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0 04:48:11

성철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다이스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성철(다이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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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성철 (性徹)
속명 이영주(李英柱)
출생 1912년 4월 6일 (음력 2월 19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사망 1993년 11월 4일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
(향년 82세, 법랍 58세)
학력 단성보통학교
진주고등학교 졸업
종교 불교

性徹
1912년 4월 6일 ~ 1993년 11월 4일

1. 소개2. 생애
2.1. 비판
3. 그 외
3.1. 3000배3.2. 내 말에 속지 마라3.3. 유일한 혈육 불필스님

1. 소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대한민국승려이자 돈오돈수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

한국 현대불교의 가장 유명한 고승. 학구열과 함께 평생 철저한 수행으로 큰스님으로 일컬어지며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큰스님은 시공불교사전에 따르면 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은 승려에 대한 존칭이다.

홈페이지는 http://www.sungchol.org/

2. 생애

1912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1]#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 이며 산청 단성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진학하지 않고 17세의 나이에 불가(佛家)에 입도(入道)하여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는 해인사에 들어가 대종사(大宗師) 아래에서 득도(得道)하였고, 이어서 법명인 '성철(性徹)' 을 얻었다.[2]

당시 고승이던 동산 스님이 거두어 계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동산 스님은 용성 스님 제자인데 용성 스님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며 당시 한국 불교계 최고의 고승. 이로 인해 '용성 - 동산 - 성철'이라는 한국 선종의 대표적 흐름이 생겨난다. 훌륭한 스승 덕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항상 다른 스님은 '선생'으로 부르는 용성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만은 '스님'이라는 칭호를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단한 학식과 구도에 전념하는 모습이 제자의 제자라지만 존경스러워서라고.

불가 입도 이후로는 영주라는 이름을 버리고 성철이라는 법명으로 활동하였으며,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 불가의 구도에만 전념하였고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성전암에서 8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3]를 하였던 사례를 기록하여 불면(不眠)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계종 종단의 분규 와중에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해인사에서 구도에 힘썼으며 속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종정이 되어서 조계종을 이끌었다.

말년에 접어들어서는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병고(病苦)를 앓다가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향년 82세(법랍 58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입적 하기 전 남긴 유언은 '참선 잘 하그레이(하거라).' 다비(화장)한 뒤 사리는 해인사의 사리탑에 안치했다. 당시 110여과의 사리가 나와 세간의 이목을 이끌었으며, 1994년 충청북도 고입선발고사 1번 문제에 등장하기도 하였다.[4]

2.1. 비판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할 당시에 남긴 법어가 그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이다. 산은 산이요 푸스는 푸스로다. 이 법어는 이후 티벳여우를 통해 재조명받게 된다. 다만 이 말은 성철의 창작이 아니고, 중국 송나라 때 발간된 불교서 <오등회원>에 나오는 중국 승려 청원유신 선사가 남긴 말이 원본이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2288442*

그러나 이 법어는 한편으로 1980년 5.18 민주화운동10.27 법난이란 큰 사건을 겪은 당시 불교계의 커다란 위기의식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현실도피라는 비판을 받았다. 마침 당시 종교계에서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자 종교를 넘어선 친구였던 가톨릭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것과 대비되어서 이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법정 스님이나 진관 스님, 지선 스님, 효림 스님의 예에서 보듯 불교계에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사례가 아주 없지는 않다.[5]

1987년 부처님오신날의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법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판을 샀다. 당시 시국 탓에, 사탄이라면 전두환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사탄과 부처는 모두 허망하다' 같은 고명하신 말씀을, 과연 사람들이 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도올 김용옥은 이런 점을 들어 성철을 수준 낮다고 비판했다.

다만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반론도 있다. 불교의 깨달음은 현실과 타협해선 안되는 것이다. 종교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방향을 돌리고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낙태문제를 생각하면 쉽다. 시대와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가르침을 바꾼다면, 그건 이미 종교가 아니라 정치다.(...). 그렇다고 도올 김용옥 선생이 특별히 정치적인 문제를 걸고 넘어진 것은 아니고, 영향을 줄 수 없으면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성철 스님을 비판한 것.

