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존 듀란트 Michael John Durant | |
출생 | 1961년 7월 23일 ([age(1961-07-23)]세) |
미국 뉴햄프셔주 벌린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복무 기간 | 1979~2001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준위 |
학력 | 엠브리-리들 항공대학교 |
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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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이다.2. 생애
1979년 입대했고 파나마 침공당시 참전 경력이 있다. 이후 헬기 조종과정을 수료해 헬기 조종사로 전환했다.이후 서울, 켄터키에서 근무하다가 걸프 전쟁 당시 사막의 폭풍작전에 참가했다. 1993년 모가디슈 전투에서 모가디슈 시내 중앙에서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RPG에 맞고 격추되었다. 듀란트를 제외한 인원은 모두 전사했고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게리 고든, 랜디 슈가트가 구출하러 왔으나 머릿수를 극복하지 못하고 모두 전사했고 듀란트는 포로가 되었다.
당시 대사였던 로버트 오클리의 도움으로 11일 후 석방되어 미군으로 인도되었고 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이때의 후유증으로 듀란트는 슈가트와 고든의 유족에게 지속적으로 사과했다.
2001년 퇴역했으며 조용히 살아가다가 책을 쓰기도 했고 정치계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리고 오사마 빈 라덴사살 작전인 넵튠 스피어 작전에 민간인 자문가 자격으로 참가했다. 이 때 듀란트는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전안 중 헬리콥터로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사살하는 작전안에 강하게 반대하고 대신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이나 스텔스 폭격기를 이용한 공중 공격을 주장했다. 이는 사태의 악화시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도록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인상을 남겼고, 이는 오바마 대통령이 다른 장성들도 생각 못한 '예비 헬기'의 추가 투입을 이끌어 냈다. 실제로 넵튠 스피어 작전 때 이 예비기의 투입이 큰 역할이 되었다.자세한 내용은 넵튠 스피어 작전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