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5 15:03:55

베네딕토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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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네딕토 10세.jpg
교황 베네딕토 10세(Benedict X)
세속명 조반니(Giovanni)
출생지 실전됨
사망지 성 아그네스 수도원
생몰년도 ? ~ ?
재위기간 1058년 4월 4일 ~ 1059년 1월 24일
1. 개요2. 행적

[clearfix]

1. 개요

교황 니콜라오 2세에 대적한 대립교황.

2. 행적

벨레트리의 주교로, 1050년 교황 레오 9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1058년 3월 24일, 임종을 눈앞에 둔 교황 스테파노 9세는 로마의 성직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는 성직자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당시 교회 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추기경 힐데브란트가 로마로 돌아올 때까지 후임자를 선출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했다. 그러나 1045년 4월 4일 스테파노 9세가 사망하자, 투스쿨룸의 그레고리우스와 갈레리아의 제라르는 맹세를 깨고 그를 교황 베네딕토 10세로 선출했다.

그러나 대다수 추기경들은 베네딕토 10세가 선출된 선거가 비정상적이었고 부패, 민중 선동, 폭력을 통해 다수의 표를 획득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곧바로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이동했다. 오스티아의 추기경인 피에르 다미아니는 4월 5일에 열릴 축성식을 거행하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역시 피렌체로 망명했고, 그는 후임 추기경에 의해 교황에 봉헌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교황 직임을 수행했으며, 켄터베리 대주교 스티건드에게 팔리움[1]을 보냈다.

한편, 힐데브란트는 스테파노 9세 선출의 타당성에 의무를 제기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이자 아들 하인리히 4세의 섭정을 맡았던 아녜스 황후를 설득하기 위해 독일로 갔다가 로마로 돌아가던 중 스테파노 9세가 사망하고 베네딕토 10세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즉각 베네딕토 10세에 대항하기로 마음먹고, 스테파노 9세의 형제이며 하로트링겐 공작인 고드프리트 3세와 접촉해 지지를 얻어낸 뒤, 피렌체 주교 제라르 드부르고뉴를 교황 니콜라오 2세로 추대했다. 베네딕토 10세를 인정하지 않고 떠났던 인사들도 이에 적극 찬동했고, 아녜스 황후도 이에 동의했다.

1059년 1월 18일, 니콜라오 2세는 수트리에서 공의회를 열고 베네딕토 10세를 파문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니콜라오 2세를 지지하는 무리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1월 24일에 로마에 입성했고, 베네딕토 10세는 갈레리아의 제라르가 다스리는 성으로 도주했다. 베네딕토 10세는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반격을 꾀했지만, 1059년 4월 갈레리아 성이 함락당하자 항복하고 자발적으로 퇴위했다. 그 후 니콜라오 2세는 1059년 4월 13일 부활절에 칙서 주님의 이름으로(In nomine Domini)>를 공표해 교황 선거법 개정을 단행해, 이때까지 일반 성직자, 로마 귀족들 및 군주들을 포함한 평신도들이 가지고 있던 교황 선출권을 오로지 추기경만 가지게 했으며, 추기경 이외의 다른 성직자들은 선거에 참여하려면 추기경의 선정과 동의를 받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로마인이 그를 교황으로 여긴다는 점을 고려한 니콜라오 2세는 공개 재판을 열었다. 베네딕토 10세는 자신은 교황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지만, 재판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교황직에서 해임하고 추기경에서 강등시켰다. 그 후 비아 노멘타나의 성 아그네스 수도원에 보내진 그는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사망했다. 그를 몰락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던 힐데브란트는 1073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 등극한 뒤 옛 적수를 성 아그네스 교회에 묻도록 허락했다.

그는 니콜라오 2세에게 밀려난 이래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교황으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니콜라오 5세,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정책에 반감을 품었던 많은 이들은 그가 교황 직임을 정당하게 수행했으며 단지 반대 세력에게 밀려났을 뿐이라고 여겼다. 이탈리아의 추기경이자 역사학자이며 교황의 고관이었던 스테파노 보르지아는 1752년 <베네딕토 10세 교황에 대한 변명>을 집필하기도 했다. 현재 그의 초상화는 제거되지 않은 채 성 바울 대성당에 남아 있다.


[1] Pallium, 주교 이상의 고위 성직자 가운데 교황을 비롯하여 지역 관구를 구성하는 관구장을 맡은 관구장의 제의 위에 걸치는 어깨 장식띠. 권위와 책임, 친교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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