고승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를 비판하고 그에 맞서서 돈오돈수를 제시하기도 하여 불교 세간에 논란과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고승이 제시한 것을 후대 승려가 비판하고 새로운 것으로 고치려 하는 것에 불교계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 조계종의 정체성을 성철이 간화선으로 놓으면서 지눌의 저서 <수심결>을 지눌이 간화선을 접하지 않은 초기 저작으로 분류하고 나중에 대해어록을 보고 돈오돈수로 선회했다고 주장했는데, 정작 수심결 안에 간화선과 관련된 내용들[6]이 등장하여 학술적으로 성철의 주장은 맞지 않다.[7][8][9]

또한 생전에 석가모니가 그토록 경계한 근본주의 움직임을 보였으며,[10] 심지어 한국 불교의 법맥을 연구하면서 자신이 옹호하는 태고법통설을 옹호하기 위해 자료의 변조와 왜곡을 가했다는 비판이 있다. *. 선 수행과 학술을 두루 겸비한 승려로서 학술적인 연구와 성과가 많지만, 부족한 부분 또한 많다는 게 성철스님의 오점.

참고로 성철이 옹호하던 태고법통설과 이와 경쟁하던 나옹법통설은 전부 실제 역사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주장도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조선 시대 억불정책 하에서 조선의 불교계가 일반적인 종파 중심이 아닌 불교 문중을 형성해 법을 전하는 문중불교 체계로 가면서 생겨난 혼란이 문제다.[11]
블로그:각 법통설 비교글

성철은 당대 대선사였던 만공스님에게 배웠는데 인가를 못 받았고 셀프 인가에 가깝게 인가를 한 후, 만공, 경허를 부정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동영상

본인이 설법한 녹음집을 그대로 책으로 옮긴 법어집인 <영원한 자유>를 보면, 초능력에 대해 설명하면서 유리 겔러를 초능력자라 말한다. 이 당시의 사회는 유리 겔러를 마술사가 아닌 초능력자로 믿는 시기였다. 하지만 "본인이 수행을 하여 깨우치면 자기 손바닥 위에 보이듯 모든 만물의 이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런 것 하나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과연 진정 큰스님이자 깨우친 자이며 돈오돈수가 옳은 것이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본인 스스로 자신이 큰스님으로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우친 자라고는 말한 적이 없다.

또한 8년간 장좌불와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간화선으로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혜국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성철을 만났을 때 어떻게 졸지 않았느냐고 묻자 내가 목석이냐? 안 졸게?라고 답했다고. 애초에 생리적으로도 그렇게 안 자는 것은 불가능하다.

법정 스님과는 여러면에서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1968년 법정 스님이 해인사에 머물때, 성철스님을 만나기 위해 온 대학생들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3천배를 하는 모습을 보고 법정스님은 "예배란 간절함이 우러나와 공손하고 진중해야 하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숫자 채우기에 급급한 예배는 아무 소용이 없다"며 비판하였다. 법정 스님은 이런 취지의 글을 ‘굴신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불교신문에 실었다. 굴신운동이란 말 그대로 몸을 굽혔다 폈다 하는 운동이다. 즉 절 횟수 채우기에 급급한 건 그냥 의미도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 뿐이라는 뜻이다. 이를 읽고 분노한 해인사의 젊은 스님들은 법정 스님이 바깥나들이를 간 사이에 법정스님 방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치워 버렸다고 한다. 그 뒤 법정스님은 두 말 없이 해인사를 떠났다.# 또한 법정스님은 성철스님이 출가자들에게 책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오직 참선만 하게 하면서 본인은 추종자들로부터 수많은 책을 보시받아 탐독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12]

다만 1982년 새해 첫날 법정스님은 성철스님과 대담을 통해 "절에 와서 부처님은 안 찾고 나만 찾길래 3천배를 하랬다. 실지로 3천배 하고 날 만나러 온 사람들이 심성이 편해진다더라.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3천배를 하겠느냐." 라는 말을 듣고 깊은 감탄을 했고 그런 생각을 버렸다고 한다.

