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10-25 16:18:17

박병두(1885)





朴炳斗[1]
1895년 ~ ???

1. 개요2. 생애

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군인이며 만주군 출신으로 최종계급은 만주군 중장, 최종 보직은 관동군 보급부대장을 역임했다.

2. 생애

1895년 박병두는 평안남도 안주 출생으로 순천 공립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하다 24세 되던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중국으로 건너가 사천성 성도의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국민당군의 사천군 예하 제9사단 독립연대의 중위로 임관했다. 그 뒤 그는 전공을 세워 1924년 국민당군 소좌로 진급하고 사천성 독판공서의 부관으로 임명됐고, 1925년 6월 다시 중좌로 진급하여 사천군 제16혼성여보병 제3대대장(營長)에 보임됐다. 박병두는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다. 그도 한 때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바 있다. 1925년 8월 그가 郭松齡부대에 소속돼 만주 군벌 장쭤린 타도운동이 실패한 뒤 남만주 일대의 항일운동을 해오던 정의부에 적을 두고 항일운동에도 가담했다. 또 그는 1927년 3월 하얼빈에서 지석호와 최선주 등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한국혁명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다가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소속 외무성경찰에 체포돼 1927년 9월 경성의 복심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 받고 수감된 적도 있다. 그러나 박병두는 얼마 안 있어 변절했다. 1932년 3월 일제가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우자 그가 만주군에 자원입대해 보병 중좌로 임관한 사실로 보아서 그 전후가 변절의 전환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친일로 돌아선 이유는 아마도 중국이 쩔쩔 매던 강한 일본에 붙는 것이 출세와 일신상의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34년 5월 일본 관동군의 천진 특무기관 촉탁에 임명된 뒤 국민당군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거나 포섭공작을 벌여 친일적 중국인들을 다수 만주국에 가담하도록 한 공을 세웠다. 1937년 7월의 중일전쟁 전후엔 박병두는 通州특무기관 촉탁에 임명돼 중국 국민당군에 대한 정탐 및 선문활동에도 참여했다. 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의 밀명을 받고 일본군 동향파악과 후방 파괴공작을 목적으로 천진으로 들어가 일본군의 동향파악과 후방 파괴공작을 해오던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경근을 일제에 가담케 하는 회유공작도 펼쳤다. 그 후 박병두는 북만주 방면으로 파견돼 소련군의 통신 및 산업시설 마비, 교란공작에 참여했고, 해방직전까지 일본 관동군 보급부대장을 지내다가 광복 후 평양에서 소련군에게 붙잡혔다. 1946년 1월이었다. 그는 동년 6월 전범으로 소련 군사재판에 회부돼 “조선국민의 이익을 배반”한 죄목 등으로 25년 형을 선고 받고 10여 년 간 소련 하바로프스크의 포로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50년 2월부로 박병두는 소련군 제16포로수용소에 이감돼 지내다가 6년 뒤인 1956년 일본정부가 그를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소련정부에 보낸 탄원서에 따라 일본으로 송환된 됐다. 그 뒤부터는 그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1] 창씨개명 당시 썼던 이름은 아오야마 산조(靑山三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