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앨버트 아일러 Albert Ayl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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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6년 7월 13일 |
사망 | 1970년 11월 25일 (향년 34세)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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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음악가 |
활동 | 1952년 ~ 1970년 |
장르 | 프리 재즈 |
1. 개요
미국의 재즈 뮤지션.Spiritual Unity하고 Bells하고 Albert Ayler in Greenwich Village가 가장 유명한 음반.
2. 상세
1936년 7월 13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난 앨버트 아일러는 어린 시절부터 ‘무엇이든 불어댈 수 있는 것’을 악기로 삼으며 색소폰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을 드러냈다. 10세에 지역 음악 아카데미에서 정식 교육을 시작했고, 고등학교에선 오보에와 색소폰을 오가며 항상 1석을 맡았다. 군 복무 중에는 프랑스 주둔 미군 밴드에서 연주하며 마칭 밴드 음악과 유럽 군악에 심취했고, 이 시기에 알토 색소폰에서 테너 색소폰으로 전환했다.복무 후 그는 유럽에 남아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활동했고, 스톡홀름에서는 피아니스트 세실 테일러와의 만남을 계기로 프리 재즈 씬에 본격 진입하게 된다. 이후 베이시스트 게리 피콕, 드러머 서니 머레이와 함께 결성한 트리오로 ESP-Disk에서 데뷔 음반을 발표했으며, 이후 돈 체리, 도널드 아일러 등과의 협업으로 급진적이고 스피리추얼한 음악 세계를 열어갔다.
아일러의 음악은 그 자신이 말했듯, “이 세계 너머의 음악”을 향한 시도였다. 그는 기존의 정돈된 비트나 코드 진행 같은 재즈의 기성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뉴올리언스식 장례 행진의 구조적 극성과 집단적 슬픔, 가스펠에서 비롯된 어떠한 영적 외침과 반복적 찬송 구조, 그리고 군악대의 버글 콜[1]처럼 단순하고도 신호적인 멜로디를 결합했다. 이 세 가지 전통은 아일러에게 있어 단순한 음악적 재료가 아니라, 신성과 저항, 공동체적 의례의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언어였다. [2]
그의 연주는 단지 “아름답다”거나 “기교가 뛰어나다”는 식의 감상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듣는 이로 하여금 어떤 본질적인 고통과 희망을 동시에 꿰뚫게 하는 정서적 충격에 가까웠다. 아일러가 말한 ‘침묵의 비명(silent scream)’은 목소리도, 언어도 없이 색소폰을 통해 영혼 깊숙한 곳의 절규가 터져 나오는 순간을 뜻한다. 이 비명은 ‘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동’에 가까웠으며, 그는 연주자를 하나의 통로로 만들었다.
그는 플라스틱 리드(Fibrecane No. 4)를 사용해 극도의 밀도와 강렬한 음색을 구현했고, 전통적인 색소폰 주법에서 벗어나 입술과 성대의 떨림으로 고유한 배음(오버톤)을 형성했다. 아일러에게 “샤우트(shout)”는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음악적 진실 그 자체였다. 그것은 연주의 격정을 넘어, 존재의 깊이를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특히 1964년 발표된 「Spiritual Unity」는 아일러의 음악적 선언문이자, 프리 재즈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는 이 앨범을 통해 “집단적 영적 환희”[3]라는 이상을 즉흥 연주의 방식으로 실천했고, 이는 이후 「Love Cry」, 「New Grass」, 「Music is the Healing Force of the Universe」 등으로 이어지며, 종교적 상징성과 개인적 고통이 뒤섞인 그만의 ‘신성한 혼돈’을 전개하는 중심축이 되었다.
하지만 음악 외적으로 그는 점차 깊은 내면의 혼란에 시달리게 된다. 동생 도널드 아일러와의 결별, 음악계와의 갈등, 평단과 대중의 오해, 소속 레이블의 상업성으로 인한 이미지 왜곡[4] 등이 겹치며 정신적 고통은 더욱 심화되었다.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생전부터 종종 죽음을 암시하는 언행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1970년 11월 25일, 뉴욕 브루클린의 이스트 강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향년 34세. 사인은 익사로 발표되었으며 외상의 흔적은 없었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과 소문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1] (Bugle Call) 군대에서 기상, 집합, 취침, 식사 등을 알릴 때 부는 단순한 멜로디의 나팔 소리다[2] 예컨대 그의 곡 「Ghosts」는 행진곡 같은 전개로 시작해, 반복되는 멜로디가 점점 열광적인 외침으로 변모한다. 이는 장례 행진이 축제로 전환되는 뉴올리언스 전통을 연상시킨다.[3] 여기서 말하는 “집단적 영적 환희(collective spiritual ecstasy)”란, 공연자와 청중이 즉흥 연주를 통해 감정, 에너지, 정신을 공유하며 함께 일종의 초월적 상태에 이르는 경험을 뜻한다. 아일러에게 연주는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일종의 ‘의례’에 가까운 행위였다.[4] 아일러가 말년에 활동한 레이블인 Impulse!와 ESP-Disk는 그의 음악적 급진성을 순수하게 보존하기보다는, ‘흑인 색소폰 주술사’ 같은 이미지로 상업적 브랜딩을 시도했다. 특히 「New Grass」(1968)나 「Music is the Healing Force of the Universe」(1969)와 같은 앨범은 보컬, 록, 블루스 등 다양한 요소를 도입하면서 일부 평단으로부터 “순수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는 아일러 자신의 고립감과 좌절을 더욱 심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