3. 그 외

  • 1980년대 조계종 최고지도자인 종정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속화되는 종단의 분규[13] 등을 멀리하며 해인사의 말사인 백련암에서 기거했다. 역설적으로 고승으로 점차 명망이 높아가자, 정치인과 재벌 등 여러 유력자들이 해인사를 찾아 성철스님을 뵙고자 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아예 백련암 근처에 몇 년 동안 가시덤불을 쳐놓고, 수행하는 스님 두어 명 외에는 들이지도 않았다.
  • 박정희가 1978년 구마고속도로 개통 때 해인사를 찾아 성철 스님을 만나려 했으나, 성철 스님은 “세상에선 대통령이 어른이지만 절에 오면 방장이 어른이므로 3배를 안 할 바에야 만나지 않는 게 낫다”며 박정희에게도 3배를 요구하여 결국 만남이 무산된 적이 있다.#
  • 성철스님 하면 떠오르는 트레이드 마크는 기워 입은 누더기 승복이다. 그러나 입적 후 그려진 탱화입상 같은 건 죄다 어째 번쩍번쩍하다(...)예수도 생전에는 누더기만 입고 걸어다니셨지 심지어는 꾀죄죄한 말사였던 백련암도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도록 포장하고 높은 누대를 쌓아 웬만한 사찰 규모로 키워버렸다. 현재는 백련암 오두막 뒤편에 스님의 좌상을 모신 커다란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 마찬가지 맥락으로 입적 당시 다비를 거창하게 하지 말고 사리를 뒤지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으나, 제자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다비식을 거창하게 열었다. 사리도 방송 카메라 앞에서 대대적으로 수습했다. 다비식 당일에는 지상파/라디오 방송 3사 및 BBS에서 모두 출동하여 다비식을 생중계할 정도였다. 해인사를 비롯한 일대가 방문객으로 북새통을 이룬 것은 당연지사. 이 때 110여과의 상당히 많은 사리가 나와서 모여든 신도들도 "역시 큰스님"이라며 안도했다고 한다. 사리 항목으로. 사리탑은 해인사 경내에 있는데 상당히 현대적인 형태이다.
  • 성철 스님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는 성철스님을 보필했던 원택스님이 저술한 <성철스님 시봉 이야기>와, 성철스님의 딸인 불필스님의 회고록인 <영원에서 영원으로> 등이 있다. #불필스님 인터뷰
  •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 있는 스님의 생가는 성철 스님이 입적한 뒤 복원하면서 겁외사(劫外寺)란 이름의 사찰이 되었다.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타고 지나가다 산청 즈음에서 강 건너로 보면 바로 보인다.
  • 성철 스님은 유학자 집안의 장남이었는데, 아들이 출가하자 아버지는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 라면서 집앞에 강을 가로지르는 그물을 쳐놓고 매일 물고기를 잡아와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내가 살생하는 것이 불살생을 원칙으로 하는 석가모니에게 복수하는 것"(...)이 이유였다고. 물고기는 무슨 죄야 당시만 해도 숭유억불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유학자 집안에선 승려로 출가하는 걸 천시하는 편이었고 그것도 가문을 이을 장남이 그리했으니 아버지 입장에선 정말 반감이 심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나중에 가서 아들이 깨달음을 얻은 고명한 고승이 되신 것을 보고 나서는 마음을 풀고, 15년 만에 강 앞에 쳐두었던 그물을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놈들아 나는 성철스님에게 간다!!" 라고 고함을 지른 뒤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스님의 어머니 진주 강씨는 남편이 별세하기 2년 전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정식 출가는 안했지만 머리를 깎고 장삼을 입고 생활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스님이 되겠다"며 여생을 마쳤다. 또한 스님의 아내인 이덕명 여사는 남편과 외동딸이 모두 출가하고 시부모님도 작고한 이후 딸 불필스님의 은사인 인홍스님의 권유로 출가하여 일휴(一休)라는 법명을 받고 비구니로 삶을 마감하였다.
  •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선문답(?)도 꽤나 유명하다. (대화록이 출판되었다. 저서:설전 2016 / 책읽는섬 출판 )
  • 어린이를 대단히 좋아해서 격의 없이 함께 신나는 장난을 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남자아이가 장난으로 스님 귀에 빼액 소리를 질렀는데 그 때문에 스님은 한쪽 귀의 청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후유증을 얻었지만 그래도 스님은 그 아이를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고.
  • 일찌기 명망 높은 승려로 알려져서 수행하는 사찰에 툭하면 별별 사람들이 만나고 싶다며 왔다고 한다. 아래에 언급할 단순히 삼천배 하고 오는 일반인들이 아니라 무슨 도술을 겨뤄보자는 식의 괴짜들도 있었다고. 특히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며 성철에게 이를 인정받으려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철스님이 잘 설득해서 자신이 제대로 깨달은게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순순히 돌아갔지만, 가끔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거나 성철을 비방하는 자들도 있어서 골머리를 앓게 했다고.

