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 |
이름 | 모아시르 바르보자 두나시멘투 Moacyr Barbosa do Nascimento |
출생 | 1921년 3월 27일/ 브라질 제1공화국 캄피나스 |
사망 | 2000년 4월 7일 (향년 79세) |
국적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키 174cm | 체중 75kg |
포지션 | 골키퍼 |
소속팀 | ADCI-SP (1940-1941) 이피랑가-SP (1942-1944) CR 바스쿠 다 가마 (1945-1955) 산타크루스 FC (1955-1957) 본수체수 (1957/임대) CR 바스쿠 다 가마 (1958~1962) 캄푸 그란지 (1962) |
국가대표 | 17경기 (브라질 / 1945~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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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로, 자신의 나라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으나 한 번의 패배 때문에 결국 마녀사냥을 당한 골키퍼로 축구 역사상 가장 불운한 골키퍼 중 한 명으로 불린다.2. 생애
2.1. 선수 시절
2.1.1. 월드컵 이전
원래 바르보자의 포지션은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였으나 이피랑가에서 골키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골키퍼로 포지션을 변경한 후, 그의 축구 인생은 완벽히 펴서 브라질의 명문 클럽 중 하나인 CR 바스쿠 다 가마에 스카우트 되었다. 그리고 당시 남미에서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날렸다.1948년 남미 챔피언스 챔피언십[2]에서 바스쿠 다 가마가 우승하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준우승팀이던 CA 리버 플레이트와의 경기에서 바르보자는 앙헬 라브루나의 페널티 킥을 막아내었고 0대0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이 무승부로 인해 리베르 플라테를 승점 1점 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그리고 이 활약으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브라질은 자국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는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에 더욱 기대감을 드높였다.
2.1.2. 월드컵 그리고 고통의 시작
"확실히 그는 브라질 축구 역사에서 가장 부당한 취급을 받은 선수이다. 그것은 훌륭한 골이었다. 기적이 행해진 것이고 오염된 볼이 그의 손을 피한 것뿐이다. 기지아의 골은 그를 저주에 빠뜨렸다..."
아르만도 노게이라
아르만도 노게이라
당시 남미 최고의 골키퍼였던 바르보자에게 최고의 시나리오는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의 우승이었다. 그는 명성에 걸맞은 활약으로 브라질의 최후방을 지켰고, 브라질은 승승장구하며 결선 리그 마지막에 다다랐다. 하지만 여기에서 바르보자는 마라카낭의 비극 때 우루과이에게 2골을 먹히는 바람에 졸지에 역적으로 몰렸다. 2골 모두 골키퍼의 실수로 들어간 골이 아니었지만, 패배는 패배였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브라질 팬들은 그 결과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바르보자는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거의 퇴출되었고, 소속팀에서만 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1953년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고 이는 그를 크게 낙담시켰다. 그 부상으로 인해 바르보자는 결국 1954년 월드컵 출전으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각오도 무산되었고 결국 CR 바스쿠 다 가마에서 밀려났다. 이때의 부상으로 바르보자는 심각한 우울증에도 빠질 뻔 했지만 그가 입원한 병원에 그를 문병하고 위로하기 위해 팬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며 심각한 위기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이후 바르보자는 이곳저곳을 떠돌다 41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2.2. 은퇴 이후
바르보자는 1963년에 마라카낭 경기장으로부터 나무로 된 골대를 선물 받았다. 그는 친구를 초대하여 그 앞에서 선물 받은 골대를 태워버렸다고 한다.또한 바르보자가 길을 걷던 중에 아이가 엄마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하자 엄마는 브라질 국민들을 절망과 불행의 늪으로 몰아넣은 자라고 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에는 어느 경기의 라디오 중계를 하려했지만 거절당했다. 1993년에는 대표팀 훈련장을 방문하려 했으나 당시 브라질 축구 연맹 회장은 팀에게 불운을 가져다준다면서 거절했다. 이는 바르보자가 죽을 때까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말년의 모습 |
바르보자는 1997년 아내를 암으로 잃었고, 2000년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생을 마감했을 때 그는 “브라질에서는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43년형 이상을 받지 않는데 나는 그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의 패배 하나 때문에 50년 넘게 죄인처럼 지내야만 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3. 플레이 스타일&평가
바르보자는 바스쿠 다 가마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칭해진다. 용감했고 위치 선정 능력이 좋았으며 페널티 킥 선방에 강점을 보였다고 한다.4. 뒷이야기
- 바르보자의 이웃들은 1950년 월드컵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큰 잔치를 벌였지만 대회가 비극으로 마무리되자 아무도 식탁에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심지어 주변의 개들까지도 식탁의 음식을 먹으려 달려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 세월이 많이 지난 후의 바르보자는 나름 마라카낭의 비극 당시를 자랑스러워하는 인터뷰도 남겼다. 브라질의 승리지상주의로 인해 다른 나라였으면 자랑스러워할 FIFA 월드컵 준우승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 미네이랑의 비극 때에도 바르보자가 소환되었다. 바르보자의 수양딸은 “저는 브라질인이고 당연히 브라질이 이기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은 다르게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아버지가 드디어 삭제되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제 생각엔 그의 영혼이 씻겨진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이 수치심이 사라지지 않네요.”라고 인터뷰했다.
5. 수상
5.1. 클럽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 6회: 1945, 1947, 1949, 1950, 1952, 1958(CR 바스쿠 다 가마)
- 남미 챔피언스 챔피언십 우승 1회: 1948(CR 바스쿠 다 가마)
-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우승 1회: 1958(CR 바스쿠 다 가마)
5.2. 국가대표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 1회: 1949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53
6. 관련 문서
- 마라카낭의 비극
-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자책골을 넣어 결국 콜롬비아의 16강 진출을 좌절시켰다는 이유로 고향 술집에서 총살당했다.[3]
- 로베르토 바조 -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때 찼던 공이 골대 위로 떠버리는 바람에 이탈리아가 준우승에 그쳐버리고 온갖 비난을 다 듣게 되었다. 이후 다음 월드컵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첫번째 키커로 나서서 골을 넣으며 설욕에 성공했지만 역시 팀의 승부차기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1] 바르보자가 죽기 전 남긴 넋두리 중 하나인데 흔히 유언으로 알려져 있다.[2]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전신 중 하나에 해당한다.[3] 이 사건으로 인해 “자살골”이라는 용어가 “자책골”로 바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