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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복스/활동/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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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1집

EQUALIZEHER
1997.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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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 V.O.X II
1998.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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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Come Come B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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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200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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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5집

Boyish Story
2001.06.14
스페셜 5.5집

Baby V.O.X Special Album
2002.04.24
정규 6집

Devotion
2003.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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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de West
200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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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에서의 폭발적인 인기2. 5.5집 활동3. 첫 단독 콘서트4. 중국 '베이비복스 가요제' 개최되다5. 여성그룹 '디바'와의 마찰6. 종합

1. 중국에서의 폭발적인 인기

베이비복스는 2002년 1월 1일 새해 첫 날부터 중국의 칭다오 인민체육관에서 공연을 했다. 2001년 4월 20일부터 베이징을 시작으로 충칭, 상하이 등 12개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해왔던 베이비복스는, 그 날 칭다오 공연으로 14번째 현지 공연을 하며 2001년의 중국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당시 공연은 7만 5천명을 수용한 대규모 무대로 치러졌다. 베이비복스는 그 날 공연 이후 베스트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2002년 4월, 중국에서 톱스타 급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간미연은 '과일나라'와 전속 모델 계약을 맺었다. 간미연이 한국 연예인 중 중국에 제일 먼저 진출했으며, 중화권에 한류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베이비복스 멤버로서 깜찍한 용모와 뛰어난 춤, 노래 실력으로 멤버 중에서도 특히 중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 천진에 '천진동양화장품유한공사'라는 현지법인을 갖고 있던 '과일나라'는 간미연의 중국 내 높은 인기와 깨끗한 이미지가 자사가 추구하는 콘셉트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판단 아래 중국 내 지면광고에만 출연하는 조건으로 1년 전속에 2억 5,000만원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전격 모델계약을 맺었다. 이 같은 특급 대우는 당시의 역대 중국진출 연예인 중 김희선(6억원)과 안재욱(4억원)에 이어 3위에 해당했으며, 여자 가수로는 최고의 액수였다. 2002년 4월 10일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라디오 방송국 협회가 뽑은 '최우수 한류가수상'의 영예를 안으며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 여성그룹으로 선정됐다.

2. 5.5집 활동

2002년 4월, 스페셜 앨범 <Baby V.O.X Special Album>으로 가요계에 컴백한다. 그동안 함께 작업한 김형석이 아닌 김창환의 곡을 받아 발표한 앨범이었다.원래는 3월 발매 예정이었으나, 신곡 수록에 대한 문제로 연기되어 5월에 발매 되었다. 작곡가 김창환이 특별히 베이비복스를 위해 내놓았던 <우연>은 그동안 베이비복스가 선보였던 스타일에서 벗어난 하우스 댄스곡으로, 중국 활동을 함께하며 친분이 두터웠던 클론강원래가 사고 후에 처음으로 안무를 맡아 베이비복스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파일:베이비복스_Baby V.O.X Special Album.jpg
베이비복스 역대 앨범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Baby V.O.X Special Album
2002년 4월 24일 발매

스페셜 앨범은 총 4장의 디스크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번째 CD에는 신곡 2곡 <우연>과 <Go>과 함께 1집부터 5집까지의 히트곡이 리믹스되어 수록되었다. 두번째 CD에는 1집부터 5집까지의 신나는 댄스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번째 CD에는 그동안의 발라드 넘버들이 총망라되어 수록되었다.

우연《우연 (우울한 우연)》(작사, 작곡: 김창환, 원곡: 콜라 <우울한 우연>)

스페셜 앨범의 타이틀 곡이었던 <우연>은 '콜라'의 <우울한 우연>이 원곡인 리메이크 곡이며 작곡가 김창환이 '콜라'에게 곡을 주었다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일본의 'Color'라는 그룹에게 <恋より大事なものはない>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주었다가, 그래도 빛을 보지 못하자 또 다시 베이비 복스에게 <우연>이라는 제목으로 주게 된 곡이다.

