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요시다 킨우(吉田均雨) |
| 본관 | 고령 신씨[1] |
| 출생 | 1925년 9월 29일[2] |
|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 |
| 사망 |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신균우는 1925년 9월 29일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에서 아버지 신승휴(申升休, 1897. 12. 4 ~ ?. 1. 23)와 어머니 김녕 김씨 김신방(金新方, 67세 때 별세)[3]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4] 아버지 신승휴는 포두공립보통학교 훈도를 역임했다.그는 이후 전라남도 광주부 남정(현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에 있는 남기인(南基仁)의 집에 살면서 광주서중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1941년 3월 기태룡·기환도·윤봉현(尹奉鉉)·박화진(朴和珍)[5] 등과 함께 선배들이 졸업한 후 침체되었던 무등회(無等會)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일본어 상용 반대 활동을 강화하였다.
그러던 중 1943년 5월에 무등회를 중심한 광주서중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자, 그는 여기에 참가해 시위를 주동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44년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 상해 혐의로 징역 단기 2년, 장기 4년을 선고받은 뒤 대구청소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같은 해 12월 11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위 혐의에 대해 형집행정지를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8.15 광복 후 상경한 그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해 한동안 다녔으나, 국대안 반대운동[6]에 가담했다가 제적당했고, 2년 후인 1948년경에 친구 배종국(裵鐘國)[7]이 재학 중인 동국대학교에 편입했다.
그러나 동국대학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의 혼란 와중에 실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신균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