3.1. 3000배

  • 생전에 스님과 만날 때는 독특한 조건이 필요했는데, 누구를 불문하고 불상에 3,000배를 올려야 했다. 여기에는 어린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어린이는 절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든 나머지 "스님, 다시는 백련암에 안 오겠습니다. 다시 오면 제가 개새끼입니다."라고 내뱉어 버렸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화내기는커녕, 그 어린이가 간 뒤 "그래도 그 놈 대단하다. 지 할 소리는 다 하고 갔제."라며 감탄하셨다. 그리고 나중에 그 어린이가 부모님 손에 이끌려 백련암에 다시 오자 "니 그 때 안 온다던 그 개새끼 아이가?"라며 반갑게 맞이했다고.[14]
  • 1982년 1월 1일 법정스님과의 선문답에서 성철스님은 "신도들이 자꾸 절에 와서 부처님은 아니 보고 나만 만나려고 하니 안된 일이라며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왜 나를 만나느냐. 그래서 내가 3천배를 하라고 하는 것은 나를 보러 온다는 사람들에게 이를 이용해 부처님에게 기도를 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께 3천배를 하면 심적으로 변화가 오고 도움이 된다. 절대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3천배를 시키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간단히 말하면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핑계삼아 부처님께 3000배를 시킴으로써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지 도움도 안 되는 나를 보려면 3000배를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 제자인 원택 스님이 출가하기 전, 친구와 처음 성철 스님을 찾아갔을 때다. "좌우명 하나 얻으러 왔습니다"라고 하자 성철 스님은 "절돈 3천원 내놓아라"라고 했다. 원택 스님이 주섬주섬 3천원을 꺼내자 "그 돈 말고!"란 호통이 떨어졌다. 그제야 절을 3천배 해야 준다는 말임을 깨닫고서 "스님! 출가하면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500계, 보살은 48계를 받는다고 하는데, 저희는 고작 한 말씀 얻어가는데 3천배 씩이나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니는 불교에 대해 많이 아는구나. 니는 만원(만배) 내라"했다 한다. 원택 스님은 그 첫만남에서 만배를 다 했고, "속이지 말라"는 좌우명을 얻었다. 원택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 좌우명을 얻었을 때는 '남을 속이지 말라는 건 어린 애들도 아는 말인데 너무 싱겁지 않나?'라며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뜻도 되는데 그건 참으로 어렵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이후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원택 스님은 그 뒤 몇번을 더 방문해 25년을 끝까지 모신 상좌가 되었다.

