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1-17 23:22:30

박규훈(독립운동가)

파일:박규훈.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순창 박씨[1]
출생 1900년 7월 23일
전라남도 제주군 중면 이도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사망 1975년 8월 20일
서울특별시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규훈은 1900년 7월 23일 전라남도 제주군 중면 이도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에서 부친 박이민(朴离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박교훈(朴喬壎)이 있었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권농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권농동)에 있는 최봉환(崔鳳煥)의 집을 거쳐 계동(현 종로구 계동)에 살았다.

그는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병(丙)반에 재학 중일 때 3.1 운동이 발발하자 탑동공원에서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거리로 나아가 헌병대와 경찰의 무차별 총격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생이자 제주도 성내(城內) 대로동(大路洞)[2]에 살던 홍형표(洪亨杓)에게 "2천만의 대표자가 되어 대항하기 위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 글을 보거든 찢어버려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이 들통났다. 또한 3월 7일 4촌 형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에서는 "나는 조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연일 시위 운동을 하고 학교는 동맹 휴교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이 역시 들통났다.

그 뒤 그는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곧 출옥하였다.

이후 1921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한상호(韓相鎬)·송택훈(宋澤薰)·황청하(黃淸河) 등과 함께 귀향하여 강연회 개최 등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진학하였고, 역시 졸업한 뒤에는 일본 고베의 독일인이 경영하는 염료회사(染料會社) 실험실에서 여러 해 근무하다가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경기도에 있는 송고(松高)주식회사와 수원군에 있는 조선직물회사(朝鮮織物會社) 등지에서 공장장으로 근무하였고, 8.15 광복 후 1946년 조선대화방직주식회사 창동공장에서 공장장으로 근무하면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거주했다.

1975년 8월 20일 서울특별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박규훈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2]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