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6 15:38:35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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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통일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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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제2공화국 임시정부 제5대 대통령
폴란드 통일노동당 초대 중앙위원회 제1서기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Bolesław Bierut
파일:비에루트.jpg
출생 1892년 4월 18일
러시아 제국 프리비슬린스키 지방 류블린현 류블린
사망 1956년 3월 12일 (향년 63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재임기간 폴란드 대통령
1947년 2월 5일 ~ 1952년 11월 20일
폴란드 통일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48년 12월 22일 ~ 1956년 3월 12일
서명
파일:Signature_of_Bolesław_Bierut_(1948-07-1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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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22c3f><colcolor=#fff> 배우자 야니나 고르친스카비에루트 (1890-1985)
정당 폴란드 통일노동당 (1948년~1956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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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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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정치인. 1892년 출생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폴란드가 공산화되어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초대 서기장이 되었으나 195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 참석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2. 상세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태어난 비에루트는 1912년 폴란드 사회당 가입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종결 이후 폴란드의 농촌에서 농촌협동조합 운동을 하였으며, 추후 폴란드 공산당의 일원이 된 비에루트는 코민테른 요원으로 발탁되어 베를린, 빈, 프라하 등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폴란드 공산당과 소련 사이의 연락책이 되어 폴란드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1933년, 반공주의적이었던 폴란드 제2공화국 정부에 의해 불법 노조활동으로 수감되어 7년형을 선고받는다. 허나 이는 아이러니하게 소련에 들이닥칠 대숙청으로부터 비에루트를 살렸다고 여겨진다. 그가 투옥된 기간 스탈린은 폴란드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대숙청을 감행,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인 율리안 레슈친스키(Julian Leszczyński, 1889–1939)까지 처형하였고 폴란드 공산당은 붕괴된다.

1938년 12월 20일, 사면을 받고 감옥에서 풀려난 비에루트는 스포웸(Społem, 폴란드의 협동조합)의 회계원으로 일하다가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루블린으로 피신, 다시 소련으로 피난하여 1943년까지 소련에 지냈다. 한편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독일 점령 하의 바르샤바에서 공산주의 잔여세력은 소련우호연맹을 조직, 자유투쟁연합 등 다른 조직들을 끌어들여 1942년 1월에 정식으로 폴란드 노동당(Polska Partia Robotnicza·PPR)을 조직하게 된다. 하지만 폴란드 노동당은 게슈타포의 탄압으로 인해서 큰 수난을 겪게 되고, 당을 군사조직으로 재조직하기 위해서 1943년 중반, 소련에 머물고 있던 비에루트를 비롯한 전직 폴란드 공산당원들을 폴란드로 파견되었다. 비에루트는 상당한 능력을 보였으며 폴란드 노동당 서기장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런던의 망명정부에 대해 양보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를 기회주의라고 비난하는 등 그와는 대립각을 세웠다.

소련이 반격, 독일령 폴란드로 진격하기 시작한 후에는 폴란드 전국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친소파 폴란드의 중심지가 된 루블린에서 폴란드 공산주의 정부 설립을 주도한다. 1944년 9월 11일, 루블린 위원회는 폴란드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라고 선포함으로 런던의 망명정부를 부정하고 비에루트를 전국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게 하여 그에게 행정권과 입법권을 독점시키고 국가수반으로 내세웠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신임을 받은 비에루트는 포츠담 회담에도 참석, 전후 독일-폴란드 국경인 오데르-나이세 선의 설립을 로비했다.

소련의 개입이 들어간 1947년 2월 4일, 폴란드 총선에서 비에루트는 전후 폴란드의 대통령에 선출됨으로 국가수반 직위를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1948년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이어진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폴란드식 사회주의와 비공산주의 정파들과의 타협을 주장한 기존 서기장 고무우카를 숙청하고 폴란드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당권을 확고하게 장악하게 된다. 1948년 12월, 폴란드 노동당과 폴란드 사회당이 합당하여 폴란드 통일노동당으로 출범하였다. 총 65명의 중앙위원회 위원과 11명의 정치국 위원이 선출되었으며, 비에루트는 중앙위원회 위원장 겸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다.[2]

대통령으로서 전후 복구와 폴란드의 공업화를 위한 6개년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서독의 재무장에 매우 격렬하게 반발했다. 1952년 10월 26일 선거로 신헌법이 채택되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자 치란키에비치를 부수상으로 보내버리고 자신이 수상에 취임하였다. 이미 폴란드 안에서 비에루트에게 개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에루트는 강경한 스탈린주의자로서 폴란드에 집단농장사회주의 리얼리즘 도입을 밀어붙였고 비밀경찰 설립으로 반공주의자들에 정치탄압을 가했다. 이 탄압으로 인해 후버 재단에 의하면 비에루트에 의해 처형된 사람들만 6000명에 달한다고. 그리고 가혹한 공업화 정책으로 인해서 많은 식량이 외화 확보를 위해 수출되고, 도시 노동자들을 먹이기 위해 징발되어서 1952년에는 식량난까지 닥쳐왔다. 1952년 6월, 7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비에루트는 식량위기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후원자인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사망하면서 비에루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비에루트는 새로운 소련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고, 1953년 노동절 연설에서 비에루트는 단 한사람의 살아있는 소련 지도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정치국원들이 집단지도체제 실시를 천명하고 서기장 직함을 폐지하였으며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게도 이를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1953년 10월 29일, 8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비에루트는 집단지도체제를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하였다. 하지만 가혹한 농업정책을 계속 유지하였으며 농민들이 이윤을 추구하지 못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비재를 증산하였다.

1954년 3월 10일부터 3월 18일까지 열린 2차 당대회에서 비에루트는 정치국 위원에 재선되었으나,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중앙위원회 위원장 직함을 폐지, 수상에서도 물러나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56년 3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가 3월 12일, 현지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대해서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에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풍문이 파다하였다. 이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 지도자 중 유일하게 죽을때까지 지도자로 남았던 사례이다. 비에루트의 시신은 사후 폴란드로 송환되어 장례가 국장으로 치러진다. 후임 제1서기로 에드바르트 오하프가 선출되었으나 1956년 포즈난 사태로 인하여 곧 실각, 고무우카가 복귀하게 된다.

비에루트는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와 함께 20세기 후반 폴란드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된다. 그가 관여한 폴란드 인민 공화국 헌법은 1989년까지 유지되었고 그의 고압적 스탈린주의 정책들은 사후 포즈난 항쟁으로도 이어졌기 때문.

3. 참고문헌

  • M. K. Dziewanowski, The COMMUNIST PARTY of POLAND: An Outline of History(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1] 다만 폴란드 통일노동당의 전신인 폴란드 공산당과 폴란드 사회당 좌파에도 참여해 실질적으로는 1912년 가입이다.[2] 참고로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별개로 서기장 직함은 존속하여 수상이며 폴란드 사회당 출신의 유제프 치란키에비치가 선출되었다. 이는 동시기 헝가리와 비슷한 조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