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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보그단 필로프 Богдан Филов | Bogdan Filov | |
| | |
| 본명 | 보그단 디미트로프 필로프 Богдан Димитров Филов |
| 출생 | 1883년 4월 10일 |
| 오스만 제국 스타라자고라 | |
| 사망 | 1945년 2월 1일 (향년 61세) |
| 불가리아 왕국 소피아 | |
| 국적 | |
| 종교 | 불가리아 정교회 |
| 직업 | 정치인 |
| 소속 | |
1. 개요
불가리아의 정치인, 고고학자, 미술사학자로 제28대 불가리아 총리직을 역임하였다. 보그단 필로프는 불가리아 전문 고고학 및 미술사 분야 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학자로 고대 및 중세 불가리아 미술사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정치인으로서 필로프는 불가리아 왕국이 나치 독일 편에 서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생애
보그단 필로프는 1883년 4월 10일 스타라자고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D. 필로프는 1887년 장교 반란에 참여하여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래서 보그단의 어머니인 엘리사베타는 3명의 어린 자녀를 둔 미망인이 되었다. 보그단 필로프는 카를로보와 플로브디프에서 공부를 했고 1900년 소피아에 있는 제1소피아 남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교육부의 국가 장학금을 받아 독일로 건너가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고전 문헌학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는 고고학과 로마사를 공부하였다.박사 학위를 딴 뒤 불가리아로 돌아온 보그단은 소피아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바르다르 마케도니아에서 그는 그곳의 문화 유적을 탐험하기 위해 파견된 독일 고고학자 및 미술사학자와 협력하기도 했다. 1918년 여름 오흐리드 호수 근처의 트레베니슈테 묘지 발굴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렇게 학술 활동에 전념하던 보그단은 1938년 말 게오르기 쿄세이바노프 내각에서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 2월 15일, 차르 보리스 3세의 칙령 제8호에 따라 그는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의 정부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1940년 9월 7일, 남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서 불가리아로 반환하는 소위 크라이오바 협정 에 서명한 것이다. 필로프 총리는 1940년 12월 24일 제정된 유대인 차별 조치를 담은 국가보호법 제정을 주도했다. 얼마 후, 정부 내에 유대인 문제 위원회가 설립되어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의 총리 임기 말에는 마케도니아와 서부 트라키아의 해방된 불가리아 지역에서 1만 1천 명이 넘는 유대인이 독일로 추방되었고, 대부분이 사망했다. 그러나 대중의 항의로 불가리아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의 추방 계획은 취소되었다.
1941년 3월 1일, 필로프는 총리로서 비엔나의 벨베데레 궁전에서 불가리아의 추축국 가입에 서명했다. 이렇게 불가리아 정부는 독일과 이탈리아와 협력하여 불가리아인이 거주하는 여러 지역에 군대를 파견했다. 불가리아 군대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해방군으로 환영받았고, 차르 보리스 3세는 " 통일 차르 "로 선포되었으며, 정부는 그 위신을 크게 높였다. 이로인해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대부분, 에게 해 마케도니아 동부, 서부 트라키아, 서부 교외, 그리고 세르비아 와 서쪽 국경을 접한 모라비아는 전부 불가리아 영토가 되었다.
1943년 8월 28일 차르 보리스 3세가 사망한 후, 필로프는 총리 자격으로 시메온 2세의 섭정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정세는 독일에게 매우 불리해졌다. 1944년 8월 소련의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가 시작되고, 결국 루마니아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불가리아 정권 지도부는 독일과 불가리아를 더욱 신속하게 분리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콘스탄틴 무라비예프 내각이 이전 야당 대표들로 구성되었을 때, 필로프의 섭정 사임이 조건으로 제시되었다. 그는 이 조치를 연기할 여러 가지 이유를 찾았지만, 9월 7일 섭정 위원회에서 물러났고 다음 날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하지만 사임한 것도 무색하자 9월 9일 쿠데타가 일어나 보그단 필로프는 쿠데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후 다른 섭정들과 대부분 장관들과 함께 소련의 한 호텔에서 3개월 동안 심문을 받았다. 1945년 1월 3일, 필로프와 그의 동료들은 기차로 불가리아로 돌아와 1942년 조국 전선의 초안 프로그램에 명시된 대로 인민재판소 제1부로 끌려갔다. 피고인 필로프는 1월 12 일 인민재판소에서 심문을 받는 동안 품위 있게 처신했고 , 자신이 따른 정책과 국가의 방향에 대해 유죄임을 부인했으며, 사형 선고를 냉정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1945년 2월 1일에서 2일 사이 의 밤에 다른 섭정관, 장관, 대리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1] 필로프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그의 아내는 추방되었다.
[1] 사형 판결은 1996년 6월 26일 불가리아 대법원에 의해 철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