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시대 오스만 세밀화에서의 묘사 | 1584년 프랑스 성직자 앙드레 테베의 묘사 |
1. 개요
Şehzade Mustafa1515년~1553년 (향년 38세)
오스만 제국의 황자로 쉴레이만 1세와 후궁 마히데브란의 장남. 콘야와 마니사 지방태수를 지냈고, 민중과 군부 (특히 예니체리)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황후 휘렘 술탄과 재상 뤼스템 파샤는 휘렘 소생의 셰자데 셀림 (셀림 2세)을 지지했고, 그들의 모략으로 유능한 무스타파가 제위를 찬탈할 것이라 믿게 된 쉴레이만 1세는 결국 원정에 나서던 길에 그를 처형했다.
2. 생애
1516년 무렵 아직 황자 신분으로 마니사 산작베이를 맡고 있던 쉴레이만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520년 조부 셀림 1세의 사후 부친이 황위에 오르자 함께 코스탄티니예로 이주했다. 본래 장남은 아니었지만 1521년 형들인 마흐무트와 무라트가 연이어 사망하자 사실상의 장남이 되었다. 같은해 휘렘 술탄이 쉴레이만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며 모친 마히데브란은 무스타파의 황위 계승에 총력을 다하게 되었다. 1530년 6월, 무스타파는 이복 동생들인 메흐메트 및 셀림과 함께 할례를 받았고 3주 간의 축하연이 열려 코스탄티니예 전체가 죽제 분위기로 들썩였다. 한편 무스타파는 종교, 문학, 무예, 기마 등을 배웠고 무흘리시의 필명으로 부친처럼 시를 썼다.2.1. 촉망받는 황자
무스타파는 성품이 용감했으며 정의를 중시했다. 그의 전형적인 오스만 전사 (가지)의 모습은 예니체리 군부의 큰 지지를 받았다. 쉴레이만 역시 무스타파를 매우 아꼈고, 1533년 자신이 황자 시절 태수를 지냈던 마니사를 영지로 주어 산작베이에 봉했다. 쉴레이만은 대외 원정에 나설 때마다 무스타파를 사실상의 섭정에 봉하며 대리청정을 시켰다. 무스타파는 또한 어린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대재상 이브라힘 파샤와도 자주 서신 왕래를 할 정도로 매우 가까웠고, 제국의 신민 누구다 그가 다음 황제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이를 두려워했던 휴렘 술탄의 공작으로 1536년 이브라힘 파샤가 처형되고, 쉴레이만의 총애가 메흐메트 황자로 옮겨가며 위기가 찾아왔다.1541년에는 수도에서 더 멀리 떨어진 아마시아에 봉해졌다. 비록 더 많은 봉급이 주어지긴 했지만 무스타파는 이듬해 메흐메트가 마니사에 봉해지고, 1543년 메흐메트가 요절한 후에는 셀림이 봉해지자 분노했다. 1548년 쉴레이만은 사파비 왕조 원정에 나서며 무스타파를 소환, 부자는 시바스에서 오랜만에 조우해 회포를 풀었다. 하지만 이듬해 조지아 인들의 습격과 1550년 사파비 왕조 측 습격에 대한 무스타파의 지원 병력 요청을 대재상 뤼스템 파샤[1] 가 거절하며 다시 조정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뤼스템 파샤는 보스니아인 아흐메트 파샤를 무스타파에게 첩자로 보냈으나, 되려 그는 무스타파에 감화되어 심복이 되었다. 베네치아 외교관들도 여전히 유력한 차기 황제로 평가했다.
1550년 무렵 이미 지방 총독들은 계승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고, 쉴레이만은 주로 수도에 머물며 재상들을 전선에 보내 대신 지휘하게 했다. 1552년 9월, 사파비 왕조에 대한 원정에 나선 뤼스템 파샤는 병사들을 제어하지 못해 콘야에서 지체되었다. 이때 일단의 예니체리 부대가 탈영하여 아마시아로 향했고, 무스타파에게 충성을 바친 후 복귀했다. 동시에 쉴레이만이 아프다는 소문이 퍼지자 군심이 요동쳤고, 사실상 자신의 막사에 포위된 뤼스템 파샤는 술탄에게 편지를 보내 '결단'을 촉구했다. 그는 무스타파의 인장을 위조해 사파비 황제 타흐마스프 1세에게 동맹을 구하는 서신을 보내 회신을 받아 쉴레이만에게 보고하는 등 부자지간을 이간질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2. 부친에게 살해되다
뤼스템 파샤가 보낸 '증거'를 믿은 쉴레이만은 무스타파의 반역을 확실하게 되었고, 1553년 8월 친정에 나섰다. 쉴레이만은 콘야 인근 에레을리에 주둔하며 무스타파를 소환했고, 후자는 자신에게 제기된 음모를 해명하기 위해 응했고 환영을 받았다. 10월 6일, 무스타파는 말에서 내려 비무장 상태로 쉴레이만의 막사에 들어갔다. 그가 안쪽 방에 들어선 순간 암살자들이 달려들었고, 무스타파는 저항했지만 결국 사지가 잡힌 채로 노끈에 목이 졸려 사망했다. 무스타파의 시신은 군중에 전시되었고, 측근들은 처형되었다. 그를 지지하던 예니체리 장교들은 티마르 (과전)가 주어져 지방에 배치되었다. 무스타파의 시신은 간단한 장례 후 부르사로 보내져 선조들의 영묘에 매장되었다. 처형 후 무스타파의 두 아들도 살해당했고, 유일하게 생존한 메흐메트까지 1554년 부르사에서 부친과 같은 방법으로 죽었다. 뤼스템 파샤는 많은 오스만인들에게 근거 없이 황자를 모함해 죽인 원흉으로 비난 받고 대재상직에서 물러났지만 2년 후 대재상으로 복귀한다. 다만 가짜 무스타파를 사칭하는 반란이 벌어지고, 아나톨리아에서는 아예 만성화되어 후일 젤랄리 반란에까지 영향을 주는 등 촉망받던 황자였던 무스타파의 죽음은 오스만 제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많은 문인들이 무스타파를 추모했고, 그중 타쉬찰르 야흐야는 셰히드 (순교자)로 ㅁ묘사했다. 세 명의 딸들도 재상급 미만의 중견 관료들과 결혼하게 되는 등 그다지 좋은 삶을 보내지 못했다.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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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세기에서의 묘사. 배우는 메흐메트 귄슈르 | |
대체역사에서는 휘렘 술탄의 장남 셰자데 메흐메트와 함께 암군 셀림 2세의 대안으로 꼽힌다. 메흐메트는 병으로 요절했고 무스타파는 뤼스템 파샤의 음모로 죽었다. 셀림 2세는 명나라의 만력제에 맞먹는 직무유기형 암군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 덕에 파디샤가 되었다. 소콜루가 셀림 2세가 죽은 후까지 손꼽히는 명재상으로 국정운영을 캐리한 덕에 오스만 제국은 셀림 2세가 죽을 때까지 365일 하루종일 놀아제껴도 현상 유지에 성공했다.
드라마 위대한 세기에서도 나름 정의롭고 예니체리와 민중의 지지를 받는 왕자로 묘사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