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예장군(豫章郡) 사람 등선(鄧繕)과 함께 강주자사(江州刺史) 진백지(陳伯之)에게 은혜를 입었으며 후에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 임명되었다. 진백지가 조정에 불만을 품자 이것을 눈치챈 등선은 진백지에게 간언해 상서대(尙書臺)의 창고는 텅 비어있고 기구와 병장기가 없으며 삼창(三倉)에는 곡식이 없고 동쪽에서는 기근이 유행하니 이때를 놓치지 말고 조정에 반기를 들자 간언했다. 이에 진백지의 좌우에 있던 저위(褚緭)와 대영충은 함께 찬성하였다. 마침내 진백지가 반기를 드니 참모 저위는 다른 사람과 뜻을 함께하지 못하는 정원충(程元沖)을 파면시키고 대신에 왕관(王觀)[1]을 장사(長史)의 지위를 대신하게 하도록 간언했다.[2] 후에 보의장군(輔義將軍)으로 명해졌고 그 뒤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난이 평정되는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진백지와 함께 위로 도망친 것으로 보인다.
[1] 왕승건(王僧虔)의 손자로 본래 임천내사(臨川內史)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저위의 추천으로 파직된 정원충을 대신해 장사의 지위를 가졌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2] 정원충은 본래 장사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과 뜻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장사에서 파면되었다. 이에 진백지에게 앙심을 품은 정원충은 무리 수백을 거느리고 진백지가 방심한 틈을 타서 진백지를 공격했는데 오히려 패퇴하여 여산(廬山)으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