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23:12:11

송준필(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송준필
宋浚弼[1]弼로 기재되어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순좌(舜佐) / 공산(恭山)
본관 야성 송씨[2]
출생 1869년 10월 18일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고산리
(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서마을)[3]
사망 1943년 8월 28일
경상북도 김천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259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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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준필은 1869년 10월 18일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고산리(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서마을)에서 아버지 송기선(宋祺善)과 어머니 영천 최씨(永川 崔氏) 최도중(崔道重)[4]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둘째 작은아버지[5] 송대선(宋大善)에 입양되었다.

이후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6]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강론에도 자주 참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뒤 1912년 4월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1917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귀국하였다. 그해 6월 16일 결국 부친이 별세하자, 두문불출하였다.

그는 1919년 경성부에서 있었던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정작 유림이 빠져 있으면서, 일제가 고종황제에게 결재하도록 강요한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에는 유림대표 김윤식의 서명이 들어있음을 알고는 이를 통분해하면서 조선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3월경 이기정(李基定)·송규선 등과 함께 곽종석의 권유에 찬동한 장석영으로부터 경성부 유생들의 상황을 전해 듣고, 장석영이 독립청원서에 서명을 해줄 것을 권유하자 송준필 또한 이에 찬동하였으며, 이에 파리장서라고 하는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 한국 유림대표 137명 중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그 후 이 파리장서는 김창숙이 상하이로 전달하였고, 다시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보내졌으며, 국내의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리고 이기정·이기원(李基元)으로부터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다른 지방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전해 들은 그는 충숙공 종손 송회근 등 초전면 고산리 야성 송씨 문중의 유력자들을 불러놓고 이 지방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기정·송회근·성대식(成大湜)·송수근·송문근·이봉희(李鳳熙)·송인집·송천흠 등이 찬동하여, 성주면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유진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들에 의한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있음을 안 그는 이들과 협의하여 함께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마쳤다.

4월 2일 오후 1시, 점차 시위군중이 시장으로 몰려들고 있을 때, 먼저 성주면 경산동 관제묘(關帝廟)[7] 뒷산에 집결하였던 기독교도들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그도 시장에 모인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겁을 먹은 일본 경찰주재소에서 발포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이에 굴하지 않고 밤 11시까지 계속해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어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입소하였으나, 곧 공소를 제기하였으며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무죄를 선고받아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 성주 고양서당(高陽書堂)과 김천 원계서원(遠溪書院)에서 후학들과 함께 강론을 하였으며, 김천시 부곡동 원골 소재 고성산에 은거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1943년 8월 28일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별세하여 고향인 성주에 안장되었다.

사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5월 13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했다.

[1] 1919년 5월 20일 집행원부에는[2] 충숙공파(고산리)-송간공파 32세 준(浚) 항렬.[3] 야성 송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송규선·송문근·송수근·송우선·송인집·송천흠·송회근·송훈익도 이 마을 출신이다.[4] 1759년(영조 35) 식년시 진사시에 3등 19위로 입격하였다.[5] 생부 송기선(宋祺善)과 양부 송대선(宋大善)은 본래 모두 송남익(宋南翼)의 아들이었는데, 일찍이 생부 송기선이 송남익의 맏형인 송홍익(宋鴻翼)에 입양되었으므로 송대선은 족보상으로 송준필의 5촌 당숙(堂叔)이 된다.[6] 독립유공자로, 김용환의 조부이다.[7] 현 관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