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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 엑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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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gil Max "Ex" Exner Sr.
1909년 9월 24일 ~ 1973년 12월 22일

1. 개요2. 생애3. 특징4. 여담

1. 개요

버질 맥스 엑스너 시니어는 미국의 전 자동차 디자이너이다.

2. 생애

1909년 미국 미시간의 앤 아버(Ann Arbor)에서 태어났으며, 아기였을 당시 조지 엑스너와 아이바 엑스너 부부(George W. and Iva Exner)가 입양했다. 어렸을 적부터 자동차 및 미술에 관심이 많아 뷰캐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노터데임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2년 만에 중퇴, 광고를 전문으로 하는 아트스튜디오 보조로 취직했다. 스튜디오에서 만난 밀드레드 마리 에슐리먼(Mildred Marie Eshleman)과 1931년에 결혼했으며 1933년에는 첫 자식인 버질 엑스너 주니어를 얻은 동시에 자동차 회사 스튜드베이커(Studebaker) 트럭 부문의 광고 아티스트로 승진했다.

1934년에 제너럴 모터스(이하 GM)의 총괄 수석디자이너 할리 얼(Harley Earl)의 눈에 들어 스튜드베이커에서 GM의 폰티악 스튜디오로 스카웃되었고, 1937년식 및 1938년식 폰티악 차량의 디자인을 담당했다.# 1937년에는 폰티악의 수석디자이너로 승진했으나 1938년에 당대 미국의 유명한 산업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이(Raymond Loewy)의 디자인 컨설턴트 업체인 로이 앤 어소시에이츠(Loewy and Associates)로 이직했고, 1947년식 및 1948년식 스튜드베이커 승용차 라인의 디자인을 맡는 등으로 각종 승용차와 군수차량의 디자인을 담당했다. 그러나 휘하 디자이너들의 작업들도 본인의 명의로 등록하던 수석이자 상사인 레이먼드 로이의 관행에 질린데다가 엑스너 본인도 스튜드베이커의 본사가 있는 사우스벤드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스튜드베이커의 엔지니어링 수석 로이 콜(Roy Cole)의 권유로 스튜드베이커의 직속 디자이너로 이직했다.#

스튜드베이커의 직속 디자이너로서 엑스너는 수석디자이너가 되어 레이몬드 로위와 함께 디자인 작업을 이어갔고, 1950년대의 스튜드베이커 디자인 팀 인원들을 꾸리는 역할도 담당하여 과거 미국의 울트라럭셔리 자동차 회사 어번-코드-듀센버그(Auburn-Cord-Duesenberg) 출신의 고든 뷰리그(Gordon Buehrig)나 시어스(Sears) 출신의 밥 버크(Bob Bourke) 같은 인사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레이먼드 로이와의 불화가 계속 쌓여[1] 갈등이 심화되자 1949년에 로이 콜의 도움으로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2]으로 이직하였다.

버질 엑스너는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디자이너로서, 엔지니어들이 스타일링까지 맡았던 당시 회사의 관행을 하나둘씩 바꾸어나가고자 했다. 사내의 선행 스타일링 그룹(Advanced Styling Group)에서 근무하며 이탈리아의 코치빌더 카로체리아 기아(Carrozzeria Ghia S.p.A.)와 협력하는 등으로 각종 컨셉트카들의 디자인을 맡는 것으로 시작하여, 클레이 소재의 목업부터 양산차용 금형제작에 이르는 각종 디자인 과정의 지휘권을 얻어 엔지니어들이 스타일링까지 맡은 결과로 나온 당시 크라이슬러 계열사 차종들의 구식 스타일을 근본적으로 지워내고자 했다. 특히 1948년식 캐딜락의 테일 핀에서 영감을 얻어 테일 핀을 극대화해 공기역학을 개선하고 시각적인 인상을 극대화 하고자 한 1955년형[3]에 처음 적용한 "원 헌드레드 밀리언 달러 룩"(One Hundred Million Dollar Look)" 디자인 테마를 선보이며 낮은 루프라인, 롱 노즈 숏 데크 프로포션, 전장을 강조하는 매끄러운 스타일을 적용한 공격적인 디자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1957년형 부터 원 헌드레드 밀리언 달러 룩을 발전시켜 공기역학적인 요소[4]를 주제로 한 "포워드 룩"(Forward Look) 테마를 클라이슬러 개열사 라인업 전반에 적용하며 그 특성을 극화한, 날렵한 스타일을 내세워 경쟁사인 GM, 포드까지 크라이슬러를 모방하러 나설 정도로 화제를 얻었다. 이 공로로 엑스너는 1957년 7월 25일에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초대 수석디자이너로 승진했다.

