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3 14:10:22

바실리 슈크신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바실리 슈크신
Василий Шукшин
파일:바실리 슈크신 얼굴.webp
본명 바실리 마카로비치 슈크신
Василий Макарович Шукшин
Vasily Makarovich Shukshin
출생 1929년 7월 25일
소련 시베리아 지방 비스키군 스로트스키
사망 1974년 10월 2일 (항년 45세)
소련 볼고그라드주 클렛스카야 클렛스카야강 두나이 유람선 선실
국적
[[소련|]][[틀:국기|]][[틀:국기|]]
직업 작가, 배우, 영화감독
대뷔작 조용한 돈 (Тихий Дон) (1956년)
주요 작품 붉은 나무 딸기 (1973)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 (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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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부모 아버지 마카르 레오니에비치 슈크신
어머니 마리아 포포바
배우자 마리아 이바노브나 슈무스카야 (사실상 이혼)
리디야 페도세바-슈크시나
형제자매 여동생 나탈리아 슈크시나
자녀 마리아, 올가, 예카테리나(사생아)
학력 세미레츠카야 초등학교 (졸업)
비스크 자동차 기술학교 (중퇴)
소련 국립 영화학교 (졸업)
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종교 정교회
주요 서훈 레닌훈장 (1회)
소련 인민예술가
노력적기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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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청소년기2.3. 주립 영화 촬영 연구소와 배우 활동2.4. 영화 감독으로써의 삶2.5. 작가로써의 삶2.6.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2.7. 갑작스러운 사망
3. 필모그래피4. 여담5. 매체에서6.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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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옛 고국으로부터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것은 삶을 행복하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조국을 직접 맞이하게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바실리 슈크신

소련의 배우이자 작가이자 영화감독. 농부의 아들로 테어나 7년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가졌으며, 1950년대 초반부터 연극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배우와 감독으로도 활동하였다.

2. 생애

2.1. 유년기

바실리 슈크신은 1929년 7월 25일 시베리아 소련 연방(현 알타이 크라이) 지역의 스로스트키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마카르 슈크신과 마리아 포포바는 농부였으며 아들이 태어난 직후 지역 집단 농장에 합류하여 일했다. 바실리는 가족 중 장남이었다. 1931년 슈크신 부부는 딸 나탈리아를 낳았다.

1933년, 당시 '공산주의의 불꽃'이라는 콜호스에서 탈곡기 기관사로 일하던 마카르 슈크신이 체포되었다. 그는 반소련 음모에 가담하고 공공 재산과 수확물을 손상시켰다는 혐의를 받았다.
"남편을 잡아갔어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죠. 밤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남편이 문간으로 뛰쳐나가자, 세 명이 그를 덮쳤어요. 아이들은 깜짝 놀랐어요. 나탈리아는 온몸을 떨었고, 바실리는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 날 정도였어요. '엄마, 아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라고 물었죠."

1933년 4월 마카르 슈크신은 처형당했다. 처음에 마리아 포포바는 홀로 아이들을 키우다가 마을 주민인 파벨 쿠크신과 재혼했다. 바실리 슈크신은 그를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희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렀다. 바실리 슈크신은 그를 "드문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라고 부르며, 자애롭고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그의 가족은 가난하게 살았다.
"우리 생활은 참 힘들었어요. 배불리 먹지도 못했죠. 엄마가 일을 나가면, 저와 여동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집에서 지내며 끼니를 해결하곤 했어요. … 우리는 배고픔과 추위를 견뎠어요. 저는 어머니를 평생 사랑했어요. 어머니가 병을 자주 앓아서 돌아가실까 봐 항상 두려웠어요. 그러다 우리 집에 새로운 아버지가 생기면서 생활이 나아졌어요. 하지만 곧 전쟁이 터졌고, 우리 새 아버지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전사했어요. 다시 힘든 시절이 시작됐죠."

바실리 슈크신,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

바실리 슈크신은 스로스트키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는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책을 많이 읽었는데 얼마나 많이 읽었던지 바지 벨트 아래에 항상 책을 넣어 두었고 밤에는 이불을 태우기까지 했었다. 슈크신은 학교에서 책을 가져가서 비밀리에 읽었다. 그런 탓에 시험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았는데 나쁜 점수를 받으면 그의 어머니는 소설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

학교에서 슈크신은 아마추어 연극 활동에 참여했는데, 매주 콘서트를 조직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공연을 했다. 콘서트에서 슈크신은 시를 읽고 연극을 연기했다. 그의 반 친구 발렌티나 베즈메노바는 나중에 "우리 반이 공연 준비를 안 하는 일은 없었어요. 바샤가 꼭 하자고 했거든요."라고 회상했다.

