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2-11 00:27:55

송문근

파일:송문근.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회부(會夫)
본관 야성 송씨[1]
출생 1895년 9월 19일
대구부 성주군 유곡면 고산리
(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서마을)[2]
사망 1963년 11월 25일
경상북도 김천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20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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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문근은 1895년 9월 19일 대구부 성주군 유곡면 고산리(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서마을)에서 아버지 송준복(宋浚福)과 어머니 김해 허씨 허발(許亻+發)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송준필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19년 경성부에서의 3.1 운동에 이어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전국적으로 펴져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성주군의 유림들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미 3월 28일 성주면 장날에 선남면에 사는 이현호(李玄琥) 등이 독립만세를 부른 일이 있으나 큰 운동으로 확대되지는 못하였고, 4월 2일 유림측과 기독교측이 연합전선을 펴 봉기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인 만세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때 월항면의 유생 이기정(李基定)은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 봉기상황을 알게 되어, 동지 송인집과 더불어 성주군내 양반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들은 그후 야성 송씨 문중에서 유력한 수 명을 불러 협의한 후 성주면 장날에 거사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고, 또한 송준필이 작성한 격문을 인쇄하여 이수택송인집 등으로 하여금 배포케하는 한편, 성주군내 유림에 연락을 취하고 규합체를 형성하여 의거준비를 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2일 성주면 장날에 모여든 700~800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으나 일본 경찰의 발포로 계속적인 만세시위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는 산 위로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계속 시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고 곧 공소를 제기했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미결 기간 합산 총 11개월 18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63년 11월 25일 경상북도 김천군(현 김천시)에서 별세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4년 11월 18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하였다.

[1] 충숙공파(고산리)-송간공파 33세 근(根) 항렬.[2] 야성 송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송규선·송수근·송우선·송인집·송준필·송천흠·송회근·송훈익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