3.2. 내 말에 속지 마라

生平欺狂男女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過須彌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活陷阿鼻恨萬端 산 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一輪吐紅掛碧山 둥근 한 수레 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은 생전 종정으로 취임한 뒤 MBC 기자 김영일과의 인터뷰에서 "1,300만 불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뜸 "내 말에 속지 마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성철 자신이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으로 이름높았을 뿐 아니라 수행도 깊은 승려였는데 그런 사람이 자신의 말은 모두 거짓이라고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열반하면서 이런 게송을 남기기까지 했으니 더욱 오해를 사기 충분했다.

크리스트교,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는 불교를 공격하면서 으레 성철의 이 말을 가져다 인용하고 있다. 성철의 평전인 <자기를 속이지 마라>의 저자 소설가 정찬주[15]에 따르면 성철 스님이 열반하고 몇 년 동안 성철의 저 열반송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편지며 논문 형식의 글들이 우편으로 배달되었는데, 가나안 농군학교에 있다고 소개한 어느 장로는 열반송에 성철의 한과 구원받지 못한 상황이 솔직하게 토로되어 있다며 몇 년 동안이나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으며, 성철의 열반송을 나약할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써 솔직한 고백이며(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구원받지 못하고 천당에 이르지 못한 성철 자신의 상태(둥근 한 수레 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를 말한다고 해석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해석이 크리스트교 특히 개신교 전도사들 사이에 등장해 "거봐라, 불교는 구원이 없다, 죽을 때야 그 사실을 안 성철 스님은, 그래서 죽으면서 그동안 제대로 몰라 남을 속인 것을 후회했다"면서 성철이 죽기 전에야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했고 불교는 거짓이며 크리스트교만이 참종교라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도 꽤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다.##

우선 선종의 선문답에서는 은유반어가 상당히 많이 사용된다.[16] 따라서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 해석이 어렵고, 개신교의 해석하듯이 문면 그대로 읽어서는 그 뜻을 완전히 풀이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애초에 문면에서 성철이 "한평생 내가 세상을 속였다"는 말이 개신교의 해석처럼 불교가 틀렸고 크리스트교가 옳다, 지금까지 내가 한 수행은 전부 거짓이었다고 인정한 것이라고 귀결시키는 것은 저자의 뜻을 반영하지 못한 성급한 오류라고 할 수 있는데, 이중섭도 "나는 세상을 속였다"고 했고, 백남준도 "예술 그거 다 사기야. 고등 사기"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중섭이나 백남준이 말 그대로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가?성경에도 문면 그대로 읽으면 크리스트교의 신은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굉장히 잔인하며 이기적이고 쪼잔한 신이 될 부분이 많다.

