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7 19:19:11

안홍근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안홍근(安弘根)
본관 순흥 안씨[1]
출생 1881년 1월 1일
황해도 해주목 영동방 청풍리
(현 황해남도 해주시 광석동)
사망 1928년 5월 7일[2]
묘소 황해도 옹진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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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안명근은 그의 형이며, 안중근은 4촌 형이다.

2. 생애

1881년 1월 1일 황해도 해주목 영동방 청풍리(현 황해남도 해주시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현(安泰鉉)과 어머니 진주 김씨(晉州 金氏) 김면주(金冕周)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안태현은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1862 ~ 1905)의 둘째 형이다.

그는 일찍이 연해주로 이주했으며, 1913년 권업회에서 전개한 '고(故) 이준공 전기간행 및 유족 규휼 의연금 모집'에 당시 돈으로 30전을 기부하는 등 러시아 연해주 한인 사회의 상호 부조를 위해 힘썼다. 1918년 러시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이동휘, 유동열, 양기탁 등과 함께 조선망명자정치회의에 참가했다. 공산주의 노선을 따라 볼셰비키와 합작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이동휘의 노선을 지지한 안홍근은 1918년 4월 28일 이동휘, 김립, 오와실리, 오성묵, 심백원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 창당 발기회를 개최했다.

1918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육전대를 상륙시키자, 크라스노쉐코프와 한인사회당 간에 일본의 시베리아 진출에 대한 공동 대책이 논의되었고 그해 7월 한인적위대가 결성되었다. 원동인민위원회의 승인과 지원 하에 하바롭스크, 이만, 러시아와 중국 국경 지대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바라바쉬, 연추(煙秋) 등에서 이동휘, 유동열, 김립, 이한영 등이 대원을 모집했고, 100여 명이 한인적위대원으로 입대했다. 한인적위대에 안홍근을 비롯하여 이인섭, 최방덕, 박안드레이, 최인욱, 박영식, 박기수 등이 참가했다.

1918년 말 일본군이 하바롭스크로 진입하려 하자, 한인사회당은 흑룡강을 따라 후퇴하기로 결정하고, 안홍근은 유동열, 전일의 지휘하에 하바롭스크 방어전에 참가했고, 이후 후퇴하면서 부라뵤바-아무르스까야 역 전투와 이만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 그러나 러시아 기선 바론코르프호를 타고 아무르강을 따라 블라고베셴스크 방향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백군에 체포되어 하바롭스크로 압송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은 중국인 노동자일 뿐 한인적위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고, 백군은 딱히 혐의를 찾아내지 못해 석방시켰다.

그의 행적은 1922년 1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수청촌(水淸村)에서 독립군 자금을 모금한 것에서 마지막으로 확인되었고,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1928년 5월 7일 별세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한편, 순흥안씨참판공파세보 하권 183쪽에는 1950년 6.25 전쟁 때 반공 청년 8명을 숨겨 보호해주다가 조선인민군에 발각되어 8명의 청년들과 함께 피살되었고, 그의 유해는 황해도 옹진군에 안장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안홍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참판공파-서령공파 30세 근(根) 항렬.[2] 순흥안씨참판공파세보 하권 183쪽에는 1950년 6.25 전쟁조선인민군에 피살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