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7-10 20:06:08

루시안(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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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그림자 사냥꾼3. 집으로4. 변함없는 마음5. 하이 눈 스킨 세계관
5.1. 그림자 사나이
6. 펄스 건 스킨 세계관
6.1. 시간을 거슬러
7. 구 배경
7.1. 단문 배경7.2. 장문 배경

1. 장문 배경

루시안이 어릴 때부터 품었던 소망은 단 한 가지, 아버지 유리아스처럼 빛의 감시단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유리아스는 검은 안개의 망령들로부터 살아 있는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루시안을 데마시아의 집에 남겨두고 머나먼 땅을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유리아스는 집에 있을 때면 아들 루시안에게 갖가지 모험담을 원 없이 들려주었다. 용기와 기발한 머리로 역경을 헤쳐나가는 이야기들. 루시안은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낱말 하나하나를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고,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룬테라 사람들을 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하지만 유리아스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택한 이 위험한 삶이 가족에게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루시안은 언젠가는 아버지 곁에서 수습생이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대신 루시안은 데마시아에 살면서 점점 더 데마시아라는 왕국의 문화에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루시안의 마음을 특히 괴롭혔던 사실은, 데마시아가 평화롭게 살고 있던 마법사들을 황량한 오지로 추방해 버리는 것이었다. 루시안은 추방당하는 마법사들의 위험한 여정을 지켜주었고, 그 일에서 뿌듯함을 느꼈다. 다른 데마시아인들은 마법사들을 추방해야 마땅한 사람들이자 선한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는 존재로 보았지만,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을 접한 루시안에게는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만 보였다.

그런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루시안의 집 앞에 낯선 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빛의 감시자 세나라고 소개했다. 손에는 유리아스가 남긴 권총을 고이 들고 있었다. 세나는 루시안의 아버지가 오래 전에 죽은 검은 안개의 망령들과 싸우다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세나는 유리아스의 수습생으로 오랫동안 곁에서 함께 싸웠다고 했다.

루시안은 몸과 마음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도 소식이었지만, 눈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삶을 살았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세나가 떠나려 할 때, 루시안은 그녀를 멈춰세우고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루시안은 자신이 이제부터 할 일이 사망한 파수꾼을 위한 철야 추모제에 동참하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세나는 주저하다가 루시안의 동행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길을 가면서 각자 유리아스와 보냈던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세나는 꾸밈없고 솔직한 경험담으로 루시안에게 위안을 주었고, 루시안은 애정 어린 추억담으로 세나의 슬픔을 덜어주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데마시아 땅에서 멀리 떨어진 유리아스의 출생지에 도착했고, 사망한 파수꾼을 위한 철야 추모제를 올렸다.

추모제를 마친 루시안과 세나가 자리를 뜨려 할 때, 해안으로 어두컴컴한 구름이 밀려들어오더니 그 안에서 망령들이 튀어나와 두 사람을 습격했다. 루시안은 두려움에 온몸이 굳었으나, 세나는 별반 동요 없이 총을 뽑았다. 그런 광경에 익숙해진 것은 세나의 삶에 내려진 음울한 저주 때문이었다. 세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디를 가나 검은 안개의 촉수가 따라다녔고, 어디에서든 오래 머물기만 하면 그 참혹한 공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식이었다.

세나에게 덤벼든 망령이 세나의 손에서 유리아스의 권총을 낚아채 떨어뜨렸다. 루시안은 얼른 아버지의 권총을 집어들었다. 순간 눈앞에 자신의 운명이 펼쳐졌다. 가슴에 품었던 슬픔이 불꽃처럼 뿜어져나와 한 줄기 빛이 되었고, 권총을 통해 발사되어 망령의 시선을 끌었다. 덕분에 세나는 놈을 처치할 수 있었다. 세나는 남은 망령들을 물리쳤고, 두 사람은 무사히 그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검은 안개는 여전히 그녀의 자취를 추적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정식으로 훈련을 받지 않고 빛의 감시자의 유물 총를 발사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루시안은 처음으로 세나에게 자신이 빛의 감시단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 셈이었다.

결국 세나는 루시안에게 유리아스의 권총을 넘겨주었고, 빛의 감시자로서 익혀야 할 각종 전술과 신조를 가르쳐 주었다. 루시안은 배운 것을 고스란히 체득했다. 둘 사이에는 느리나마 연대감이 형성되었다. 루시안의 따뜻한 성격과 남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은 세나의 절제력이나 불굴의 결의와 더할 나위 없는 균형을 이루었다.