2.2. 청소년기

1944년 바실리 슈크신은 7년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비스크의 자동차 기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성적이 형편 없었고, 기술 과목에서 낮은 성적을 받았다. 종종 수업을 빼먹고 규율을 어기기도 했다. 졸업 1년 전, 슈크신은 기술학교를 떠나 스로트스키로 돌아와 지역 집단 농장에 취직하여 어머니와 여동생을 도왔다. 그러다가 1946년에 그는 다시 마을을 떠나 모스크바 지역 외곽으로 갔다.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열일곱 살이 되던 봄날 이른 아침, 집을 떠났다. 유리처럼 반짝이는 얼음 위를 달려보고 싶었지만, 거대한 미지의 삶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세상으로 가는 길은 슬펐고 조금은 두려웠다. 어머니는 마을 밖까지 배웅해 주시고, 길에서 나를 축복한 뒤 땅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도 아팠고 두려웠지만, 배고픈 자식들을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여동생은 여전히 어리고, 나는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떠났다."

바실리 슈크신, “단지 경제 기사가 아닐 뿐...” 기사에서.

슈크신은 신탁회사 '소유즈프로메카니제이션'에서 기계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칼루가와 블라디미르의 공장 건설, 모스크바 지역의 발전소 및 철도 건설에 파견되었다. 그 후 1949년 가을, 슈크신은 발트 함대에서 무선 통신병으로 징집되어 복무하게 되었다. 그의 동료 바실리 예고로프는 슈크신을 말수가 적고 독서를 좋아하며 능숙한 기술자로 기억했다. 이 시기에 슈크신은 "들판에서 말들이 뛰놀았다"와 "수레 위의 두 사람"을 포함한 첫 단편소설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바다 한가운데서 슈크신은 궤양이 악화되어 쓰러졌다.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동료들이 그를 해안으로 옮겨 병원으로 데려갔다. 치료 후 군의관들은 그를 군 복무에 부적합하다고 판정했다.

슈크신은 다시 스로스트키로 돌아왔다. 그는 마을에서 요양하며 졸업시험을 준비했다. 성적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소련 역사, 소련 헌법, 지리 과목에서는 최고 점수를 받았다. 나머지 과목에서는 중간 또는 낮은 점수를 받았고, 러시아어 시험도 "보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몇 달 후, 그는 노동 청소년을 위한 야간학교에서 러시아어와 문학을 가르칠 교사로 초청받았다.
"솔직히 난 좋은 교사가 아니었다. 정식 교육도, 경험도 없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한 젊은이들이 내 이야기에 진심 어린 관심을 보일 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과 행복을 느꼈다. 그런 순간들이 많지는 않지만, 결국 그것이 행복을 이루는 것이다."

바실리 슈크신, "계단 위에서의 독백"

곧 슈크신은 학교의 교장 직무대행이자 콤소몰 조직의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는 학생들을 독려하며 강연을 했고,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시기, 지역 신문 "전투의 외침"에 그의 첫 글들이 실렸다. 그것은 "야간학교 학생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과 "배우기에 늦은 때란 없다"와 같은 교육 관련 기사였다.

