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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균(고려)


복양공(濮陽公)
서균 | 徐鈞
시호 <colbgcolor=white,#191919>복양공(濮陽公)
직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본관 이천 서씨(利川 徐氏)
이름 균(鈞)
아버지 서정(徐靖)
배우자 창화군대부인(昌化郡大夫人) 이씨[1]
자녀
6남 4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서원(徐元))
차남 - 서영관(徐頴觀)[2]
3남 - 서공(徐恭)
4남 - 서순(徐淳)
5남 - 서성[3]
6남 - 서염(徐恬)
장녀 - 이천 서씨[4]
차녀 - 이천 서씨[5]
3녀 - 이천 서씨[6]
4녀 - 이천 서씨[7]
생몰연도 1060년 ~ 1132년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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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문신.

2. 생애

흥례(興禮)[8]와 중원(中原)[9]의 수령을 역임한다. 당시 군(郡), 목(牧)의 수령 중에는 청탁하는 이들이 많아 개경에서 자주 관원을 보내 청탁을 주고받는 지방관들을 적발했다. 그래도 지방관들은 몰래 명함을 주고받으며 만남을 가졌으나 서균은 끝내 청탁하지 않는다. 서균의 지위는 경(卿)·감(監)[10]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유림랑 검교호부상서 판장작감사(儒林郞 檢校戶部尙書 判將作監事),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은퇴해야 했는데, 서운한 기색 없이 말년에는 불교에 심취한다. 인종 10년(1132) 임자일에 73세의 나이로 죽었고 11월 3일 백악산 기슭에 안장된다. 시호는 복양공(濮陽公)이다.#

3. 가족관계

3.1. 조상

서균은 서희의 증손자로 그 묘지명에도 증조부의 공적이 비중있게 서술되어 있다. 서균의 조부와 부친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외조부 김원정 역시 평장사를 지냈다.
  • 증조부: 서희
    • 조부: 서유걸(徐維傑) - 좌복야(左僕射)

3.2. 자녀

검교예부시랑 급사중 이당감의 딸 이씨와 사이에서 6남 4녀를 뒀다. 차남은 출가해 승려가 됐고, 나머지 세 아들은 묘지명에서 이름을 알 수 없다. 딸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고 사위의 이름과 직위만 적혀있다.
  • 부인: 창화군대부인(昌化郡大夫人) 이씨[12] - 이당감(李唐鑑)[13]의 딸
    • 장남: 서원(徐元) -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
    • 차남: 서영관(徐頴觀) - 현화사(玄化寺)의 ▨자대사(▨紫大師)
    • 3남: 서공(徐恭)[14] - 경령전판관(景靈殿判官)
    • 부인: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배경성(裴景誠)의 딸[15]
    • 4남: 서순(徐淳)[16] - ▨▨동정(▨▨同正)
    • 5남: 서성[17] - 내시[A] 교서랑동정(內侍 校書郞同正)
    • 6남: 서염(徐恬) - 춘방공자(春坊公子)
    • 장녀: 이천 서씨
    • 사위: 김▨지(金▨之) - 서면판관(西面判官)
    • 차녀: 이천 서씨
    • 사위: 왕의[19] - 시병부낭중(試兵部郞中)
    • 3녀: 이천 서씨
    • 사위: 이숙신(李淑晨) - 내시[A] 시상의직장(內侍 試尙衣直長)
    • 4녀: 이천 서씨
    • 사위: 고양견(高陽堅) - 서적점녹사(書籍店錄事)

[1] 이당감(李唐鑑)의 딸[2] 현화사(玄化寺)의 승려[3] 각종 사서와 묘지명에서 이름이 확인이 안 되는 관계로 출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4] 김▨지(金▨之)의 부인[5] 해주 왕씨 왕의의 부인[6] 이숙신(李淑晨)의 부인[7] 고양견(高陽堅)의 부인[8]울산광역시[9]충청북도 충주시[10] 주로 정3품이나 종3품에 해당하는, 행정기구 시(寺)의 최고 관직이다.[11] 평장사(平章事)[12] 시호로 보아 충주 이씨(忠州 李氏)로 추정된다. 창화군은 현재의 충주다.[13] 검교예부시랑 급사중(檢校禮部侍郞 給事中)[14] 생몰연도 1101~1171[15] 서공과 배경성의 묘지명에 적혀있다.[16] 의종 24년인 1170년 정중부가 일으킨 무신정변 때 피살됐다. 고려시대의 여러 묘지명들에는 徐淳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徐淳, 徐醇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17] 각종 사서와 묘지명에서 이름이 확인이 안 되는 관계로 출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A] 고려시대의 내시는 조선시대의 내시와 달리 명문가 출신으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문관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조선시대의 내시는 엄밀히 말하면 환관이다.[19] 해주 왕씨[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