루시안과 세나는 검은 안개에서 쏟아져나오는 사악한 존재들을 수도 없이 물리쳤고, 그러면서 서로를 의지하는 마음은 사랑으로 발전했다. 루시안은 세나가 가진 능력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세나가 짊어진 저주도 점점 더 자주 목격했다. 전투를 치를 때마다 루시안은 강해졌고, 세상을 빛과 그림자, 선과 악으로 나누게 되었다. 그는 세나를 치유해 주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점점 더 무모한 열정을 지닌 십자군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어느 날, 치료법을 찾느라 오래 전에 잊혀진 어느 지하 창고를 뒤지던 두 사람은 쓰레쉬라는 무시무시한 망령의 습격을 받았다. 악귀처럼 잔혹한 ‘지옥의 간수’ 쓰레쉬는 위험천만한 적수였다. 세나는 일단 물러난 다음 태세를 가다듬자고 말했지만, 루시안은 후퇴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하지만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든 루시안을 쓰레쉬는 가볍게 제압했고, 그 순간 루시안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때 세나가 돌진하는 쓰레쉬를 가로막으며 루시안에게 도망치라고 외쳤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세나는 시신이 되어 루시안의 발밑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쓰레쉬가 들고 다니는 섬뜩한 랜턴 안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세나의 희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그 이후 루시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전까지의 루시안과는 껍데기만 닮았을 뿐, 그 속에는 오직 분노와 비통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권총과 세나의 권총을 휘두르며, 루시안은 쓰레쉬를 찾아 몇 년이나 룬테라를 떠돌아다녔다. 쓰레쉬의 랜턴을 부수고 그 속에 갇혀 고통받는 연인에게 안식을 선사하겠다는 희망에서였다. 마침내 희망을 실현할 날이 왔고, 루시안은 랜턴을 산산조각냈다. 하지만 세나는 영원한 안식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났다.

루시안과 세나의 사랑은 죽음조차도 갈라놓지 못할 만큼 끈끈하다. 루시안은 이전과 달라진 세나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면서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전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편,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어둠의 힘 덕분에 세나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심하고 있다.

세나는 새로운 사명을 품고 돌아왔지만, 루시안은 여전히 쓰레쉬를 찾아 제대로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지옥의 간수’ 쓰레쉬의 교묘한 책략이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2. 그림자 사냥꾼

파일:루시안 소설.jpg

그것들은 흐릿한 그림자 속에서 실체가 없는 발톱과 고대의 녹슨 검을 세우며 루시안에게 달려들었다. 빠른 움직임이었지만… 루시안은 더 빨랐다.

루시안은 몸을 돌리고 회전하며 마치 무용수처럼 움직였다. 그가 손에 쥔 유물 총은 강렬하고 신비로운 빛으로 여관의 썩어가는 내부를 환하게 비췄다.

루시안은 사방에서 미친 듯이 가해지는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긴 가죽 코트와 단단히 땋은 머리카락이 몸에 휘감겼다. 총을 쏠 때마다 태양만큼 강렬하게 타오르는 총알이 날카롭게 소리 지르는 영혼들을 형체 없는 어둠 속으로 되돌려 보냈다.

루시안은 더 이상 이 일에 만족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를 빼앗긴 후 루시안의 세상에서 모든 빛이 사라졌다.

검은 발톱이 한쪽 팔뚝을 할퀴자 루시안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잠시 방심한 것을 자책한 그는 팔을 할퀸 영혼의 머리에 빛을 폭발시킨 후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 여관 한 가운데 우뚝 선 루시안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망령의 물결에 총격을 가했다. 총이 발사될 때마다 어둠이 환하게 빛났다.

마침내 그는 혼자가 되었다. 두 팔을 활짝 벌려 무기를 양옆으로 겨눈 채였다. 돌로 만들어진 총구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루시안은 공격에 대비하듯 좌우를 훑었다. 여관의 난롯불이 더 밝게 타오르며 짙은 그림자를 몰아내는 듯했고, 시린 냉기가 물러갔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낀 루시안은 쓰러진 의자를 바로 세우고 앉아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총을 탁자에 올려놓은 후 상처로 시선을 돌렸다.

루시안은 움찔거리며 왼손에서 검은색 긴 장갑을 벗겨 냈다. 장갑은 멀쩡했지만 팔뚝은 형체 없는 발톱에 베여 검게 변했다. 마치 동상에 걸린 것 같았다.

곁눈으로 순간적인 움직임을 감지한 루시안은 즉시 일어나 두 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그 앞에는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검은 머리의 소녀가 서 있었다. 뒤쪽 창고에 숨어 있던 것이었다.

소녀는 얼어붙은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루시안을 올려다봤다.

"제발요." 소녀가 속삭였다. "쏘지 마세요."

"기척은 내야지." 루시안이 총을 내리며 말했다.