2.3. 주립 영화 촬영 연구소와 배우 활동

1954년 여름, 바실리 슈크신은 스로츠키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모스크바로 가서 문학연구소에 입학하려 했다. 그러나 입학 지원자들은 이미 발표된 소설이나 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는 해당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이에 슈크신은 역사·기록보관학 연구소 입학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그러나 시험을 앞두고 감독 이반 피예프와 우연히 만나 그의 조언을 받아 VGIK 지원하게 되었다. 구술 시험에서 슈크신의 성적은 높지 않았다. 그는 이를 회상하며 "내 준비는 부족했고, 전문적인 지식도 부족했으며, 외모 또한 입학 심사위원들에게 의아함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필기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작품에 대한 고찰, 미하일 칼라토조프의 영화 친구들에 대한 평론, 그리고 "입학 시즌의 VGIK"라는 주제로 작성한 작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 마지막 글은 몇 년 후 고래, 혹은 우리가 예술에 입문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로 발표되었다. 결국 슈크신은 VGIK의 연출학과에 입학하여 미하일 롬 감독의 워크숍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VGIK에서의 학업은 그에게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골 사투리와 지식의 공백을 부끄러워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부가 어렵긴 하지만,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것입니다. 곧 시험이 있는데, 아마도 모든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1956 년 슈크신은 영화에 데뷔했다. 그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동명 이야기를 다룬 훗날 러시아의 유명한 영화 감독이 될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교육 영화 “킬러”에서 주연을 맡았다. VGIK에서 공부하는 동안 슈크신은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여 연구소의 당 회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슈크신은 자신의 친부모에 대한 정체를 숨기고 어머니와 대조국전쟁에서 죽은 자신의 양아버지를 아버지로 표시했다. 그러나 슈크신이 2학년이던 1956년, 아버지는 복권되었고 슈크신은 아버지의 존재를 부끄러워 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이듬해인 1957년, 타르콥스키의 추천을 받아 마를렌 후츠예프(Марлен Хуциев) 감독이 영화 두 명의 표도르의 제작에 그를 참여시켰다. 원래 슈크신은 조감독으로서 오디션을 진행하고 다큐멘터리 자료를 수집하며 분장 및 의상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후츠예프 감독은 그의 독특한 개성과 연기력을 알아보고 주연을 맡겼다.

1958 년에 영화는 성공적으로 개봉했고 작가의 시사회가 개봉 한 후 비평가와 동료들은 그의 역할에서의 능력인 그의“극도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이후로도 영화 “골든 에클론”, “심플 스토리”, “알렌카”등에 출연했다.

VGIK 재학 중, 슈크신의 단편 소설들도 점차 발표되기 시작했다. 그의 지도 교수였던 미하일 롬이 출판을 권유했고, 1958년 잡지 스메나에 마차를 탄 두 사람이라는 단편이 실렸다. 이후 진실, 시험, 스텝카의 사랑 등의 작품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1959년, 슈크신은 졸업 시험을 통과했지만, 졸업장은 받지 못했다. 연출학과 학생으로서 직접 영화를 제작해야 했으나, 그가 연기 활동에 집중한 탓에 학업이 미뤄졌기 때문이다. 1960년이 되어서야 그는 농촌 지역 당 위원회의 활동을 주제로 한 영화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슈크신은 VGIK의 학생들 중 자신만큼 마을 생활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이를 강점으로 내세웠다. 그의 졸업작품 레뱌지예에서 온 소식에서 그는 감독, 각본가, 그리고 주연까지 맡았다. 최종 시험에서 이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지나치게 비상업적인 탓에 결국 개봉되지 못했다.

2.4. 영화 감독으로써의 삶

1963년, 바실리 슈크신은 그의 첫 번째 본격적인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작품이 바로 "그런 사나이가 살고 있다"(Живет такой парень)였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그의 단편 소설 "멋진 운전사", "크랭크축", "그린카 말류긴"을 기반으로 했다.
"영화감독으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제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고 있습니다. 촬영은 아마도 알타이 지방, 스로스트키에서 하게 될 거예요. 영화의 주인공이 추이스키 트랙의 운전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곳에서 촬영해야 합니다."
그는 이 영화에 유명 배우인 니나 사조노바와 아나스타시야 주예바뿐만 아니라, 신인 배우인 로디온 나하페토프와 그의 동기인 레오니드 쿠라블료프를 캐스팅했다. 이 영화는 1964년 개봉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에서 27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또한,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어린이를 위한 최고의 영화"라는 상을 수상했다.

이후 슈크신은 연기 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대규모 영화 서사시인 "스텐카 라진의 반란"에 대한 시나리오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17세기 역사 전문가 시구르트 슈미트와 협업하며 자료를 연구했다. 하지만, 1967년 최고의 시나리오로 선정된 이 작품은 소비에트연방 영화위원회로부터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영화화 승인을 받지 못했다.

