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9-01 16:58:38

비코카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 - 스위스 연방 - 베네치아 연합군3.2. 신성 로마 제국 - 스페인 - 교황령 - 밀라노 공국 동맹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이탈리아 전쟁 시기인 서기 1522년 4월 27일 프랑스-베네치아-스위스 연합군과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교황령-밀라노 공국 동맹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패하면서 북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2. 배경

1515년 9월 13-14일,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은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 연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밀라노 공국을 확보했다. 이후 스위스 연방은 1516년 11월 29일 프리부르에서 프랑스와 '영구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의 적에게 용병을 보내지 않기로 하고, 프랑수아 1세는 스위스 용병대를 대거 영입했다. 이리하여 프랑스는 북이탈리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이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1521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카를 5세와 연합하여 공동으로 프랑스에 대항했다.

만토바 공작 페레리코 2세 몬차가 지휘하는 대규모 교황군과 나폴리 및 일부 소규모 이탈리아 파견대가 만토바에서 북상하고, 카를 5세가 파견한 독일군이 남하하였으며, 스페인에서도 원정대가 파견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는 밀라노 공략이었다. 용병대장 콜로나가 이끄는 독일군이 먼저 밀라노를 포위 공격해봤지만, 프랑스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일단 볼로냐로 철수했다. 이후 그해 가을에 접어들면서 각지에서 파견한 군대가 속속 도착하면서 동맹군의 군세가 강해졌다. 반면 프랑스군 사령관 로트렉 자작 푸아의 오데는 용병들에게 지급할 급료를 마련하는 게 갈수록 힘들어져 전력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양군은 아다 강을 따라 크레모나까지 긴 진형으로 대치했다. 콜로나는 적이 급료를 마련하는 걸 버거워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부러 전투를 회피했다. 결국 1521년 11월이 되면서 프랑스군은 급료를 지급하지 못하게 되어 탈영병이 대량 발생해 전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결국 로트렉 자작은 밀라노로 퇴각했다. 콜로나는 즉각 아다 강을 건너 프랑스군을 추격한 뒤, 밀라노 시를 공격했다. 당시 밀라노 요새는 관리 상태가 영 좋지 않았고 병력 차이가 2:1 이상이었기 때문에, 로트렉 자작은 밀라노 시를 지키는 대신 베네치아의 영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콜로나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모셔와서 새 밀라노 공작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로트렉 자작은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는 1522년 3월까지 스위스로부터 15,000명의 용병대를 고용하였고 조반니 드 메디치가 지휘하는 상당한 규모의 베네치아군과 합세했다. 로트렉 자작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밀라노에 접근했지만, 콜로나가 요새를 수리한 뒤 방비를 철저히 한 데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6,000명의 란츠크네히트를 이끌고 밀라노에 도착하여 콜로나와 합세하자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물러섰다. 그는 콜로나를 야전에 끌어들이기로 하고, 파도바를 포위한 뒤 콜로나가 파도바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콜로나는 로트렉 자작의 계략을 훤히 꿰뚫고, 파도바로 가는 대신 프랑스-스위스-베네치아 연합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로 인해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로트렉 자작은 파도바 포위를 풀고 적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자 콜로나는 또다시 전투를 회피하고 밀라노 근방의 요새화된 기지가 있는 라 비코카 평원으로 후퇴했다. 로트렉 자작은 적을 압도하려면 더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하다고 여기고, 병력과 물자를 더 모집한 후 비코카로 가려 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인해 모집이 차일피일 미뤄졌고, 스위스 용병대가 "용병료 지급이 자꾸만 미뤄지니, 전투에 임하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비코카로 출진했다. 이리하여 1522년 4월 27일, 양군은 비코카 평원에서 맞붙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 - 스위스 연방 - 베네치아 연합군

  • 지휘관: 로트렉 자작 푸아의 오데
  • 병력: 36,000명

3.2. 신성 로마 제국 - 스페인 - 교황령 - 밀라노 공국 동맹군

  • 지휘관: 용병대장 콜로나
  • 병력: 20,000명 미만.