제 주인을 찾지 못했던 이 곡은 돌고 돌아서 <우연>이란 제목으로 베이비복스에게 간 끝에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베이비복스는 <우연>으로 3집 이후 국내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고, 2주 연속으로 SBS 인기가요에서 1위 수상을 했으며 음악캠프에서는 1위 후보까지 들었다. 또한 <우연>은 당시 대한민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2002 한일 월드컵 붐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지는 신나는 비트로 인해 월드컵 주제가로 지정되었고, 곡은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에 가요계의 불황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복스 활동 중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또한 2002년 벨소리 차트에서도 걸그룹으로는 유일하게 5위권에 들며 이 당시 걸그룹들중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두 달간의 짧은 활동이었지만 음반 판매량도 24만장을 돌파하며 베이비복스의 전체 앨범 중 가장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본래 한달간 활동 하려던게 두달로 늘어난거라 공식적인 후속곡 활동은 아쉽게도 없었으며 엔딩 무대에서 <GO>로 후속곡을 딱 한번 선보였다. 참고로 앨범에 수록된 <Go>는 베이비복스의 숨은 명곡으로 평가 받을 정도로 팬들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유독 오래 사랑을 받은 곡이다. 별 다른 활동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 6월 30일자 SBS 인기가요에서 17위에 랭크되었다.

3. 첫 단독 콘서트

파일:loYJpgq.jpg
단독 콘서트 포스터

2002년 8월 15일에는 리더 김이지가 재학했던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데뷔 6년만에 첫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총 2회의 공연을 선보였으며 8000여명을 동원했고 전석매진을 기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베이비복스는 해외활동도 항상 병행했던 그룹이 었고 1세대 그룹에게는 없던 활동 스케줄이었다. 그래서 국내 팬들은 서운함을 많이 토로했다. 그 때문에 대중문화 수출의 선봉에 섰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국내 팬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서 2002년 8월 15일의 국내 첫 단독 콘서트의 성공은 의미가 컸다. 베이비복스는 데뷔 이후 발표했던 모든 히트곡을 라이브로 열창하며 화려한 무대를 꾸몄다. 공연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쑈쑈쑈'. 기존 콘서트의 틀을 깨는 '난장 파티'를 연출하며 확실한 볼 거리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연 실황의 모습은 M.net에서 1시간 분량으로 편집되어 방송에 송출되었고 추후에 스페셜 콘서트 VCD를 발매하였다.

go《Go》 (작사, 작곡: 김유라)
2002년 8월 15일에 있었던 첫 단독 콘서트 영상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

4. 중국 '베이비복스 가요제' 개최되다

파일:UCN0xei.jpg
2002년 7월 중순부터는 중국에서 '베이비복스 가요제'가 중국 15개 성에서 개최되었다. DR 뮤직이 중국 내의 우수한 인재 발굴과 한국가요 붐을 조성하기 위해 각 성 방송사들에 제안한 것이 흔쾌히 받아들여져 이뤄진 것이었다. 이는 당시에 이미 한류의 주역이라기보다 중국의 국민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베이비복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가요제는 중국 내 각 성들과 도시들이 한국의 '강변가요제'나 '난영가요제'와 같은 특색 있는 도시 행사로 발전시키겠다는 의견을 내놔 중국 15개성으로 확대됐다.

김이지와 이희진은 2002년 5월 10일 소속사 대표와 함께 강소성 중앙방송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가요제의 테이프를 끊었다. 중국 강소성에서 베이비복스 멤버와 강소성 중앙방송사 대표, DR 뮤직 윤등룡 대표가 중국 언론을 대상으로 가진 기자회견 현장에는 '양자만보', '남경 아침일보', '금령만보', '남경시 라디오방송' 등 30개가 넘는 현지 매체가 참석하여 초미의 관심을 보였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베이비 복스 멤버들은 "단순한 가요제가 아니라 도시의 대표적인 축제로 만들겠다"며 자신들의 이름을 딴 가요제 개최에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강소성의 경우, 한 달 동안 4차에 걸친 예선과 결선을 TV를 통해 생중계 하는 등 당시 가요제에 대대적인 관심을 보였고, 2002년 6월 28일 최종 예선을 치렀던 남경의 경우 1만 6,000명을 넘어서는 참가자가 몰리는 등 상해 광주 심천 삼성 등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베이비복스의 이름을 내건 행사였던 만큼, 자작 곡을 들고 치러지는 한국의 가요제와 달리 참가자들은 베이비복스의 노래나 한국 가요를 들고 나와 예선을 치렀고, 2002년 10월에 최종 본선이 열렸다.