첫 번째 영화의 성공 이후, 슈크신은 두 번째 작품 "당신의 아들과 형제"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이번에도 그의 단편 소설 모음집 "촌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토대가 되었다. 슈크신은 이 영화를 통해 지식인의 세계를 시골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다. 그의 세 번째 영화 "이상한 사람들"(Странные люди)은 다시 여러 단편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었다. "미안합니다, 마담!", "촌놈", "생각들" 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 세 개의 에피소드로 나뉘어 각각 다른 시골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1969년 초에 완성되었지만, 검열 때문에 1년 후에야 개봉될 수 있었다. 검열 과정에서 일부 장면이 삭제되었고, 결국 개봉 이후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영화가 잘 안 팔리고, 심지어 사람들이 중간에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일해서는 안 된다. 이건 낭비다. 나는 관객석에서 앉아있으며 괴로웠다. 관객의 경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그것을 무시했고, 결국 관객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 바실리 슈크신, "수백만 관객 앞에서" (영화 예술지 "이스크수스트보 키노", 1971년)

1970년, 그는 세르게이 게라시모프 감독의 영화 "호수에서"(У озера)에 출연했고, 이 작품은 당해 소비에트 연방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었다. 또한 바실리 슈크신, 올렉 자코프, 나탈리아 벨로흐보스티코바는 소련 국가상을 수상했다.

1972년 슈크신은 네 번째 영화인 부부 '페치-라보치키'의 여정을 다룬 코미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1971 년 여름과 가을에 얄타와 알타이, 스트로 스키 마을 근처의 알타이에서 촬영되었으며, 배우는 작가 자신과 그의 아내 리디야 페도세바-슈크시나를 연기했다. 그러나 스튜디오측의 요구로 영화에서 여러 에피소드가 잘리게 되는데 스튜디오 경영진은 테이프에서 술 취한 장면을 제거 할 것을 요구했다. 슈크신은 이 기회에 고스키노에게 이렇게 썼다.
"프롤로그(길 위에서 춤추는 남자)를 남겨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나는 그의 머리에서 그의 잔을 제거 할 것이고 그가 술에 취했다는 인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만화 노래는 남아있을 것입니다 ... 나는 영화에 대한 편견없이 타협 할 수있는 것을 붙잡지 않지만 제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화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슈크신의 고향에서는 영화에 대한 반응이 달랐다.
“일부 가부장제가 갑자기 화면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가부장제는 마치 응축 된 마을 도덕의 순결과 매력을 옹호하는 것처럼 그것을 알아 차리지 못합니다 ... 우리 마을 사람들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은 이제 슈크신이 보여준 것처럼 그렇게 “소박”하지 않습니다.

신문 "Altaiskaya Pravda"

2.5. 작가로써의 삶

바실리 슈크신의 작가 경력은 배우 및 영화감독 경력과 병행하여 발전했다. 1963년 출판사 '몰로다야 그바르디야'에서 작가의 첫 단편집 '시골 주민들'이 출간되었고, 몇 달 후 잡지 노비 미르에 단편 '그린카 말류긴'과 '빨간 운전사'가 실렸다.
"처음 슈크신을 만났을 때, 그는 결코 편집부를 직접 찾지도, 자신의 작품을 직접 가져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슈크신을 만나기 전까지 배우가 그렇게 수줍음이 많은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 저는 슈크신에게 그의 단편들이 모두에게 좋게 평가받고 있으며, 잡지에 실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이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더니 금세 자신의 기쁨을 잊어버린 듯했습니다."
— 아샤 베르제르, 잡지 《노비 미르》 편집자 (알렉세이 바를라모프의 저서 《슈크신》에서 인용)

슈크신은 몇 년간 노비 미르와 협업하며 '늑대들', '추딕', '어머니의 마음' 등의 단편이 포함된 일곱 개의 작품집을 발표했다. 하지만 문학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노비 미르의 편집장이었던 알렉산드르 트바르도프스키는 "그는 놀라울 정도로 예민한 귀를 가졌지만, 작가의 언어는 조금 약하다"고 평가했다. 한편, 문학 비평가 에드바르다 쿠즈미나는 그의 인물들이 "견고한 기반"을 갖고 있으며, "삶의 감각, 예리한 관찰력, 생생한 표현력"이 돋보인다고 지적했다.

1963년, 슈크신은 장편소설 류바비니를 노비 미르에 게재하려 했으나, 분량이 길고 주제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후 1965년 문학잡지 시비르스키 오그니에 1부가 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류바비니는 내전과 집단농장 설립 시기의 가족 전설과 시골 노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다. 1960년대 후반, 슈크신은 2부를 완성했으나, 원고는 그의 사후에야 발견되어 출판되었다.

이 시기에 슈크신은 작가 빅토르 네크라소프, 벨라 아흐마둘리나, 바실리 벨로프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시인 바실리 벨로프는 슈크신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그만두게. 너는 작가야. (…) 아무도 듣지 말고, 그저 쓰고 또 써. (…) 나는 문학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굳게 믿네."