돌아서려던 그는 소녀의 눈에 비친 그림자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는 몸을 돌려 총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느렸다.

희미해지는 어둠 속에서 수의를 입은 듯한 앙상한 무형체의 무언가가 튀어 나왔다. 그것의 눈구멍과 크게 벌어진 입에서 부연 청록빛이 흘러나왔다. 망령은 단도만큼 긴 발톱을 루시안에게 휘둘렀다.

그 충격으로 루시안은 카운터 위를 넘어 멀리 날아갔다. 벽에 부딪히자 선반에 진열되어 있던 빈 술병 수십 개가 깨졌고, 그는 쏟아지는 유리 파편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망령이 공격한 가슴이 화끈거렸다. 시린 냉기가 심장을 감싸 호흡할 때마다 숨이 차올랐다.

그는 다급하게 무기를 찾았다. 총 한 자루는 왼쪽으로 열 걸음 떨어져 있는 거친 바닥에 놓여 있었다. 너무 멀었다. 다른 한 자루는 빙글빙글 돌며 마루를 가로지른 후 소녀의 발치에 멈췄다.

총을 집어 든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움켜쥔 채 망령을 향해 겨눴다. 망령이 믿을 수 없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안 쏴져요!" 소녀가 뒷걸음질하며 울부짖었다. "방아쇠가 없어요!"

갑작스럽게 울려오는 한 기억이 루시안의 마음을 후볐다.
"어떻게 쏘는 거야?" 루시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무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방아쇠가 없잖아."

"방아쇠는 필요 없어, 내 사랑." 세나가 즐거운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녀는 루시안의 옆머리를 가볍게 만졌다. "방아쇠는 여기에 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루시안이 말했다.

세나가 루시안이 든 것과 비슷하지만 더 우아한 자신의 무기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표적을 향해 겨눴다. 세나의 표정이 굳어지며 눈이 가늘어졌다. "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해." 세나의 말과 함께 표적이 타는 듯한 노란 불꽃에 휩싸여 폭발했다.

"좋아. 쏘려는 의지 말이지." 루시안이 다음 표적에 총을 겨누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총을 흔들며 좌절과 당혹이 뒤섞인 콧방귀를 뀌었다.

"마음을 제어하고 집중해. 정신줄 놓지 말고 쏘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해."

루시안은 웃음을 터뜨리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세나에게 몸을 돌렸다. "정신줄?"

"다시 해 봐!" 세나가 재촉했다.

루시안은 집중하려 했지만, 금세 입꼬리가 올라가 미소가 지어졌다. "관둘래." 그는 한숨을 쉬고는 세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당신이 옆에 있는데 어떻게 다른 일에 집중하라는 거야?"

세나는 웃으며 루시안을 밀어냈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하지 마. 다시. 이번에는 제대로 해 봐."
소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손에 들린 날렵한 세나의 총은 그녀에게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물건이었다.

"이리 던져!" 루시안이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영혼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비명을 지른 소녀는 총을 루시안 쪽으로 던졌다. 총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아 망령을 곧장 통과했다. 루시안은 짧게 질주해 능숙하게 총을 잡음과 동시에 무릎을 꿇고 마루를 미끄러지듯 가로질러 다른 총을 집어 들었다. 두 총을 모두 준비하고 일어난 그는 총격을 개시했다.

망령이 비명을 지르며 루시안을 피해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끈질겼다. 그는 양옆으로 질주하며 끊임없이 총격을 퍼부었다. 맹렬한 빛이 섬뜩한 유령을 뚫고 지나가자 떠오르는 태양 아래의 안개처럼 검은 형체가 소멸하며 애처로운 비명을 흘렸다.

루시안은 총을 그대로 든 채 멈춰 섰다. 다시 한번 모든 게 고요해졌다.

"사라진… 건가요?" 소녀가 말했다.

루시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가늘어진 그의 눈이 사방을 훑었다. 마침내 그는 총을 집어넣었다. "사라졌어. 이제 안전하다."

"쏘… 쏠 수가 없었어요." 소녀는 어둠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도 죽는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처럼요."

루시안은 세나의 총을 처음 다뤘을 때의 어려움을 떠올렸다. 정말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제어하고 집중해.

"이젠 할 수 있어, 세나." 루시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셨어요?" 소녀가 물었다.

"아니야." 루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사슬이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근처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저 소리 들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안 들려요."

루시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놈이 아직도 나를 조롱하는군…"

멀리서 들려오는 저 고통스러운 소리를 뒤쫓아야만 하는 그는 여관을 떠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문을 걸어 잠가." 루시안이 지시했다. "그리고 동이 트길 기도해라."

