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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싯 웨차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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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직위: 태국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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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제27대 총리
아피싯 웨차치와
อภิสิทธิ์ เวชชาชีวะ
파일:Abhisit_Vejjajiva_2009_official.jpg
출생 1964년 8월 3일 ([age(1964-08-03)]세)
영국 잉글랜드 타인 위어 뉴캐슬어폰타인
재임기간 제27대 총리
2008년 12월 17일 ~2011년 8월 5일
학력 이튼 칼리지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 존스 컬리지
부모 앗타싯 웨차치와, 솟사이 웨차치와
배우자 핌펜 웨차치와[1]
자녀 쁘랑 웨차치와, 빤나싯 웨차치와
종교 불교
신체 182cm
소속 정당 민주당
약력 태국 하원의원
민주당 대변인
태국 정부 대변인
태국총리실 정치부차관
태국 가정교육부위원장
태국 총리실 장관
민주당 대표(2005년 - 2019년)
제23대 태국 총리(2008년 12월 17일 - 2011년 8월 5일)

1. 개요2. 생애3. 정치 활동4. 총리5. 이후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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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피싯 웨차치와는 태국의 정치인이다. 태국의 제36대 총리로 재임하였고, 전 민주당 대표를 지냈다.

2. 생애

영국뉴캐슬어폰타인에서 태어났다. 태국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으레 그렇듯이 아피싯 또한 중국계 집안 출신인데, 조상의 성씨가 원(袁) 씨라고 한다. 정확히는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건나갔다가 태국에 정착한 것. 부친은 교육인으로 마히돈 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적이 있고, 왕실교육원에서도 일한 적이 있었다. 사촌 중 하나는 정치인인데, 놀랍게도 탁신 친나왓 밑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타이애국당 당원이었다고. 현재 아피싯이 민주당의 거물이라는 점을 보면 흠좀무.

어렸을 때부터 영국에서 자라왔으며, 대학도 영국에서 졸업했다. 부모는 둘 다 태국인이었지만, 당시 영국 국적법 때문에 아피싯은 현재 태국과 영국 복수국적을 갖고 있다.[2]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훗날 숱하게 트집도 잡혔다.

3. 정치 활동

1992년 민주당에 입당했으며, 방콕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역대 최연소인 27세의 나이로 당선되었다. 1995년과 1996년에도 재선했으며, 2001년에는 비례대표로 옮겨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 시절 총리를 지내던 추안 릭파이 당대표가 아비싯을 눈 여겨보게 되었고, 이후 당 대변인, 정부 대변인, 총리실 정치부차관, 가정교육부위원장, 총리실 장관을 지내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특히 총리실 장관 시절이던 1999년 국민교육법 개정을 주도하는 등 정계에서 대대적으로 활약했다.

이리하여 40도 안 된 나이에 단숨히 추안의 후계자로 급부상했고, 2003년 전당대회에 도전하게 되지만 방얏 반타탄 전 부총리에 밀려 낙선했다. 하지만 방얏이 지위하던 2005년 총선에서 역대급 참패를 당했고, 이 여파로 방얏은 대표직을 사퇴하게 된다. 도전하는 선거마냥 떨어지기만 했던 민주당으로서는 제대로 당의 승리를 이끌 만한 새로운 지도자를 필요로 했는데, 마침 방얏에 밀려 낙선한 적이 있던 아비싯은 이를 계기로 다시 주목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피싯은 2005년 전당대회에 도전, 민주당의 새 대표가 되었다. 당시 41세로 젊고 신선한 이미지가 강했으며, 당을 구세주로 이끌 적임자로 평가 받았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그 자체였는데, 대표가 된 지 1년도 안 되 탁신 총리가 선포한 조기 총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피싯과 탁신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므로 스펙 자체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탁신의 인기가 워낙 높았던 탓에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선거 과정에서 숱한 문제가 발생하자 아예 대놓고 보이콧을 선언한다. 결국 애국당이 500석 중 무려 460석을 가져가게 되었는데, 나머지 40석이 공석인 관계로 사실상 500석 전체를 싹쓸이한 꼴이었다. 얼마 못 가 군부 쿠데타로 탁신이 축출되면서 진짜 정면으로 맞붙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아피싯 본인으로서도 크게 후회하지는 않았다고.

선거 직후 쿠데타가 발생했고, 아피싯은 쿠데타 반대를 선언했다. 하지만, 군부가 내놓은 신헌법 초안에 대해서도 "개선이 필요하지만, 지지하겠다"고 표명해 적지 않은 쓴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물론 아비싯이 대놓고 군부를 지지하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당시에 보여준 태도는 반대 세력, 특히 탁신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민주당이 아주 기득권이 되었다"고 비난을 받게 되었다. 뭐 탁신의 등장으로 민주당이 친군부, 친기득권화 된 것이 틀린 말은 아니라지만...