한편, 이 가요제에서 입상한 '장리인'은 DR뮤직에 선발된 후 2003년 1월에 10년의 기간으로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가수 트레이닝을 받아오다가 중간에 DR 뮤직에서 나와 2004년에 'H.O.T. china'를 통해 오디션을 보고 SM 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DR뮤직 측은 이를 모르고 있다가 장리인이 데뷔한 이후 음색이나 창법이 유사하여 찾던 도중에 장리인이 DR 뮤직의 연습생으로 있던 인물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DR 뮤직은 "감쪽같이 속았다"면서 장리인과 SM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후 DR뮤직은 1년여간 SM 엔터테인먼트와 장리인을 잇달아 접촉했으나 협상이 원활치 못해 결국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DR뮤직의 한 관계자는 "당시 계약서에 따르면 장리인은 계약파기시 손실액과 위약금 등 총 500만 위안(약 6억 4,000만 원)을 물어줘야한다"면서 "하지만 한국 음반 기획사 간의 관계를 고려해 기존 장리인에게 투자됐던 비용에 해당하는 2억 원만 돌려받자는 취지에서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2년 7월에는 홍콩에 이어 8월 대만과 태국 등지에서 프로모션 활동을 펼쳤다. 2002년 7월 20일에는 중국 북경의 CCTV 공개홀에서 MBC와 중국 국영방송 CCTV가 공동 주최한 한∙중 수교 10주년 기념 콘서트에 베이비 복스도 참가하였다. 한국과 중국 측 인기 가수들이 대거 참가했던 당시 콘서트는 CCTV 채널4를 통해 한∙중 수교일이었던 2002년 8월 24일에 선보였으며, MBC는 2002년 9월에 당시 공연을 추석 특집으로 방송했다. 그리고 멤버 개인 활동도 크게 두드러졌는데 2001년 이미 한중합작 영화 <적혈매괴>에 캐스팅 되었던 김이지는 2002년에도 한중합작 드라마 '북경 내사랑'에 캐스팅 되었다. 간미연과 심은진은 국내 예능 버라이어티 쇼에서 맹활약했고 심은진의 얄쨜댄스 등 베이비복스 팀 외 개인 인지도를 올렸다.

5. 여성그룹 '디바'와의 마찰

파일:LDkh1HA.png베이비복스 & 디바. 눈 깔아..

그렇게 개인활동과 해외활동을 병행해오던 2002년 연말 KMTV 시상식에서 3인조 걸그룹 '디바'가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는데, 사실 전부터 두 그룹은 앙숙 사이로 유명했고 해당 시상식에서 디바와 베이비복스 코요태 세 팀이 합동무대를 꾸며야 했던 터라 베이비복스와 디바가 함께 대기실을 써야되는 상황이었고 결국 디바의 멤버 '지니'는 공연을 하기 싫다며 신라호텔로 잠적해 버린것이다. 결국 제작 본부장이 신라호텔까지 찾아가 달래는 해프닝 끝에 디바는 행사장으로 돌아왔다. 아슬아슬하게 두 팀이 다시 모여 본 무대에서 올랐지만 베이비복스가 무대를 서고 있던 중 디바 멤버들이 전원 무대를 내려가는 해프닝이 발생한다. 원래 콘티대로라면 베이비복스가 노래하는 동안 디바도 노래에 맞춰 춤을 춰야 했었는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디바는 결국 본인들의 무대가 끝나고 베이비복스의 노래가 흐르자 무대 밖으로 내려간것이었다. 이 사건은 신문 1면에 보도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 이 해프닝이 생긴것은 두 팀간의 작은 오해 때문이었는데 2011년 강심장에 두 팀이 동반 출연했을때 디바의 '비키'가 당시 상황을 회상하기로는 "리허설을 하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베이비복스가 멤버 간미연이 선글라스를 낀 상태로 고개만 까딱하며 인사를 성의 없이 했다더라"며 이어 비키는 "내가 선배고 나이가 더 많기 때문에 화가 났다. 선배가 지나가는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하나 싶어 '인사를 하기 싫으면 하지 말던가, 똑바로 하던가'라고 말했다"고 전했고 결국 간미연은 울면서 공개홀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희진은, "미연이가 평소 잠이 많은 친구인데, 그 때 너무 피곤해서 선글라스를 끼고 졸고 있었다. 진짜 거짓말이 아니다"라면서 "미연이가 자다가 말고 너무 놀라서 울면서 나갔다"고 했다. 이 날 이후로 두 그룹은 같은 방송에 출연할때면 크고 작은 충돌이 빚어졌고 결국 연말 무대에서 사건이 터진것이었다. 어쨌든 10여년만에 베이비복스와의 불화에 대해 털어놓은 비키는 "그 땐 어려서 그랬는데 지금은 우스운 일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러니, 이젠 그런 게 다 필요가 없고 부질없는 짓이었다. 좋은 추억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며 훈훈하게 마무리 지었다.

