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0 22:55:48

야스다 타다오

파일:헤이세이의차금왕.jpg
<[ruby(平成, ruby=へいせい)]の[ruby(借金王, ruby=しゃっきんおう)] / King Of Debt>
[ruby(安田, ruby=やす だ)] [ruby(忠夫, ruby=ただ お)] / Tadao Yasuda
파일:야스다타다오프로필.jpg
본명 야스다 타다오
[ruby(安田, ruby=やす だ)] [ruby(忠夫, ruby=ただ お)]
생년월일 1963년 10월 9일 ([age(1963-10-09)]세)
신장 195cm
체중 130kg
출생지
[[일본|]][[틀:국기|]][[틀:국기|]] 도쿄도 오오타구
가족 관계 AYAMI(1987년생)[1]
종합격투기 전적 6전 2승 4패
유형 브롤러 + 자이언트
시그니쳐 무브 츳파리([ruby(突, ruby=つ)]っ[ruby(張, ruby=ぱ)]り)[2]
보디 블로
부치카마시(ぶちかまし)[3]
빅 붓
릴리징 더블암 수플렉스[4]
원 핸드 초크[5]
피니쉬 무브 어깨굳히기([ruby(肩, ruby=かた)][ruby(固, ruby=がた)]め)[6]
타이거 드라이버[7]
별명 1인 인생극장 (ひとり[ruby(人生劇場, ruby=じんせいげきじょう)])
인생 경계선 파이터[8]
([ruby(人生, ruby=じんせい)][ruby(土俵際, ruby=ど ひょうぎわ)]ファイター)
차금왕 ([ruby(借金王, ruby=しゃっきんおう)])[9]
헤이세이의 차금왕 ([ruby(平成, ruby=へいせい)]の[ruby(借金王, ruby=しゃっきんおう)])[10]
테마곡 Chasing Crazy - 미야우라 키요시 (1994)[11]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
- 호테이 토모야스 (2002 - 2003)[12]
[ruby(燃, ruby=も)]えよ[ruby(荒鷲, ruby=あらわし)]オーケストラバージョン[13]
데뷔 (프로레슬링) 1994년 2월 24일 (30세)
도쿄도 치요다구 일본 무도관
신일본 THANKS WRESTLING DAY BRUSH UP
vs 하세 히로시

(종합격투기) 2001년 3월 25일 (37세)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 츄오구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PRIDE PRIDE 13: Collision Course
vs 사타케 마사아키
은퇴 (격투기) 2003년 12월 31일 (40세,커리어 2년)
효고현 코베시 효고구 코베 윙 스타디움
INOKI BOM-BA-YE 2003
바보가 되어라 꿈을 가져라[14]
vs 레네 루제

(프로레슬링) 2011년 2월 4일 (57세,커리어 26년)
도쿄도 분쿄구 코라쿠엔 홀
야스다 타다오 은퇴 흥행[15]
일본과 프로레슬링과 작별합니다.
vs 텐류 겐이치로[16]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커리어
2.1. 스모 선수2.2. 프로레슬러2.3. 종합격투기 선수2.4. 은퇴 이후
3. 종합격투기 전적4. 파이팅 스타일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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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 스모, 프로레슬링, 종합격투기 선수.

2. 커리어

2.1. 스모 선수

파일:타카노후지타다오.png
시코나 야스다 타다오 (1979.3 - 1980.1)
후지노모리([ruby(富士, ruby=ふじ)]の[ruby(森, ruby=もり)]) 타다오
(1980.3 - 1984.1)
타카노후지 타다오 ([ruby(孝乃, ruby=たか の)][ruby(富士, ruby=ふ じ)] [ruby(忠雄, ruby=ただ お)])
(1984.3 - 1992.5)[17]
신장 192cm
체중 136kg
소속베야 코코노에([ruby(九, ruby=ここの)][ruby(重, ruby=え)])베야[18]
통산성적 418승 459패 4휴장, 승률 47.7%
최고성적 (東) 코무스비 (1990년 7월, 26세)
데뷔 1979년 3월 (15세)
은퇴 1992년 5월 (28세, 커리어 13년)
최종계급 (東) 쥬료 10
vs (西) 마쿠시타 6
미츠에야마 토모유키([ruby(三恵山, ruby=みつ え やま)] [ruby(智之, ruby=ともゆき)])

중학교 3학년 때 야스다의 큰 몸을 보고 코코노에([ruby(九, ruby=ここの)][ruby(重, ruby=え)])베야에서 스모계로 입문하라는 러브콜을 보내자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요리를 익힐 수 있다는 말에 혹해 입문하게 되었고 1979년 3월 첫에 데뷔했다.