이미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개신교도들의 악의적이고 일방적인 곡해를 경계하고 반박하는 기고를 몇 번이나 냈다.개신교도들이 모른 척해서 그렇지# 법정 스님은 "진정한 참회와 함께 지옥에 가서라도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커다란 서원"이라고 풀이했고#[17] 성철의 제자였던 원택 스님은 성철의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말은 "나한테서 뭘 바라지 마라"[18],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고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었지 자신의 가르침을 부정하거나 크리스트교가 우월하다고 인정한 것도 아니었다며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고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따라서 누구라도 그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개발해 쓸 수 있는데 왜 그걸 스스로 개발하려고 하지 않고 나만 쳐다보고 사느냐. 이건 내가 중생들을 속인 꼴이다."[19]는 말을 돌려서 말한 것을 저렇게 곡해를 하느냐고 어이없어 했다.[20] 애시당초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부터가 열반 직전에 제자 아난에게 자등명 자귀의(自燈明 自歸依)라 하여 스스로를 등불(섬)로 삼아 의지하라고 하셨고 다른 무엇을 절대화하지 말라고 하셨음을 생각해 보면, 성철 스님의 열반송은 불교적 관점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사탄이 곧 부처라고 하는 말도 크리스트교의 관점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불교가 분별[21]에서 번뇌가 시작된다고 가르치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것은 신이고 어떤 것은 사탄이라고 처음부터 구별을 딱 지어 놓고 살지 말라는 말에 가까우며, 부처라는 말이 '신'일 뿐 아니라 '깨달은 자'라는 의미도 있음을 생각하면[22] 사탄이 곧 부처라는 말은 크리스천들이 거의 온갖 부정하고 추악한 것들을 모두 뭉쳐놓은 사탄 정도의 악마에게도 부처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성)이 있기는 있다고 인정하는 말에 가깝다. 그러니까 백정도 칼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다의 다른 버전인 것이다.될 수 있다고 했지 된다고는 안 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과 가능성인데,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영성(靈性)과도 비슷하다. 대승불교의 경전인 열반경에는 불성이 중생이라면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누구에게나 존재한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가르친다.[23] 이 불성은 사람과 동식물의 종을 가리지 않고, 선악의 유무나 윤리적인 잣대마저 초월해서[24]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내재된 깨달음의 씨앗이자 성불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법화경에서는 인간에 내재된 불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옷 속의 구슬'이라는 비유가 등장해[25] 이미 우리 안에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과 그 씨를 뿌릴 텃밭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그것을 바깥에서 찾으려 하지도 말고 내가 못 찾았다고 그런 게 애초에 나한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포자기하지도 말자고 말하고 있다. 성철은 생전에 불성에 대해서 죄를 지은 중생에게도 불성이 있다며 이러한 법문을 한 적이 있다.
문: 죄를 지은 중생도 불성이 있습니까?
답: 또한 불성이 있느니라.
문: 이미 불성이 있을진댄 바로 지옥에 들어 갈 때에 불성도 함께 들어갑니까?
답: 함께 들어가지 않느니라.
문: 바로 지옥에 들어 갈 때에 불성은 다시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 불성이 비록 중생을 따라 함께 지옥에 들어가지만 중생이 스스로 죄의 고통을 받는 것이요 불성은 원래 고통을 받지 않느니라.[26]

다소 대승불교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대승불교에서 인정되는 경전인 법화경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의 교단을 분열시키고 석가모니 자신을 죽이려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던 사촌동생 데바닷타에 대해서도 "데바닷타는 내 전생의 스승 아사타 선인이었고 전생의 나인 당시 국왕이 그에게서 가르침을 얻어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 지옥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지옥에서 그가 치러야 할 과보(죗값)를 모두 치르고 나면 그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고 천왕여래(天王如來)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27]라고 단언해 말했다. 데바닷타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러서[28][29]지옥에 가는 것은 지옥에 가는 것이고, 데바닷타도 일단 전생에 선업을 한 것이 있으니까 그 선업은 선업대로 죗값 다 치르는 대로 아주 아주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받게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개신교도들 말대로 사탄이 부처와 같은 불성을 지니고 있으니 부처가 사탄인 것이 아니라, 사탄이 신의 자리를 탐낸 악마이고 죄 저질러서 지옥 가 있는 것은 사탄이 지옥에 갈 죄 저질렀으니까 지옥에 가 있는 것이고 사탄이 지옥에 있건 시궁창에 있건 이미 다른 만물에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사탄에게도 그 불성이라는 것이 변함없이 내재되어 있으며 죄를 짓는다고 해서 닳아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감옥에 있는 흉악범이라고 지능이 낮아야만 할 이유는 없다.


3.3. 유일한 혈육 불필스님


파일:불필스님.jpg
사진 속 속세의 아버지였던 성철스님의 사진과 찍힌 불필스님.