슈크신은 스테판 라진의 반란을 다룬 영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그는 1969년, 라진 반란 300주년을 맞아 작품을 완성했지만, 출판은 1971년에 시비르스키 오그니에서 이루어졌다. 1971년, 슈크신은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룬 희곡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을 집필했다. 이 작품은 레닌그라드의 대극장과 마야코프스키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그는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연극이 영화보다 덜 유연하고, 더 둔탁하며, 다루기 어려운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연극은 이미 한 걸음 앞서 있었고, 영화가 아직 다루지 못한 질문들을 파고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희곡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6.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

1973년 4월, 바실리 슈크신의 이야기 '붉은 나무 딸기'가 잡지 '우리들의 현대'에 실린것을 계기로 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하려는 마음을 먹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는 이 작품을 영화화할 계획을 세웠다. 영화는 빠르게 완성되었고, 촬영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촬영은 볼로그다 지역, 특히 고대 도시 벨로제르스크 근처에서 진행되었다. 슈크신의 병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작업은 계속되었다.
"나는 건강하다. 영화를 찍고 있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 다시 내가 연기한다. 물론 힘들지만, 무게를 지려면 한 번에 다 지는 게 낫다."

영화에서 주연 여배우는 리디야 페도세예바가 맡았다. 슈크신은 병원에서 탈출해 영화의 시사회에 참석했다. '붉은 나무 딸기'는 1970년대 가장 성공적인 영화 중 하나가 되었으며, 개봉 후 6천만 명 이상의 관객이 관람했다. 이 영화는 여러 상을 받았다. 특히 바쿠에서 열린 전연방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폴란드에서 열린 바르샤바 시레나 영화제에서 외국어 영화 부문 최고상을, 유고슬라비아의 FEST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소비에트 스크린 잡지 독자들에 의한 설문조사에서는 슈크신이 이 영화로 올해의 최고 배우로 선정되었다. '붉은 나무 딸기' 개봉 직후, 슈크신은 다시 한 번 정부 영화위원회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는 스테판 라진의 봉기와 관련된 영화를 촬영하려 했다.

이 시기에 슈크신은 여전히 문학을 놓지 않았다. 그는 관점이라는 소설을 썼고, 철학적인 동화 '세 번째 수탉이 울 때까지'. '이반-두라크가 멀리 떠나 지혜를 얻는 이야기' 작업을 계속했다.

심해지는 질병에도 불구하고 슈크신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의 영화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에 출연 제안을 수락했다. 이 영화는 미하일 숄로호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슈크신은 주인공인 병사 페트르 로파힌 역을 맡았다. 촬영은 1974년 여름과 가을 동안 돈 지역에서 진행되었고, 이곳에서 슈크신은 미하일 숄로호프와 만났다. 숄로호프는 후에 이렇게 썼다.

1974년 10월까지 이제 그들은 주인공 슈크신과 함께 마지막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2.7. 갑작스러운 사망

1974년 10월 2일, 슈크신은 그날따라 이상하게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조지 버코프는 방안으로 들어왔다. 슈크신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있었다. 젊었을때의 부적절한 생활 습관으로 인해 심장이 많이 닳아 있었다. 바실리 슈크신의 장례식은 모스크바의 시네마 하우스에서 열렸다. 그는 1974년 10월 7일 수도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왔고 모두가 무덤에 붉은 가막살나무 장식을 남겼다.

3. 필모그래피

파일:영화-붉은-나무-딸기.jpg
붉은 나무 딸기 «Калина красная» (1974)
슈크신의 주요 작품중 하나, 6천만 명 이상의 시청자가 보았고 그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계기이다.
파일:1975_oni_srazhalis_za_rodinu.jpg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 «Они сражались за Родину» (1975)
4,060만 명의 시청자가 시청한 작품이다. Vasiliev 형제의 이름을 딴 RSFSR 국가상을 수상받았다.

4. 여담

  • 슈크신의 조상은 모르도비아 출신이다.
  • 소행성 2777 Shukshin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젊은 시절 그는 마을 축제에서 아코디언을 자주 연주했다.

5. 매체에서

  • 추축국이 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 노보시비시르크-알타이 연방의 시장으로 나온다. 이후 선거를 통해 노보시비르스크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으며, 러시아 통일 이후를 다룬 2차 서러시아 전쟁 모드에선 독일과의 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다시 세계 열강의 반열로 올려놓을 수 있다.

6.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