엑스너는 1963년형까지의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 계열사 차종들의 디자인을 지휘했다. 그러다가 1961년식 라인업을 디자인하던 1956년에 심근경색을 겪어 1962년식 라인업의 디자인 작업 진행을 미루었는데, 당시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회장 레스터 럼 콜버트(Lester Lum "Tex" Colbert)가 GM이 차세대 신차들을 다운사이징한다는 루머를 이유로 1962년식 차량들의 크기를 줄이라고 지시하여 이미 풀사이즈 목업까지 만든 디자인들을 엑스너가 입원한 기간에 변경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5] 이렇게 만들어진 1962년식 플리머스닷지 라인업[6]은 상업적으로 실적폭락에 시달리고 크라이슬러가 대응하고자 했던 소문도 컴팩트카 라인인 쉐보레 노바의 추가 소식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에서는 버질 엑스너에게 이 책임을 씌워 1961년 말에 해고했고, 디자인 컨설턴트로 유지시키다가 55세에 크라이슬러에서 은퇴했다.

크라이슬러에서 해고된 후에는 독립 컨설턴트로 일하며 디자이너로서의 활동을 지속했고, 1963년부터 "리바이벌 카"라는 명의로 듀센버그, 스터츠, 머서, 부가티같은 과거 사라진 브랜드들을 양산 가능한 구성으로 재해석한 신차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들 중 대부분의 기획은 부가티처럼 투자자를 찾지 못했거나 투자자를 모으는 데 성공했으나 생산 직전에 실패한 듀센버그처럼 양산에는 실패했으나, 스터츠폰티악 그랑프리를 토대로 만든 스터츠 블랙호크를 양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1973년 12월 22일에 심부전증으로 병원에서 사망했다.

3. 특징

1948년식 캐딜락의 테일 핀을 본 경험에 의해 테일 핀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엑스너는 스타일링상으로도 보기 좋은 것은 물론 항공기에서의 꼬리날개처럼 자동차에서도 공기저항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크라이슬러에서 근무하는 동안 "포워드 룩"을 통해 초대형 테일 핀을 데뷔, 발전시켜나갔다. 미국에서 테일 핀의 유행이 사그라든 시점인 1961년식 라인업까지 테일 핀을 유지했을 정도였고, 관련된 연구도 진행했다.# 이외에도 크라이슬러에서 일하는 동안 비대칭 디자인도 연구하여 목업까지 제작했고, 1960년에는 비대칭 조형 테마를 적용한 컨셉트카인 플리머스 XNR을 공개하기도 했다.## 여기에 엑스너는 서 있는 상태에서도 "움직임이 있는" 스타일링을 추구하여 보다 과감하고 다이나믹한 라인과 색분할을 적용하였다.

1959년식부터 1962년식 크라이슬러 라인업같은 경우는 복합조형 테마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1959년에 출시한 밸리언트를 시작으로 강렬한 복합조형 라인과 볼륨이 들어간 디자인을 하나 둘씩 적용했고 "포워드 플레어(Forward Flare)"라는 이름으로 롱 노즈, 숏 데크의 세미 패스트백 프로포션을 구상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출시된 차종들, 특히 1961년식 플리머스와 닷지가 지나치게 과장된 캐리커처로 인해 미적으로 혹평받는가하면, "상업성"에 대한 고려가 필수인 디자이너로서의 감이 떨어졌기에 엑스너를 해고한 게 정당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엑스너가 크라이슬러 수석디자이너로서 마지막으로 담당한 1963년식 라인업의 디자인은 그 큐가 많이 차분해졌고, 후임인 엘우드 엥겔(Elwood Engel)이 참여한 1964년식부터는 링컨 컨티넨탈처럼 극한까지 단정한 테마로 격변했다.

