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2 20:34:26

약초사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제강점기 남산의 종교시설
파일:신토 백색.svg 신토 파일:종교표지_불교_흰색.png 불교
조선신궁 경성신사 경성호국신사 박문사 약초사


1. 개요2. 상세3.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약초사(若草寺)는 약초관음사(若草観音寺)라고도 하며,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한남정 산10번지(현 서울 용산구 한남동 726-157번지)에 있었던 절이다.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1858-1936)가 기증한 목조관음보살입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을 추진했지만 완공 여부는 알 수 없다. 전신은 경성부 약초정(현 중구 초동)에 있었던 약초관음당이었다.

2. 상세

파일:ycs02.jpg
사이토 마코토가 기증한 목조관음보살상[1]
사이토 마코토는 1931년 10월 경성에 있는 조동종 사원인 조계사에 목조관세음보살상을 기증했다. 관음상은 1932년 인천항으로 반입되어 경성부 약초정(若草町: 서울 충무로 일대)에 있었던 조동종 별원에 봉안되었고, 이후 건물 이름도 '약초관음당'이라 개칭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33년 약초관음봉찬회(若草観音奉賛会)가 발족되었다. 봉찬회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清徳), 중추원 자작 박영효 등을 고문으로 하고 조계사 주지 등 일본인과 윤치호, 윤갑병, 여운형 등 조선인 인사들이 참여했다. 봉찬회는 박문사를 세운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와 성격이 유사한 관변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마코토가 목조관음보살상과 함께 보낸 발원장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원래 조선의 불교와 같이 내지와 조선은 그 전통을 같이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서로 융합하지 못하고 있다. 또, 내지 불교자의 포교는 조선인에게 소외된 것인데, 이는 언어풍속이 상이함이 그 주원인이지만, 그렇더라도 양자는 신불 가호를 설법해 정신적 결합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저절로 융화의 결실을 볼 수 있다.

듣자하니, 조선인 불교 관음신앙은 내지인과 같다고 한다. 나 역시 평소에 영감이 넘치고 대관음의 위덕을 신앙하는 사람으로서, 조동종의 한 사찰에 선조의 혼령을 모시고 있다. 이에 관세음의 영상 일체(靈像一體)를[2] 조계사에 기증하고, 경성 약초정에 관음영지를 개설하여, 장래 일본인과 조선인이 공통된 신앙에 의한 정신적 융화를 기원하고, 내가 조선 총독으로 노력한 것을 기념으로 하여 관음의 영묘한 빛이 영원히 경성에 깃들기를 기원한다.

바라건대 이를 헤아려 오래도록 봉제(奉祭)를 삼가 행하여 주시기를.
마코토가 관음상을 보낸 목적은 조선과 일본에 공통적으로 퍼진 관음신앙을 통해 조선과 일본의 정신적 융합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봉찬회는 '관음보살 봉안전을 건립하여 사회교화 및 사회사업을 목표'로 한다는 취지로 약초정에 약초관음당을 세웠다. 사이토 마코토가 1936년 2.26 사건으로 살해당하자, 그의 머리카락이 약초관음당에 안치되었다. 1938년 2월 26일에는 서거 3주년을 맞아 약초관음당에서 추도회가 열렸다.
고 사이토 마코토 자작이 서거한지 어언 3개년, 지난 26일의 기일을 맞이하여 그의 유덕을 추억하는 추도회는 이날 오후 4시부터 약초정에 있는 약초관음당에서 미나미 총독을 위시하여 하야미(速水) 경성제국대학총장, 시노다(篠田) 이왕직장관, 민병석 자작 등 관민 약 150여 명이 참집한 중에 장중히 거행되었다.
故齋藤實子 追悼會盛大, 《매일신보》, 1938.2.27.#

1940년, 봉찬회는 약초관음당 부지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남산 동남편 기슭(현 남산예술원 웨딩홀 자리)에 '약초사'라는 절을 짓기로 했다. 총독부 문서에 의하면 약초사 부지는 1만 2천여 평(약 4만 ㎡)이었고, 소유자는 재단법인 약초관음회 이사장인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3]였다. 창립비용은 당시 돈 14만 원이 들었다. 본당은 관음상을 모시는 팔각형 건물이 될 예정이었다. 본당의 공사는 전쟁으로 인한 자재 통제 때문에 연기되었지만, 대서원(大書院) 건물은 같은 해 9월에 완공되어 관음상을 모셨다. 약초사 주지 다카시나 로센(高階瓏仙)이 작성한 문서에 따르면 절의 보물로는 예의 관음상 1좌, 창덕궁에서 하사한 대반야경 600권이 있었다.
파일:ycs01.jpg
약초사 본당 설계도(정면)

그러나 이후 약초사 본당은 영영 완공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며, 약초사 터는 원불교의 전신인 불법연구회 측에서 매입해 이름을 정각사(正覺寺)로 바꾸고 고아들을 돌보는 시설인 보화원을 운영했다.# 이곳에는 현재 남산예술원 웨딩홀이 있다.

3.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1940), 약초사창립허가원에관한건-경기(도면첨부),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04876
  • 조선총독부(1941), 사원토지건물및보물계(경성약초사),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JA0004903
  • 문혜진(2017), 일제식민지기 경성부 일본 불교계의 침투양상 - 조동종 박문사와 약초관음당을 중심으로 -, 서울과 역사 제96호


[1] 보살상을 마코토의 저택에 보관할 때 찍은 사진이다. 보살상의 높이는 6척(약 180cm)이었다고 한다. 오른쪽의 어린아이는 마코토의 손녀.[2] 여기서 영상(靈像)이란 일본어에서 부처나 신령을 묘사한 상(像)을 가리키고, 체(體)란 신상이나 불상 등을 세는 단위명사이다. 즉 '영상 일체'를 여기서는 '보살상 한 좌'라고 해석하면 된다.[3] 1873-1949. 관료 출신의 일본 사업가로 조선식산은행 회장까지 지냈다. 1934년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