데뷔 1년 후 후지노모리([ruby(富士, ruby=ふじ)]の[ruby(森, ruby=もり)]) 타카오로 시코나를 변경했고, 마쿠시타에서 정체되어있던 데뷔 4년 후에 타카노후지 타다오 ([ruby(孝乃, ruby=たか の)][ruby(富士, ruby=ふ じ)] [ruby(忠雄, ruby=ただ お)])로 시코나를 변경했고, 변경 후 7바쇼만인 1985년 3월 쥬료로 승격했다.

이후 바로 미끄러졌지만 5바쇼 뒤인 1986년 1월 쥬료로 다시 올라온 후 포텐이 터져 9승 6패를 두번 찍고 쥬료를 2바쇼만에 초고속으로 뚫은 후 마에가시라에 안착했으며, 마에가시라에서 60대 요코즈나 후타하구로 코지에게 킨보시[19]를 두 번(86년 9월, 87년 9월) 찍는 등 착실하게 마에가시라 생활을 하다 1990년 5월 바쇼에서 11승 4패를 찍고 감투상까지 수상하며 마에가시라 9위에서 바로 스모 선수로서 스타 등극이라 할 수 있는 코무스비로 올라갔다.

코무스비에서 바로 2승 13패를 찍으면서 미끄러졌고, 마에가시라 내에서 순위를 조금씩 까먹다가 결국 1991년 11월 바쇼에 쥬료까지 미끄러졌다. 회복을 노렸으나 1992년 5월 바쇼 마지막날에 서 마쿠시타 6위[20] 미츠에야마에게까지 패배하며 4승 11패를 찍고 아예 마쿠시타까지 떨어지는 게 확실시되자 1992년 28세의 나이로 폐업을 선언하고 스모계에서 떠났다.

2.2. 프로레슬러

스모선수 은퇴후 1993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하며 프로레슬링계에 데뷔했다. 큰 덩치와 괜찮은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포스트 사카구치 세이지라고 불리우며 사카구치의 붉은 코스튬과 입장곡 '불타라 사나운 독수리'를 오케스트라버전으로 이어받는 등 큰 기대를 받았으나 적응 실패로 크게 인기를 끌진 못했다.

2001년에 격투가로 데뷔한 후 3전만에 도쿄 돔 메인이벤트로 하이퍼 배틀 사이보그 제롬 르 밴너에게 승리하는 대형사고를 쳤는데, 이 덕에 후지타 카즈유키의 부상으로 인한 반납으로 공석이 된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벨트를 두고 2002년 2월 1일부터 펼쳐진 챔피언 결정전에 출전하여, 2월 1일에 자이언트 실바에게 승리, 2월 16일 준결승전에서 쵸노 마사히로에게 승리, 결승전에서 나가타 유지에게 승리하며 IWGP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기도 하였다.[21]

이후 8월 8일에 턴힐하여 마계 클럽의 총수로 탄생, 이미지를 변신시키고 사카구치 세이지의 후광에서 벗어나는 등의 노력을 했으나 소행 불량이 문제가 되었고, 2004년에 정신수양이라는 미명하에 해외 수행을 떠났다가 정통파 프로레슬러로 재복귀할 예정이였으나...

복귀 직전이었던 2004년 9월 15일 신일본에서 무기한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고, 2005년 1월 18일에 신일본 사장 쿠사마 세이이치에게 해고 처분을 받았다. 이후 여러 단체를 떠돌았다.