버질 엑스너는 복고 디자인에도 관심을 보여 외장형 스페어타이어를 본뜬 트렁크 장식, 1961년식 임페리얼의 독립형 4점식 헤드램프같은 디테일을 적용하는가하면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에서 은퇴한 뒤에도 듀센버그, 스터츠, 부가티 등 당시 업계에서 사라진 브랜드의 차들을 1960년대~70년대 스타일로 재해석한 신차 프로젝트를 구상한 바 있다.

4. 여담

  • 자동차업계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어 있다.#
  • 첫째 아들인 버질 엑스너 주니어는 아버지를 따라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포드 모터 컴퍼니에서 핀토를 비롯한 여러 차량의 개발과정에 참여했다. 은퇴한 뒤에도 각종 차량의 디자인을 제안했을 정도로 자동차 및 디자인에 대한 흥미를 이어갔고 2020년에도 본인의 자동차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 버질 엑스너 주니어 외에도 1940년생의 둘째인 브라이언(Brian), 1947년생으로 고아로서 엑스너가 입양한 조카 마리(Marie)가 슬하에 있었다. 브라이언 엑스너는 창문에서 떨어져 추락사했다.
  • 버질 엑스너의 생애를 기록한 공식 전기가 있다. 제목은 "Virgil Exner: Visioneer."#
  • 포워드 룩 세대의 크라이슬러 계열 차종들을 종합한 오너 동호회가 존재한다. 이름은 "포워드 룩 네트워크."
  • 버질 엑스너가 디자인한 컨셉트카인 플리머스 XNR은 그란 투리스모 6에서 선택 가능한 차종으로, 그란 투리스모 스포트에서는 업데이트 차량으로 출연했다. 그란 투리스모 7에도 출연한다.

[1] 특히 로이 휘하에 있었던 1944년 중순에 엑스너가 스튜드베이커를 방문해 1947년식 스튜드베이커의 디자인 안을 제시했을 당시, 로이가 직접 담당한 시안 대신 엑스너의 안이 채택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로이가 엑스너를 해고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였다.[2] 처음에는 포드 모터 컴퍼니를 소개해주었으나 면접에서 탈락했고, 이후 콜이 크라이슬러의 회장 K. T. 켈러(K. T. Keller)와 직접 대면해 엑스너의 이직을 도왔다.[3] 엑스너의 디자인 팀에 근무하던 머리 볼드윈(Maury Baldwin)의 디자인 안을 채택했다.#[4] 대표적으로 이전 원 헌드레드 밀리언 달러 룩보다 훨씬 낮아진 전고와 거대한 테일 핀 등이 있다. 당시 버질 엑스너는 테일 핀을 단순히 장식적인 목적이 아닌 실제 주행에서의 공기역학적인 특성을 유리하게 하는데 유의미한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5] 이외에도 대형차만을 고집하며 매년 리스타일링을 감행하는 등으로 과소비를 부추기는 당대 자동차업계 트렌드를 비판하던 전문가들의 여론, 소형차급에 집중하던 AMC의 약진, 1958년의 경제 불황기같은 1950년대 말 미국의 분위기가 이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6] 엑스너는 1962년식 닷지와 플리머스를 털 뽑힌 닭(plucked chickens)이라고 부를 정도로 결과물을 매우 싫어했고, 단가절감 때문에 경영진들이 손을 댄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1962년식 닷지와 플리머스 라인은 디자인이 확정된 지 12개월 내로 생산이 예정되어 다운사이징을 급히 감행해야 했기 때문에 밸리언트의 설계를 토대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