사실 성철스님은 불필스님(1937~) 이라는 딸이 있었다. 성철스님은 딸이 태어나기 직전인 1936년에 출가를 해 스님이 되었다,
불필스님은 13살의 나이로 아버지 성철을 찾았지만 그는 가라! 가! 이 말만 했다고, 불필스님은 포기하지 않고 18살 때 아버지 성철을 다시 찾았는데 이 때 행복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이 있다. 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신도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 사실 불필스님은 자신의 언니가 중학교때 죽은것 등 여러가지 이유로 출가를 해 스님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이후 성철스님에게 불필이라는 법명을 받고 법문을 들었다. 이후에 아버지를 속세의 아버지가 아닌 불가의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다. 그래도 아버지의 일말에 정은 있었는지 "새상에 남자들은 믿을 게 못 된다. 부모만 믿어라."라고 했다고.

불필스님은 1993년 아버지 성철스님이 돌아가시자 차마 다비식에 가지는 못하고 다비식이 끝난 뒤에야 산에서 9번 절만했다고 한다. 현재 불필스님은 아버지 성철스님처럼 해인사에 거주 중이다. 불필스님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 생애 태어나면 성철 스님의 상좌가 되고싶다고 인터뷰를 했다. 불제자로써의 스승과 속세의 아버지였던 성철을 상당히 존경하는 듯 하다.