2008년 이와테현 하치만타이시에 신일본 시절 동료 켄도 카신의 친형이 경영하는 양계, 양돈장 취업하여 일했으나 고쳐지지 않는 도박중독으로 인해 2010년 해고되었다.

프로레슬링계에 복귀했지만 얼마 안 있어 은퇴를 선언하여, 1년 뒤인 2011년 2월 4일 코라쿠엔 홀에서 야스다 타다오 은퇴 흥행 일본과 프로레슬링과 작별합니다. 가 열렸고, 1경기부터 기운좋게 출전하여 오프닝 매치에서 아케보노를 상대로 패배, 4경기 태그전에서 오오타니 신지로와 함께 타카야마 요시히로 & 스즈키 미노루를 상대했다가 곳치식 파일 드라이버를 맞으며 패배, 5경기에서 텐류 겐이치로와 라스트 은퇴전을 치러 4분 36초만에 텐류의 피겨 포 레그락에 딸 AYAMI가 타올을 던지며 패배하며 은퇴전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장성한 딸을 영광의 그날처럼 어깨에 무등태우고 링을 돈 야스다 타다오는 현역에서 은퇴했다.

2.3. 종합격투기 선수

파일:야스다타다오격투기프로필.png
이름 야스다 타다오
([ruby(安田, ruby=やす だ)] [ruby(忠夫, ruby=ただ お)])
종합격투기 전적 6전 2승 4패
1SUB, 1판정
3KO, 1SUB
체격 195cm / 130kg
별명 1인 인생극장 (ひとり[ruby(人生劇場, ruby=じんせいげきじょう)])
인생 경계선 파이터
([ruby(人生, ruby=じんせい)][ruby(土俵際, ruby=ど ひょうぎわ)]ファイター)

2001년 안토니오 이노키의 제안으로 종합격투기에 데뷔했다. PRIDE 13에서 가라테가 사타케 마사아키를 상대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뒀으나, 8월 19일 K-1 앤디 훅 추모 대회에서 레네 루제에게 단 9초만에 레네의 하이킥을 맞고 실신 KO를 내주며 기대치가 내려갔다.[22]

그러던 12월 31일 이노키가 주최한 흥행으로 이노키군 vs K-1 최강군 전면 대항전으로 치러진 INOKI BOM-BA-YE 2001에 이노키군으로 출전이 결정되었다.

출전 전 PV에서 이미 아내와 이혼하고 홀로 살고 있는 모습과 아내가 데려가서 이번 경기를 앞두고 재회한 딸 아야미에게 아빠다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당당히 티켓을 건네주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야미가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진 제 7시합 메인 이벤트에서 K-1 최강군의 '하이퍼 배틀 사이보그' 제롬 르 밴너를 상대했는데, 당당히 등장한 1라운드에 즉시 야스다는 제롬에게 테이크다운을 뺏어냈으나 제롬의 사이드 헤드락에 걸리며 즉시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어떻게 코너까지 빼서 존버를 시전한 결과 1라운드 시간을 전부 소비하는 데 성공했다.

2라운드가 시작하자마자 제롬에게 달려든 야스다는 로프로 제롬을 밀어붙였다 뒤로 돌리면서 제롬을 넘어트리며 상위 포지션을 잡는 데 성공했고, 제롬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해 봤으나 스모선수 출신으로 몸빵 하나는 자신 있었던 야스다였던지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다가 힘까지 빠지면서 품안의 야스다를 떨쳐내지 못 하게 되어버렸다. 계속해서 어깨굳히기로 제롬을 압박해 오던 야스다는 남은 시간 2분 콜을 듣고 필사적으로 마지막 힘을 짜내서 야스다에게 벗어나려 했지만 야스다에게 막히고 말았고, 거기다 야스다가 포어암으로 목까지 압박해오자 버티지 못한 제롬이 탭을 치며 하이퍼 배틀 사이보그 제롬 르 밴너가 프로 3전째의 야스다 타다오에게 무너지는 대역배가 터졌다.

