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伸 (? ~ 1453)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돈암(遯菴). 시호는 충정(忠貞).[1]1423년(세종 5) 등용되어 경기도 관찰사, 한성부 부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문종 즉위 후에는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으며, 김종서, 황보인 등과 더불어 세종의 고명대신으로 단종을 보필했으며, 당시 권력을 노렸던 수양대군의 회유를 여러차례 거절했다.
계유정난 당시에 현릉(顯陵, 조선 문종의 능)을 감독하던 중 수양대군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아들 다섯과 함께 참살당했고, 아내와 며느리 등은 1472년(성종 3) 복권될 때까지 계유정난 공신들의 노비 신세가 되었다.
이후 1781년(정조 5) 복권되었으며, 이듬해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는다.
2. 가족 관계
여흥 민씨의 시조인 민칭도의 13세손이 되며, 태종의 장인인 민제의 동생인 민개의 손자가 된다.[2]- 민칭도(시조)-민세형(2세/감찰어사)-민의(3세/호부원외랑)-민영모(4세)-민공규(5세/평장사, 정의공파 파조)-민인균(6세/삼사사)-민황(7세/이부시랑)-민종유(8세/찬성사)-민적(9세/대제학, 상호군)-민변(10세/전리판서)-민제(11세/태종의 장인, 좌의정), 민개(11세, 대사헌, 경상도관찰사, 민신의 조부) 형제[3]
- 민개 이후 가족 관계도
계유정난 당시 민신 본인과 다섯 아들 중 3명이 같은 날 참살당했고, 보석과 석이는 1년이 지난 뒤에 참살당했다. 또한 해당 문서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딸 셋도 노비로 살았다.
2.1. 후손
이렇게 보면 집안이 멸문당한 것으로 보이나 사실 민신의 아우인 민중(閔仲)과 사촌인 민건(閔騫, 1394 ~ ?)의 후손들은 남아있다.직계로만 따져보면, 계유정난 당시 아내인 단양 우씨와 맏며느리인 언양 김씨가 당시 7살이던 손자 민중건(閔仲騫, 1447 ~ ?)[7]을 항아리에 숨겨 중건의 진외가인 진도군수 안위(安位)의 집안에 맡겨 기르게 했다.
이후 중건은 성균관 유생(생원)까지 되었다고 족보에 나오며 2남 1녀를 두었는데, 그의 딸은 실록에 열녀로 기록되어 있다.[8]
이후 손자 중건이 정착한 해남 지역을 중심으로 민신의 후손들이 '여흥 민씨 충정공파'를 이루고 있으며, 후손으로는 민동석, 민병초, 민영남, 민병록, 민화식, 민두기, 민형배, 민홍철, 민병덕 등이 있다.
[1] 이하 내용은 '여흥 민씨 대종회' 인터넷 족보(권1 402쪽 1단)와 대종회 홈페이지 내용 등을 참고했다.[2] 바꿔 말하면,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는 민신의 당고모(5촌) 관계가 된다.[3] '여흥 민씨' 문서에도 나오지만, 민영모 이후 후손들이 번창했으며, 민적, 민변 대에는 재상지종에 들 정도였다. 여담으로 민변(閔忭, ?~1377)은 슬하에 민제, 민개, 민양(閔亮)과 딸 하나(곽추( 郭樞)의 처)를 두었다.[4] 원 간섭기에 도첨의정승을 지낸 권한공의 증손자로 권집중의 조부 권중달은 이색의 장인이 된다.[5]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있다가 남편과 아들들이 참살당한 후 정난공신이자 3촌 외숙인 안경손(安慶孫, 1416~1479)의 노비로 살았다.[6] 숙인(淑人)으로 있다가 시가가 멸문당하고 나서 이사철(李思哲, 1405년 ~ 1456년, 이천계의 손자)의 노비로 살았다.[7] 장남 민보창과 맏며느리 언양 김씨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민효건(閔孝騫)과 민우건(閔友騫)에 대한 정보는 없다.[8] 해당 기록에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적어도 연산군 때까지는 산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