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9 22:11:13

마누일 칸타쿠지노스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칸타쿠지노스 왕조 팔레올로고스 왕조
1349년~1380년 1380년~1383년 1383년 1383년~1407년 1407년~1428년
마누일 칸타쿠지노스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팔레올로고스 왕조
1428년~1443년 1443년~1449년 1449년~1460년 1460년~1465년 1465년~1502년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 }}}}}}}}}}}}}}}

이름 마누일 칸타쿠지노스
(영어: Manuel Kantakouzenos, 그리스어: Μανουήλ Καντακουζηνός)
출생 1326년
사망 1380년
직위 모레아 전제군주국데스포티스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모레아 전제군주국 칸타쿠지노스 왕조 초대 데스포티스.

2. 생애

1326년요안니스 6세이리니 아사니나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 마테오스, 동생 안드로니코스 칸타쿠지노스, 마리아 칸타쿠지니, 테오도라 칸타쿠지니, 엘레니 칸타쿠지니가 있었다. 1341년부터 사보이아의 안나가 이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에 대항하여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을 일으킨 요안니스 6세는 세르비아 군주 스테판 두샨과 동맹을 맺기로 하고, 1342년경 마누일을 세르비아 궁정에 인질로 보냈다. 1343년 4월 베로이아가 요안니스 6세의 수중으로 들어간 뒤, 그는 부친에 의해 베로이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345년 6월 테살로니키로 군대를 파견하여 그곳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부친에게 우호적인 총독이 선출되게 하였다. 그러나 1347년 스테판 두샨이 태도를 바꿔 베로이라를 공격했고, 그는 도시를 탈출한 뒤 테살리아에서 부친과 합류했다.

1347년 5월 부친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야 소피아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황제로 인정받은 뒤, 그는 데스포티스의 칭호를 받았다. 1348년 부친과 형 마테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잠시 떠났을 때 그들을 대신해 수도를 경비하였고, 갈라타제노바 해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자 1년간 항전한 끝에 격퇴했다. 요안니스 6세는 차남의 탁월한 행정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보내 새 정부를 수립하게 하였다. 1349년 10월 25일 그곳에 도착한 그는 모레아 전제군주국데스포티스로 취임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오랜 내전과 외세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진해졌고 중앙 정부의 통제가 지방에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지역에 책임자를 세우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금을 보내는 대가로 자율적으로 통치하게 했는데, 모레아 전제군주국도 그중 하나였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칸타쿠지노스 가문의 영지였기 때문에, 요안니스 6세는 자기 아들을 그곳의 책임자로 삼아 관리하게 했다.

1354년 말, 요안니스 5세가 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에서 승리하여 요안니스 6세를 퇴위시켰다. 그는 여세를 몰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관료들에게 사람을 보내 마누일을 축출하고 자신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마누일이 선정을 베푸는 것에 만족한 그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마누일은 형 트라키아에서 할거하는 형 마테오스와 연합하여 요안니스 5세에 맞섰다. 하지만 마테오스가 1356년 말 또는 1357년 초 세르비아군에게 붙잡힌 뒤 요안니스 5세에 보내진 후 퇴위하기로 결정하자, 그는 이에 따라 요안니스 5세를 유일한 황제로 인정했다. 한편, 그는 펠로폰네소스의 라틴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오스만 베이국의 위협에 맞서 그들과 군사 동맹을 맺었다. 1362년에서 1363년 사이에 아카이아 공국과 연합하여 메가레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물리쳤다.

1364년 아카이아 공작 로베르가 후계자 없이 죽자, 로베르의 미망인인 마리 드 부르봉은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위그 드 루지냥을 공작에 앉히려 했다. 그러나 로베르의 동생 필리프 2세는 자신이야말로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누일은 마리와 위그의 편을 들었고, 2년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라틴 도시들을 공략했다. 하지만 아카이아 공국 귀족들은 필리프 2세를 지지했고, 1370년 3월 양측이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위그는 공작위를 포기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받기로 했다.

1374년에서 1376년 사이, 한 라틴 영주가 가르디키(Gardiki) 시를 침략하자, 주민들은 마누일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마누일은 소규모 병력을 보내줬지만 라틴군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라틴군은 도시 함락에 실패하고 돌아갔다. 한편, 그는 퇴위한 뒤 수도자로서 살아가던 부친과 함께 그레고리오 11세 교황과의 협상에서 가톨릭정교회의 통합 문제를 논의했다.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베이국의 침략에 대항하려면 가톨릭 세력의 지원이 절실했다. 그러나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제국은 홀로 오스만 세력에 대항해야 했다.

1380년 4월 10일 미스트라스에서 사망하였고, 형 마테오스가 뒤를 이어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