타격이 뛰어난 제롬에게 타격을 최대한 허용하지 않은 채 그라운드에서 어떻게든 쇼부를 치는 야스다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었으며, 이 대역배 중의 대역배에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 모여있던 만원 관중이 미친듯한 환호를 보냈다.[23]

이노키와 포옹을 나눈 후 승리 후 딸 아야미에게 승리 트로피를 안긴 야스다는 가히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의 주인공 그 자체였으며, 이 승리로 1~4경기 전부 무승부, 5경기 이노키군 돈 프라이 vs K-1 시릴 아비디에서 돈 프라이 승, 6경기 이노키군 나가타 유지 vs K-1군 미르코 크로캅에서 미르코 승으로 이노키군 1 : K-1군 1 의 상황에서 야스다의 승리로 이노키군 2 : K-1군 1로 이노키군의 최종 승리까지 결정되어 관중의 흥분은 멈출 줄을 몰랐다. 딸 아야미를 목마태운 채로 링을 몇 바퀴나 돈 후에야 링에서 내려온 야스다는 당당하게 링을 떠났다.

하지만 야스다의 명운도 딱 거기까지였는지, 이후 2002년 8월 안토니오 이노키가 주최한 단발성 격투 이벤트 UFO-Legend에서 후지타 카즈유키를 상대했으나 1라운드 2분 46초만에 암 트라이앵글 초크에 걸려 패배, 12월 31일 똑같이 이노키군 vs K-1 최강군 타이틀을 단 INOKI BOM-BA-YE 2002에서 211cm의 남아공의 거인 얀 노르키아에게 TKO패했다.

거기다 2003년 12월 31일 INOKI BOM-BA-YE 2003에서 레네 루제와 복수전을 치렀으나 경기 시작 단 50초만에 레네의 마운팅 펀치 연타를 맞고 TKO패하면서 격투가로서 수준 이하라는 사실만 여실히 증명하였고, 이후 본인의 행실 문제가 겹쳐 더이상 출전 기회가 없어졌다.

2.4. 은퇴 이후

은퇴 후에는 카지노 기업에서 일하기도 했고 연예계에 뛰어들기도 했으나 여러가지 사유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2018년 유튜브도 했었으나 2021년 채널을 폐쇄했다.

이후 철도 안내원을 걸쳐 경비 회사의 계약 사원으로 있으며 안토니오 이노키의 추도식때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냈다.

