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yarïqu
Байырку[1]
Bayirqu, Bayirku[2]
1. 개요
철륵의 부족 중 하나. 중국 사서에는 고대 튀르크어인 바야르쿠(Bayarïqu)를 전사한 발야고(拔野固), 발예고(拔曳固)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수서 북적전 철륵편 등에서는 발야고(拔也古)로도 표기되어 있다.발야고(拔野古)는 달리 발야고(拔野固)라고도 하고, 혹은 발예고(拔曳固)라고 했으며 고비 북쪽에 어지럽게 흩어져 땅이 천 리나 되었는데, 복골의 정동쪽으로 말갈과 이웃했다. (백성의 숫자는) 천막 수가 6만 장 정도였고, 병사는 만 명이었다. 땅은 초원이라고 좋은 말과 훌륭한 철이 생산되었다. 하천이 있어 강간하(康干河)[3]라고 했는데, 소나무를 잘라 (그곳에) 던져 넣어 3년이 지나 단단해져 돌이 되면 (돌의) 색이 푸르고 치밀하며 나이테가 그대로 있어 세상에서 강간석(康干石)이라고 했다. 습속은 사냥을 좋아하며 농사를 조금 짓기도 했으며 나무를 타고 얼음 위에서 사슴을 쫓았다. 풍속이 대저 철륵과 같았으나 말은 조금 달랐다.
신당서
신당서
2. 상세
고비사막 북쪽에 정착해 살았다. 거주지가 중앙으로 집중되지 않고 여러 군데로 퍼져있었는데 범위가 약 1,000리 정도 되었다.[4] 복골의 동쪽 경계에 위치하며 정예 병사는 10,000명 정도 되었다. 주로 유목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땅은 초원 지대여서 명마를 기르기 유용했으며, 철을 생산할 수 있어 유목민이 대부분 부유했다. 발야고는 사냥도 즐기며 농사도 조금 했다. 나무를 타고 얼음 위에서 사슴(순록)을 잡기도 했다. 풍습은 대충 철륵과 유사하였으나 언어가 사뭇 달랐다.
이웃한 돌궐과는 자주 충돌했다. 구당서 및 신당서에 따르면 서기 627년에 설연타, 회흘 등과 더불어 돌궐에 반기를 일으켰고, 돌궐 측은 진압에 실패했다고 한다. 이 때 당태종의 조정에서는 이를 기회로 북방원정이 고려되었으나 시기상조로 보아 실행되지는 않았다. 629년에는 설연타를 필두로 다른 철륵 부족인 복골, 동라 등과 함께 당에 입조했다. 이를 빌미로 당이 철륵 부족들과 함께 돌궐을 공격하면서 동돌궐은 630년에 멸망했다. 647년에는 당이 설립한 연연도호부[5] 산하로 발야고 부락은 유릉도독부가 세워졌다.
7세기 말엽 돌궐이 다시 부흥하여 돌궐 제2제국을 세우면서 또다시 돌궐과 충돌했다. 오늘날 몽골의 오르혼 계곡에 위치한 돌궐문자로 기록된 후슈 차이담(Khöshöö Tsaidam) 비문 에 따르면 묵철가한이 706년경에 원정을 벌여 바야르쿠를 격파했다고 전해진다.
716년에는 다시 돌궐의 묵철가한에게 맞섰으나 대패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귀로에 오른 묵철은 숲 속에서 발야고의 패잔병들과 마주쳤고 살해당했다. 그 수급은 당나라에 보내졌다. 그 후 720년부터 당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돌궐 제국을 거쳐 위구르 제국의 멸망 이후 칭기즈 칸이 몽골고원을 다시 통일할 때까지는 뚜렷한 문헌상의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14세기 일 칸국의 재상 라시드 앗 딘(Rashd ad-Din)이 저술한 집사(集史)의 부족지에서는 바르쿤(Barqun) 내지는 바르쿠트(Barqut, 복수형)라는 몽골화된 튀르크 종족이 기록 되어있다. 이를 대개는 발야고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바이칼호에 흘러드는 바르구진강 유역의 부랴트인 일파 및 중국 내몽골 후룬베이얼시의 신바얼후기와 천바얼후기에 거주하는 바르가 몽골인들을 이 바르쿠트인의 후예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