이후 우여곡절 끝에 2007년 총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애국당이 헌법재판소의 해산 크리를 맞게 되면서 살아남은 잔당들이 자매 정당인 인민역량당에 입당해 재기를 모색했는데, 마침 이들은 탁신이 없던 탓인지 쉽게 도전할 만한 선거가 아니었다. 바꿔 말하자면 아피싯에게는 나름 해 볼만 한 선거였지만... 480석 중 165석 만을 건져 패했다. 인민역량당은 탁신이 없어서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탁신을 향한 향수 덕에 비록 과반은 실패했지만 이에 근접한 233석을 단숨에 가져가 버린 반면, 민주당인 반사이익을 누리지도 못했다. 당연히 국회 총리 선출 선거에서도 인민역량당의 사막 순타라웻에 밀려 낙선했고, 첫 판에 이렇게 씁쓸한 패배를 당한 것은 아피싯 본인에게도 흑역사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사막이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총리직에서 축출되었고, 이를 통해 총리로 오르려는 시도를 했지만, 이번에도 탁신의 처남인 솜차이 웡사왓에 밀려 낙마했다. 이로서 아피싯의 총리직은 물 건너간 듯 싶었지만... 은근슬쩍 애국당 계승을 시도하던 인민역량당도 헌법재판소에 의해 발각되면서 졸지에 해산 크리를 맞이하게 되었고, 일부 탈당파들이 태국인당을 창당하기는 했지만, 또다른 일부 인사들은 헌재 판결이 두려웠는지(?), 차악인 민주당으로 입당하게 된다. 그렇게 인민역량당이 사라진 상태에서 민주당은 세력 확장에 성공하고, 타이 자랑당, 국가공헌당, 태국 국민발전당, 국가발전당과의 연정으로 민의에 손을 벌리지 않고도 정권을 잡게 되었다.

4. 총리

2008년 12월 17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최종 지지를 받아 총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총리직은 오르는 길만큼이나 순탄치 않았다. 당장의 정치적 혼란으로부터 태국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그가 지지했다가 물의를 빚었던 군부의 신헌법을 개정할 것을 미리 천명하기도 했지만, 기득권의 눈치를 보면서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뭐 태국의 민주주의가 뒤떨어진 만큼 여기까지는 이해가 갈 만도 했지만, 진짜 문제는 경제. 실업율이 무려 63%에 달했으며, 2010년에는 국채가 GDP의 4.8%에 달하다시피 했다. 참고로 국채가 매우 높았다던 추안 시절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것도 정치적 혼란이 원인이었다지만...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오른 신선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민의로 오른 것이 아닌 탓에 정통성이 취약했다.[3] 이미 다음 총선에서의 패배는 예견되어 있었는데, 때마침 아비싯은 기득권과 국민 양측의 눈치를 보게 되었고, 여기서 어느 쪽을 편들어야 할 지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아비싯은 기득권과 군부의 눈치를 보면서, 전기·가스요금을 포함한 각종 세금에 대한 지원금 정책을 추진하고, 대중교통 무료화를 추진했다. 빼도 박도 못 하는 포퓰리즘 정책이었다지만, 당장 탁신계 포퓰리스트들이 재기를 노리는 상황에서는 이러지 않으면 정권 유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어설픈 탁신 흉내내기는 국민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역으로 군부 쿠데타 미수 사건에 시위까지 잇따르면서 그의 커리어는 급추락하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기존 민주당의 본질을 흐렸다는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는데, 특히 정치범 탄압 등은 인권 단체들의 규탄을 받았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아피싯 시대의 민주당은 과거와는 달리 커다란 변화를 겪었는데, 과거에는 군사 독재에 저항하던 민주화 투사였지만, 탁신의 등장 이후로는 군부·기득권과 결탁하면서 도로 수구세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당장 아피싯의 스승과도 같았던 추안 때까지만 해도 민주당이야 재야 세력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으며 민주주의를 이행하는 편이었지만, 아피싯이 집권했을 때에는 이미 수구 정당으로 변질된 뒤 민주주의의 본질이 흐려진 뒤였다. 한 영국의 교육인은 이러한 아비싯과 민주당의 행태를 두고 "위선적"이라고 비판했을 정도.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사이,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구 애국당의 후신인 태국인당의 대표로 오르면서 탁신계는 재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1년 총선에서 500석 중 159석만을 획득해, 무려 265석으로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한 태국인당에 밀려 대패했다. 한때 "젊은 지도자"로서 추앙 받던 아피싯은, 이렇게 쓸쓸히 몰락했다.

5. 이후의 행보

총선에서 참패하면 대게 대표들이 사임하는 게 기본으로 여기지지만, 아피싯은 사임하지 않고 끝까지 대표로 남아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타락한 민주당은 더 이상 새로운 인물도 없었고, 다른 사람을 찾자니 그 놈이 그 놈이라, 아피싯은 대표직을 자연스레 유지하게 되었다.

때마침 잉락의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2015년 총선은 해 볼만 하다는 평을 받았고, 아피싯도 이를 노렸지만, 잉럭이 1년 앞당겨 조기 총선을 선포했다. 문제는 여기서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자 이에 보이콧을 선언했고, 결국 총선은 파행으로 이어지다가 군부 쿠데타로 잉락마저 실각한다. 어쩌면은, 아피싯이 처음 전면으로 나서던 상황이 반복되었던 것.

2019년 총선 역시 참패하여 결과야 뻔할 뻔자인지라 총리에 복귀할 가능성은 없으나, 쁘라윳 짠오차가 이끄는 공민역량당이 향후 연정의 대상으로 노리고 있어, 정치적인 재기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 민주당의 자립이 아닌, 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꼴이라 더한 비판을 받게 되겠지만...

당초 예상보다 처참한 결과가 나오자, 이에 대한 책임으로 당대표직을 사임했다.


[1] 쭐랄롱꼴대학교 교수이다[2] 1994년 개정된 국적법에 따라 부모 중 한 쪽이 영국 국적자여야만 자녀가 영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3] 물론 이건 민주당 소속 총리들이 다들 그랬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