3. 종합격투기 전적

4. 파이팅 스타일

5. 여담

  • 온화한 성격을 갖고 있었으나 무기력한 기질이 있었고, 무엇보다 스모 선수 시절부터 도박 중독이 매우 심해 스모 선수때는 야쿠자 비스무리한 양반들이 빚 갚으라고 찾아온 적도 있었고, 단체에서 해고되거나 가족들에게 절연당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야스다 타다오가 엔터테인먼트성이 짙은 단체였던 HUSTLE에서 활동했을 때 별명이 차금왕(샤킨오)였다.[24]
  • 정말 의외로 꼼꼼한 면도 있어서 시간 약속은 반드시 지켰으며, 여행의 준비는 출발 전날에 무조건 다 마쳐놓았다고 한다.
  • 텐류 겐이치로에 의하면 보트 레이스날에는 사람이 180도 바뀌어서 단정하게 양복을 입고 제 1레이스 시작 이전에 경기장에 자리잡고 있는다고 한다.
  • 마에가시라에서 킨보시를 두 번(86년 9월, 87년 9월) 찍은 적이 있는데, 상대는 모두 후타하구로 코지, 즉 키타오 코지였다. 심지어 86년 9월 바쇼와 87년 9월 바쇼는 각각 야스다가 4승 11패, 3승 12패로 개죽을 쑤고 있을 때였는데 두 번 다 그 몇 승 안되는 승에 요코즈나인 키타오 코지를 상대로 대역배를 터트린 것이었다.[25]
  • 도박 중독을 비롯한 행실 문제로 신일본 입문 이후 진작에 이혼했으나 딸 AYAMI와는 사이가 양호해서 이혼 후에도 만났으며 INOKI BOM-BA-YE 제롬 르 밴너 전에도 아버지의 경기를 지켜봤다. 은퇴 흥행에도 딸 AYAMI가 출연하여 자신의 데뷔 싱글을 부르고 아버지의 세컨드를 봤으며, 결혼 후 5명의 엄마가 된 후에도 손자들과 함께 아버지를 자주 방문하는 듯 하다.
  • 프로레슬러 시절 하시모토 신야의 심부름꾼이었는데, 야스다 쪽이 2세 연상이었음에도 하시모토의 마음에 들었는지 집안끼리 교류가 잦아져 집안끼리 친해졌다. 하시모토에게는 '야스티(ヤスティ)'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하시모토 사망 이후에도 교류가 이어져 2019년 야스다가 유튜브를 할 당시 하시모토의 장남 하시모토 다이치와 딸 AYAMI와 함께 스페셜 토크를 한 적도 있었다.
  • 2007년 10월 5일, 도쿄도내의 자택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쓰러져 있는 것을 레퍼리 타야마 마사오가 발견하여 병원에 실려갔는데, 연탄으로 자살하려고 했다는 의심을 받았으나 나중에 깨어난 야스다 왈 고기를 구우려 했는데 집에 가스가 끊겨서 연탄을 샀고, 연탄을 샀더니 이번엔 고기 살 돈이 없어서 그냥 연탄을 피우고 '에어 고기굽기'를 즐기다가 잠들었다라는 걸작같은 답변을 남겼다.
  • 이렇게 느긋하고 무기력한 성격의 소유자인 야스다임에도 야스다가 HUSTLE에 참전한 이후 HUSTLE의 개그 예능성에 따라가기 벅찼는지 텐류 겐이치로에게 "텐류 씨, 이 단체 터무니없는 곳이예요..."라고 충고했고, 이 말을 들은 텐류는 야스다 타다오가 이렇게 말하는거에 엄청 놀라서 한동안 HUSTLE이 멀쩡한 단체가 아닐거라는 의심을 크게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 일본의 전 레이싱 모델. 본명 한자는 [ruby(彩美, ruby=あや み)](위키에선 불명이라 되어있으나 INOKI BOM-BA-YE 제롬 르 밴너전 직전 영상에 한자 이름이 나온다.). 현역 시절 기준으로 163cm 43kg로 거한 중의 거한인 아버지와 달리 몸집은 작은 편이었다. 아버지 야스다 타다오가 어머니와 이혼한지 오래로 친권이 어머니에게 있었어서 '야스다'라는 성을 쓰지는 않으나 아버지와 관계는 매우 좋다. 2014년 결혼과 함께 은퇴했고, 슬하에 아이 다섯이 있다.[2] 스모의 손바닥 밀어붙이기. 체격이 체격인데다가 코무스비까지 갔던 야스다라 위력 하나는 더할 나위 없었다.[3] 스모의 들이받기. 역시나 야스다의 스모 리키시 경력의 상징으로 야스다가 일본인 중에선 워낙 거한이라 심플하지만 파괴적이었다.[4] 츳파리 연타로 상대를 코너로 몰아넣은 후 코너 보디 스플래시 → 더블암 수플렉스가 야스다의 국민콤보였다.[5] 제롬 르 밴너에게 항복을 얻어낸 그 기술. 프로레슬링에서 초크는 반칙이기 때문에 반칙 카운트 내에서만 사용했다.[6] 역시나 제롬 르 밴너를 몰아부친 그 기술. 원 핸드 초크는 반칙이기 때문에 대신 이걸로 경기를 끝내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7] 실력이 좋다고 말하기는 힘든 야스다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상대가 불완전한 자세에서 머리부터 떨어져서 고위력기였다. 