4. 전투 경과

1522년 4월 27일, 양군은 비코카 평원에서 조우했다. 신성 로마 제국 - 스페인 - 교황령 - 밀란 공국 동맹군은 콜로나의 지휘하에 한쪽은 배수로, 다른 쪽은 습지로 둘러싸인 평원에 주둔했으며, 전면에는 높은 성벽과 포대가 설치된 보루, 그리고 얕은 도랑이 있었다. 성벽 바로 뒤에 페르난도 달바로스가 이끄는 스페인 아퀘버스병 4개 부대와 게오르크 프룬즈베르크 휘하의 스페인 테르시오 부대, 독일 란츠크네히트 부대가 배치되었다. 기병대는 후위에 배치치되었고, 주둔지 후방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지휘하는 밀라노 분견대가 배치되었다.

로트렉 자작은 성채를 살펴본 뒤, 그대로 공격했다간 피해가 크다고 보고 포병대를 전면에 포진시켜 포격을 퍼붓기로 했다. 그러는 한편, 기병대로 전장을 우회시켜서 적의 주둔지 뒤쪽의 돌다리를 건너서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스위스 용병대는 성채가 포격으로 허물어지길 기다리지 않고, 곧장 전투를 개시했다. 그들은 각각 7천여 명으로 구성된 2개의 파이크 대형을 형성한 채 성채를 향해 진격했다. 로트렉 자작은 그들을 말리려 했지만, 스위스 용병대는 지휘관의 호소를 무시하고 계속 전진했다.

스위스군이 전진해오자, 성채에 배치된 포병대가 포격을 퍼부었고, 뒤이어 스페인 아퀘버스병 4개부대가 총격을 퍼부었다. 스위스병은 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지만, 계속 밀어붙인 끝에 성채를 가까스로 허물고 3미터가량의 도랑을 건너 적진 내부로 천천히 진입했다. 그러자 스페인 테르시오 부대와 독일 란츠크네히트 부대가 즉각 투입되어 역공을 퍼부었다. 이미 큰 손실을 입어 전의가 꺾였던 스위스 용병대는 이 역습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진영으로 패주했다.

한편, 프랑스 기병대는 돌다리를 건너 적진의 후방을 치려 했다. 그러나 밀란 분견대와 신성 로마 제국 기병대가 이들을 막아섰고, 숫자에서 밀린 프랑스 기병대는 패주했다. 이리하여 프랑스 기병대와 스위스 용병대의 공세는 30여 분만에 격퇴되었다. 아직 병력 규모는 적보다 많았지만, 사기가 많이 꺾였고 적의 방비가 너무 굳건해 도저히 돌파할 방도가 없다고 판단한 로트렉 자작은 철수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비코카 전투는 신성 로마 제국 - 스페인 - 교황령 - 베네치아 동맹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스위스 용병대는 비코카 전투에서 3,000가량의 병력을 잃었지만 적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전투 다음날 고향으로 돌아갔고, 로트렉 자작은 베네치아로 철수했다가 베네치아가 더는 프랑스와 함께 싸우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표명하자 어쩔 수 없이 본국으로 철수했다. 콜로나는 프랑스군이 사라지자마자 곧장 제노바로 쳐들어가서 도시를 약탈하고,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협조적인 새 총독을 임명했다. 이후 1523년 베네치아가 반 프랑스 연합에 가담하면서, 프랑스는 북이탈리아에서의 모든 영향력을 상실했다.

프랑수아 1세는 어떻게든 밀라노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1524년 10월 4만 프랑스군 및 스위스 용병대를 이끌고 밀라노로 진격했다. 그들은 1개월도 안 되어 밀라노를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파비아를 포위했다. 하지만 파비아 수비군 9천 명은 끝까지 항전했고, 그 사이 카를 5세가 출병한 제국군이 당도했다. 이리하여 양측은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놓고 1525년 2월 23일 저녁부터 24일 아침까지 파비아 전투에서 맞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