(梁) | 반군(反軍) |
지휘관 | 양황제 소연(蕭衍) | 수장 손문명(孫文明) |
장수 | 위위 장홍책† 전군사마 여승진 영군장군 왕무 효기장군 장혜소 | 실전(失傳) |
병력 | 실전(失傳) | 수백 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반군 전멸 |
결과 | 반군 진압과 수장 손문명 참살 | |
영향 | 개국공신(開國功臣) 장홍책(張弘策) 전사 |
손문명은 적거(荻炬)를 운반하는 기회를 이용해 사이에 병장기를 숨겨 신호문(神虎門)과 총장관(總章觀)을 불태웠다. 장홍책이 있던 위위부(衛尉府)를 기습했고 아무런 방비를 하고 있지 않던 장홍책은 반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당시 전군사마(前軍司馬) 여승진(呂僧珍)은 궁전 내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손문명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위병(衛兵)을 통솔하여 진군해 오는 반군을 막았으나 감히 막아낼 수 없었다.
여승진이 손문명을 막아내지 못하자 소연은 군복을 입고 전전(前殿)에 올라가 말했다. 「도적이 밤에 온 것은,그 무리의 수가 적어서이니,날이 밝으면 달아날 것이다。(賊夜來,是其衆少,曉則走矣。)」 마침내 오고(五鼓)를 치도록 명하니 영군장군(領軍將軍) 왕무(王茂)와 효기장군(驍騎將軍) 장혜소(張惠紹)가 군사를 이끌고 반군을 쳤고 반군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손문명을 포함한 반군을 모두 토벌하고 이들을 붙잡아 죽였다.
2.2. 정원충의 난(程元沖之亂)
<colcolor=#000> 정원충의 난 程元沖之亂 | ||
시기 | 502년 7월 21일 이전(前) | |
장소 |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 시상현(柴桑縣) | |
원인 | 진백지에 의해 파직된 정원충(程元沖)의 난 | |
교전 | 진백지(陳伯之) | 반군(反軍) |
지휘관 | 자사 진백지(陳伯之) | 수장 정원충(程元沖) |
장수 | 실전(失傳) | 실전(失傳) |
병력 | 실전(失傳) | 수백 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반군 전멸 |
결과 | 반군 진압과 수장 정원충 도주 | |
영향 | 자사(刺史) 진백지(陳伯之)의 난 발발 |
정원충은 이미 실직하여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진백지가 대비하지 않을 때를 틈타 합하여 수백 명을 인솔하여 진백지를 공격했다. 이에 진백지는 직접 무기를 들고 정원충과 맞섰고 끝내 정원충의 반군은 진백지에 의해 패퇴했다.
정원충은 여산(廬山)으로 들어갔는데 진백지는 아들 진호아(陳虎牙)에게 편지를 보내 회보하니 끝내 우이(盱眙)로 도망쳤다.
2.3. 예장전투(豫章之戰)
<colcolor=#000> 예장전투 豫章之戰 | ||
시기 | 502년 7월 혹은 8월(음력 502년 6월) | |
장소 | 강주(江州) 예장군(豫章郡) | |
원인 | 진백지의 난과 정백륜(鄭伯倫) 토벌 | |
교전 | 진백지(陳伯之) | 양(梁) |
지휘관 | 반군 진백지(陳伯之) | 태수 정백륜(鄭伯倫) |
장수 | 장군 진호아 보의장군 대영충 예주자사 주룡부 심양태수 저위 별가종사사 등선 | 강주자사 왕무 |
병력 | 실전(失傳) | 실전(失傳)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반란군 진백지의 패배와 몰락 | |
영향 | 수양성 공방전(壽陽城攻防戰) 발발 |
2.4. 수양성 공방전(壽陽城攻防戰)
[1] 정황상 소연이 즉위할 당시 내린 명이나 502년 5월 4일에 내린 명으로 추정이 되며 당시에 편장(鞭杖)을 맞을 죄를 범한 이들은 모두 속금(贖金)을 받고 풀려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속죄하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