야스티 드라이버라고도 불리는 경우도 있었다.[8] '도효기와(土俵際)'는 스모의 경기장인 '도효(土俵)'의 경계선을 의미하며 여기를 벗어나면 패배한다. 그래서 일본어로 삶 등의 경계선, 막판, 인생의 위기라는 의미로도 자주 쓰인다. 말의 어원이 된 스모 선수 출신이자, 빚으로 인생의 경계선에 선 야스다에게 딱 알맞는 별명이었다.[9] '차금(借金)'은 돈을 빌린다는 뜻이므로 돈빌리기 왕, 즉 채무왕이라는 뜻이다(...) 개그성이 강한 단체였던 HUSTLE에서는 대놓고 공식 별명으로 썼다.[10] 은퇴 즈음해서는 사생활이 개판인 경우가 많았던 쇼와 시대의 선수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던 채무왕들(아슈라 하라, 토요노보리 등)과 구별하기 위해서인지 '헤이세이의 차금왕'으로 불리었다.[11] 宮浦 清. 루팡 3세 풍마일족의 음모의 OST 중 하나로, 처음 프로레슬링 데뷔 당시 사용했다.[12] 킬 빌의 OST로 유명한 곡. 마계 클럽에 들어가서 턴힐하고 사카구치 세이지의 후계자에서 탈피했을 때 쓰던 곡. 재미있게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아버지 사카구치 세이지 때문에 괴로워했던 사카구치 세이지의 장남 사카구치 유키오의 테마곡도 이거였다.[13] 불타라 사나운 독수리 오케스트라 버전. 야스다를 밀어주던 안토니오 이노키의 오른팔이자 신일본의 영원한 넘버 2 사카구치 세이지의 신일본 시절 테마곡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어레인지한 곡이었다.[14] 원문은 馬鹿になれ夢を持て.[15] 원문은 安田忠夫引退興行~日本とプロレスにおさらばします。~[16] 1경기 오프닝 매치에서 아케보노를 상대로 패배, 4경기 태그전에서 오오타니 신지로와 함께 타카야마 요시히로 & 스즈키 미노루를 상대해 곳치식 파일 드라이버를 맞으며 패배, 5경기에서 텐류 겐이치로와 라스트 은퇴전을 치러 4분 36초만에 텐류의 피겨 포 레그락에 딸 AYAMI가 타올을 던지며 패배하며 은퇴전을 마무리지었다.[17] 시코나에 효(孝)자가 들어가있는데, 성명학자가 "당신은 전혀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고 있군요"라고 한 지적을 듣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효(孝)자를 집어넣으면서 시코나를 변경했다고.[18] 1967년 데와노우미베야(사이토 브라더스의 현역 시절 베야)에서 토시요리명 코코노에를 습명한 치요노야마(千代の山)가 노리고 있던 데와노우미베야 상속에 실패하자 1967년 1월 독립해서 세운 베야. 이 때문에 데와노우미 일문에서 파문당했으나 타카사고 일문에서 받아주어 베야 창설에 성공했다.[19] 마에가시라 이하 리키시가 요코즈나에게 승리하는 것. 즉 역배가 제대로 터진 것이라 보면 된다.[20] 계급으로 쥬료와 마쿠시타는 하나 아래지만 메이저리거와 트리플A 마이너리거급의 차이가 있다.[21] 당시 신일본은 이노키즘으로 인한 폐해가 막대했는데, PRIDE에서 승리한 선수들에게 단체 최고 위상 벨트인 IWGP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야스다 타다오도 그런 수혜를 입은 사람들 중 하나였던 것. 물론 애시당초 프로레슬러로서 실력은 농담으로라도 좋은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48일만인 4월 5일 나가타 유지에게 금세 뺏겼다.[22] 야스다가 깨어난 후 의사가 상태를 확인하려고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라고 물어봤더니 "료고쿠 국기관이요"라고 대답했다고... 스모 메인 경기장이 료고쿠 국기관인 것을 생각하면 스모 시절로 착각한 듯 하다.[23] 이전 경기인 이노키군 나가타 유지 vs K-1군 미르코 크로캅의 경기에서 나가타가 단 21초만에 작살나면서 분위기가 다운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 역배를 지켜본 일본 관중들의 환호가 컸다.[24] 샤킨오는 돈빌리기 왕, 즉 채무왕이라는 뜻이다.[25] 86년 9월 바쇼는 경추 염좌로 키타오가 3승 4패 이후 8휴장을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 상태였으나 87년 9월 바쇼는 야스다전을 포함해 9승 6패로 나름 제 역할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