사실 두 팀 중 선배는 베이비복스이기는 한데 따지고 보면 좀 복잡하다. 두 팀이 앙숙 사이로 번진것으로 추정되는 2001~2년에는 1995년 데뷔해 1997년 디바로 이적했던 초대 멤버 채리나가 탈퇴했던 상황이었고 그룹 데뷔 자체가 디바보다 약간 빨랐던 베이비복스의 초대 멤버인 이희진, 김이지는 디바의 비키와 지니보다 선배였던 상황이었다. 여기에 1997년 10월에 합류한 간미연은 디바의 이민경보다 선배다. 그런데 이민경은 이미 1998년 8월에 그룹 유니티로 먼저 데뷔했는지라[1] 1998년 9월에 베이비복스에 합류한 심은진, 1999년 6월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윤은혜보다는 앞선다.(이민경이 디바에 들어 온 것은 1999년 7월 경.) 그 점은 둘째치고, 2004년 M.net <What's Up Yo!> 방송에서 심은진이 '디바가 그룹 결성 자체는 우리보다 늦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사실 활동 당시에도 베이비복스는 디바보다 선배인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디바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난것이 아니었나 의심해 볼 대목이다. 디바는 본인들이 선배라고 잘못 알고 있었음에도 2002년 당시 모 케이블 방송에서 비속어까지 동원하며 베이비복스를 공개적으로 경고한적이 있었다(...) 과연 여자 DOC 근데 이 사건에서 몇가지 의외인 점은 이 당시에도 심은진과 이민경은 꽤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이다.응? 두 그룹이 활동을 중단하고 나서 이민경과 이희진 역시 2006년 연극 <사랑은 비를 타고>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채리나는 베이비복스 전 멤버와 친했도 오히려 디바 멤버들과 불화가 있었다. 두명의 깡패멤버가 문제라는 말들이 많았다. 2011년 강심장에서 비키가 활동 내내 앙숙이었던 상대 그룹 멤버의 나이도 몰랐던걸 봐서는 어쩌면 두 그룹간의 신경전은 센언니들답게 조금 스케일 큰 기싸움 정도로 끝났던게 아닌가 추측된다. 언론에서 괜히 호들갑을 떨었던건 아닐지. 한때 두 그룹간의 폭행설까지 돌았지만 전혀 사실무근이다. 그러나 해피투게더에 간미연과 채리나가 같이 출연했는데 간미연은 장나라랑 친해서 같이 이야기를 하는데 디바가 오는데 장나라가 먼저 인사하고 간미연이 하려고 하는데 디바가 앞에 앉았다고 언급하였다.[2] 같이 출연한 채리나는 기사로 접했으며, 이미 팀 탈퇴 이후라고 밝혔으며, 채리나 입장에서는 디바도 같이 활동한 동료이고, 베이비복스는 아끼는 동생이기에 중간에서 절충할 수 있는 센스는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채리나는 심은진한테 너희들끼리 잘 해결해야 하지 않겠냐고 마무리를 지었다고 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QJNWgaTIpbg간혹 디바 베이비복스 불화댓글에 88년도 세또래 데뷔 이가이 소환을 하기도 한다.

6. 종합

어쨌든 그 해 <우연>의 대히트로 골든 디스크에서 인기상을 수상했다.[3] SBS 서울가요대상 한류상, KMTV 코리안 뮤직어워드 한류특별상, SBS 가요대전 10대 가수상, SBS 가요대전 본상, KBS 가요대상 본상을 수상한다.

이후 일본 NHK의 '아시아 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우연>과 <Killer> 두 곡을 열창했으며, 이벤트 형식으로 EP 형식의 앨범도 발매 하였다. 지난 2000년에 열린 미니 콘서트 이후 2년 만에 일본에서 두 번째 미니 콘서트 등을 개최하고 역시나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일본을 비롯해 미국 LA에서도 미니 콘서트를 개최하였으며 역시 전석 매진되었고 미국 현지 음반 산업 관계자들이 여기서 음반 제작에 대한 요청이 들어와 미국 활동의 시작점이 되었다.

또한 베이비복스는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투표cf도 찍는듯 1세대 중 가장 성공적인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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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이민경은 가수데뷔자체로는 97년 5월 혼성그룹 마구리(MGR)로 데뷔했다고 한다.[2] 강심장에서 이희진과 해피투게더에서 간미연이 이야기한 내용이 다른걸로 보아서 인사문제로 불화는 여러번 있던걸로 보여진다.[3] 당시 베이비복스의 앨범 형태가 스페셜 앨범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음반 판매량이 20만장을 넘겼음에도 후보에 오르지 못하자 팬들이 반발하여 결국 인기상이 급하게 대체되어 수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