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마틴 제임스 몬티 Martin James Monti | |
출생 | 1921년 10월 24일 |
미국 미주리 세인트루이스 | |
사망 | 2000년 9월 11일 (향년 78세) |
미국 플로리다 포트로더데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마틴 몬티 주니어(부), 마리 앙투아네트 위타우프트(모), 7남매 |
종교 | 가톨릭 |
직업 | 항공기 조립공 → 군인 → 공장 노동자 |
소속 |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 무장친위대 → 미합중국 공군 |
계급 | 소위 → 하급돌격지도자 → 병장 |
서명 |
[clearfix]
1. 개요
미국, 독일의 군인. 미군들 중 나치 독일로 자발적으로 전향한 드문 사례로, 나치에 부역한 대표적인 미국인이다.2. 생애
2.1. 전쟁 이전
1921년 10월 24일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서 7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다. 출신 배경이 상당히 복잡한데, 그의 아버지는 스위스의 이탈리아어 사용 지역 출신 아버지와 이탈리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독일계 미국인이었다.다른 많은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처럼 그 또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파시즘 성향의 가톨릭 신부이며 라디오 진행자였던 찰스 코글린의 영향을 받아 파시즘, 반공주의에 물들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 코글린의 방송은 강제로 중단되었지만 그는 1942년 직접 코글린을 만나러 찾아갈 정도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입대 이전까지 몬티는 항공기 조립공으로 일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1942년 12월 19일 몬티는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했으며, 훈련을 거쳐 1944년 파일럿이 되었다.1944년 10월 13일, 몬티는 F-5E 정찰기[1] 한 대를 무단으로 탈취하여 혼자 비행해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밀라노로 날아갔다. 그는 후일 자신이 탈영한 이유가 6주나 인도의 보충대에 있으면서 지루해져서 직접 추축군과 싸우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2]
독일군에게 즉시 항복한 몬티는 잠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자신은 나치즘에 대한 신념으로 망명했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이게 받아들여져서 1944년부터 대 연합군 선전 방송에 투입된다. 그는 방송에서 마틴 로버츠(Martin Roberts), 마틴 위타우프트(Martin Wiethaupt) 등의 가명으로 활동했는데, Wiethaupt는 그의 어머니의 처녀적 성이었다. 하지만 라디오 진행 경험도 없었고 말주변도 없었던 그는 몇 번 방송을 한 후 다시 투입되지 않았다.
이후 몬티는 무장친위대의 선전 전문 부대에 입대했으며, 미군 시절 계급과 동일한 하급돌격지도자(Untersturmführer) 계급을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연합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물 전단지를 제작했다.
1945년 4월 몬티는 베를린에서 이탈리아로 이동할 것을 명령받았고, 밀라노에 도착한 후 군복에서 SS를 상징하는 부착물을 모두 제거한 후 미 육군 부대에 투항했다.
2.3. 전쟁 이후
미군에 체포되어 신원이 확인된 후, 상술한대로 그는 전투를 하지 못하니 지루해져서 독일군과 싸우기 위해 홀로 출격했다가 독일군에 의해 격추되었고, 이탈리아 빨치산에 합류해서 함께 싸웠으며 빨치산이 노획해서 쓰던 무장친위대 군복을 받아 입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이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져서 그는 나치 부역을 제외하고 탈영과 군용기 절도 혐의만 적용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감형되어 징역을 사는 대신 미국 공군[3]에 사병 계급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이렇게 그는 나치에 부역한 과거를 숨기고 살아남는 듯했다.
하지만 1948년, 전쟁 이전 미국에서 독일로 귀화하여 나치 선전 활동을 했던 에드워드 시틀러(Edward Vieth Sittler)를 비롯한 몇 명이 마틴 위타우프트와 마틴 제임스 몬티가 동일인이라고 증언하며 몬티가 나치에 부역한 사실이 밝혀진다. 1949년 몬티는 자발적으로 나치로 전향한 사실을 인정했고 성장 환경에서 극단적인 반공 사상을 주입당한 것이 원인이라며 선처를 탄원했다. 그는 징역 25년과 10000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몬티는 1960년 가석방되었다. 그는 1963년 자신이 사실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독일로 갔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그는 시급 1.5달러를 받으며 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후 별다른 활동 없이 플로리다에 조용히 살다가 2000년 9월 11일 사망했다.
3. 여담
- 몬티의 다른 형제 4명은 모두 미 해군에서 정상적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 마틴 위타우프트라는 가명으로 선전 방송을 하던 시절, 같은 미국 국적으로 나치 선전 방송을 한 밀드레드 질라스, 통칭 추축군 샐리(Axis Sally)와 만났다. 밀드레드는 초면부터 몬티를 매우 싫어했으며, 몬티와 함께 방송하기를 거부했고 몬티를 내보내지 않으면 방송을 관두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