[1] 합천 이씨 집성촌이다.[2] 출가하기 전에 혼인해서 딸이 1명 있는데, 훗날 이 딸도 출가해서 성철스님에게 '불필(不必)'이란 법명을 얻었다.[3] 오랫동안 앉아서 눕지도 않았던 것을 말한다[4] 당시 문제는 "얼마 전 입적하신 성철 스님의 몸에서 110여 과의 ( )가 나왔다." 선택지는 구슬, 다비 등등.[5] 여기에는 10.27 법난이라 불리는 제5공화국 신군부의 불교계 탄압에 대한 반발도 크게 작용했다.[6] 대표적으로 대오지심(待悟之心). 간화선에서 쓰는 표현이다.[7] 이 때문에 학술적으로 수심결의 성립 연대는 지눌이 1198년 41세의 나이로 대해어록을 읽고 3번째 깨달음을 얻은 시점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실 성철의 주장과 달리 지눌이 남긴 저술들은 정혜결사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간화선을 접한 이후의 저작물들이라는 게 정설이다.[8] 물론 성철의 지눌 비판이 아주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한국 조계종은 다양한 수행을 하던 여러 불교 문중들이 몰리면서 생겨났기에 정체성 문제 해결이 시대적 과제이기도 했고, 실제로 지눌의 저술에는 간화선 외 다른 선종 종파나 화엄 계통의 영향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있다고 해서 성철의 곡필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리고 성철이 애써 간화선으로 종단의 정체성을 잡은 조계종은 2000년대 들어서 남전불교와 염불선의 대중화와 그동안 지속되어 온 간화선 중심주의에 대한 학계/승가/재가자들의 비판 등으로 성철이 꿈꾸던 방향과는 반대로 가고 있고, 오히려 "간화선의 위기다"라는 말이 나오는 실정이다.[9] 그리고 선종 자체가 좋든 싫든 화엄종보다 나중 나타난 후발주자인데다 원래부터 사상/교학 등의 측면에서는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은 종파다.[10] 성철이 임제종의 간화선을 조계종의 정체성으로 놓은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물론 이는 당시 한국 주류 선승들의 생각이던 간화선=정통불교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고, 전술하였듯 이는 실제 불교사적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11] 다만 이는 비슷한 시기 중국성리학이 관학을 차지하면서 불교에 대한 취급이 영 좋지 않은 편이었기에, 비슷한 문제현상을 보인다.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의 경우에도 여진족 자체가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고 중시한지라, 중국 전래의 종파들은 생각만큼 잘 나가진 않았다.[12] 그것도 불교 서적부터 외국 시사잡지끼지 굉장히 다양했다. 책을 아주 아껴서 주기적으로 바람 쏘이고, 먼지 제거하는 거풍을 정기적으로 했는데 당연히 제자들 부렸다.[13] 단순히 세속화된 종교의 내부 갈등이라고 단순화시킬 순 없다.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사실과 정치권력, 그리고 종단 내부의 인맥과 이권까지 얽히고 섥혀 있다. 지금도 잊을 만 하면 터져나오는 조계종 내부의 각종 분란도 거슬러 올라가면 이 시절까지 연결된다. 조계종 항목으로.[14] 다른 버전으로는 한 남자가 아이를 데리고 삼천배를 하는데 성철스님이 "니 뭐하러왔노?" 묻자 "예 큰 스님. 하던 사업도 망하고, 마누라도 도망가고 몸도 병이 들어서 스님한테 한 마디 들을려고 왔습니다."그떄 성철스님이 옆에 서 있던 아이한테 기습적으로 꿀밤을 먹이자, 아이가 놀라서 멀뚱멀뚱 노려보자 몇번 더 꿀밤을 먹이시고 열받은 아이가 스님을 보고 냅따 "야 XX놈아!"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스님이 웃으시면서 "야, 네는 야 처럼 할말 다 하고 사나?" 이야기 출처는 19금 경제학_ 저자 조준현 | 인물과 사상사[15] 본인도 무염이라는 법명을 가진 불교 신자였다.[16] 이미 성철 사후 해인사에서 열반송의 원문을 공개했을 때부터 한학자들 사이에 해석을 놓고 순서를 바꿔야 한다느니 갑론을박이 있었다. 불교계에서는 고명한 고승의 열반송은 그 뜻을 새겨서 따르고 실천하는데 의의가 있지 자구에 매달려 일일이 분석할 것이 아니라고 덧붙이기도 했다.#[17] 불교신문에 따르면 1994년 하이텔 상담실에 올라온 질의응답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넷상에서 법정 스님의 말로 잘못 알려졌던 "믿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불에 던져버리는 당신네들의 신을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라고 어느 스님이 말했다는 말의 출처가 여기일 수도 있다.[18] 성철 자신이 종정이라는 고깔을 쓰니까 인터뷰도 오고 하는 모양인데 나라고 뭐 대단한 사람이냐, 종정 고깔 벗고 나면 나라고 뭐 여느 중들과 다른 게 있는 줄 아느냐, 종정 고깔 썼다고 나보고 뭐 얻으러 오지 말고 각자가 가진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스스로 개발해 쓰라 정도의 뉘앙스.[19] 다소 노오력 내지 의지드립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성철은 적어도 젊은 세대를 닦달만 해대는 꼰대들과 달리 "내가 뭔가 잘못 가르쳐서 저들에게 제대로 못 전한 것이 있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정도의 자기 반성을 했기 때문에 "한 평생 세상을 속였다"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성철의 열반송은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겸허함의 표현이다.[20] 그도 그럴 것이 불교계에서는 성철의 저 발언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것 같아서, 성철 스님 사후에 제작된 5부작 다큐멘터리의 부제가 '내 말에 속지 마라'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으므로. 애초에 불교 신자나 승려들은 성철의 '내 말에 속지 마라'라는 그 말이 개신교도들에게 저렇게 트집을 잡힐 줄도 몰랐던 것이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는 것도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깨우치지 못하고 떠나니 섭섭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었고,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라고 한 것도 본인이 떠나는 순간을 하나의 장엄한 낙조로 표현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21] 나와 남을 구분 짓는 것.[22] 이해가 오지 않는다면 예수를 '완전한 신(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라고 칭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된다.[23] 열반경.[24] 마태오의 복음서 5장 45절에도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라는 구절이 있다.[25] 법화경 제8 오백제자수기품#[26] 출처: <성철 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 강설: 선종의 정통사상을 이해하는 긴요한 보전>[27] 법화경 제12 제바달다품[28] 불교에서 말하는 데바닷타의 죄는 크리스트교의 이스카리옷 유다에 버금간다.[29] 그나마 유다는 죄를 지을 거란 예언이 이미 있었고 이후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자결했으나 데바닷타는 그런 예언도 없었다. 죽은 이유 역시 부처를 해하려다 자신이 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