3. 집으로

파일:루시안 집으로.jpg

루시안은 거대한 바니안나무 아래 언덕에 앉아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손에 감싸 쥔 유물 총의 청동 총신을 매만졌다. 검은 안개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푸른 저지대로 스며들었다. 섬에는 몇 시간 전 해로윙이 찾아온 상태였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횃불의 불빛이 움직였다. 사방에서 안개가 구름처럼 떠다녔다. 불빛이 하나둘씩 사그라들어 없어졌다. 죽음의 비명을 전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하지만 하나의 불빛만은 굳게 불타고 있었다. 창백한 녹색 빛이 아무렇지 않은 듯 검은 안개 속을 유유히 떠다녔다. 사악한 망령의 타락한 불꽃이었다. 루시안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가 끓었다.

루시안은 성긴 자갈에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언덕을 달려 내려가 분지에 도달했다. 수풀 속에 시신이 한 구 누워 있었다. 양팔로 어깨를 감싼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검은 대리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어두운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는 시신을 뒤로하고 추적을 계속했다.

루시안은 다섯 번째 시신에 도달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노인의 얼굴은 엄청난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다. 갈가리 찢긴 옷 사이로 심한 상처가 보였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낫에 당한 상처가 분명했다.

루시안은 방향을 돌려 늘어선 시신을 따라 가파른 경사면 아래에 도달했다. 그는 우거진 덤불을 헤치며 언덕을 기어올랐다. 외딴 언덕의 정상에 오르기 직전, 비명이 들려 왔다.

넓은 공터에 검은 안개가 쏟아지고 있었다. 안개가 일렁이며 움직이는 가운데, 뿌연 시야 속에서 뒤틀린 형체들이 보였다. 공포에 찬 섬사람 한 무리가 탈출의 희망을 품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의 바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맹렬한 그림자가 가엾은 영혼들을 덮쳤다. 불길한 포효에 죽어 가는 사람들의 절규가 뒤섞였다.

그는 밀려오는 형상에 총을 겨눴다. 안개 속에서 울부짖는 망령 무리가 튀어나와 유령 칼날과 송곳니로 가득한 이빨을 보이며 그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정화의 빛을 발사해 저주받은 망령들을 태웠다. 그 여파로 한 걸음 밀려나자, 발밑에 절벽의 가장자리가 닿았다. 그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폭풍우에 흔들리는 파도가 바위로 가득한 해안에 부딪히고 있었다.

수많은 영혼들의 절규를 뚫고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뒤로 돌아 점점 다가오는 안개에 무기를 겨눴다. 매서운 안개 속에서 익숙한 빛이 반짝였다.

루시안은 총 하나를 거두고 가죽 코트 안으로 손을 넣어 점토 수류탄을 꺼냈다. 주먹만 한 수류탄의 거친 표면에는 품질 보증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빌지워터의 늙은 대장장이 말이 맞는지 시험해 볼 시간이었다.

수류탄은 넓은 원호를 그리며 날아갔다. 고도가 최고에 달했을 때, 그는 총을 발사했다. 수류탄은 은빛 먼지구름을 남기며 폭발했다. 먼지는 소용돌이치며 공중에 떠 있었다. 치명적인 안개 속에 고요한 빛의 공간이 생겨 검은 안개를 몰아냈다.

쓰레쉬는 공터에서 젊은 여자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사슬 달린 갈고리가 영혼을 끄집어내자, 여자는 고통스레 몸을 비틀었다. 쓰레쉬는 랜턴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자 그것을 들어 올렸다. 생명이 빠져나간 여자의 몸이 쓰러졌고, 유물은 새로운 죄수를 가두었다.

쓰레쉬는 루시안을 향해 돌아서며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그림자를 사냥하는 자여, 헬리아의 모두가 널 그리워하고 있다. 패배하는 게 싫어졌나 걱정하고 있었지."

쓰레쉬가 랜턴을 두드렸다. 그의 부름에 답하듯, 랜턴이 빛났다.

"네 등장에 그녀의 영혼이 밝아지는군. 희망은 고통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주지."

루시안의 시선이 랜턴으로 향했다. 철제 감옥에서 나오는 보호의 빛 속에 은빛 먼지가 떠다녔다. 그는 총을 손에 쥐고 때를 기다렸다.

"실패하면 큰 대가가 따를 텐데. 그녀의 고통이 훨씬 더 달콤해지지. 바위에 부딪힌 아이처럼, 모든 희망이 산산이 조각나니까." 쓰레쉬가 웃었다.

루시안의 머릿속에 지난번 싸움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 알고 있나? 모든 것의 종말이 다가올 때까지 너와 함께 고통받는 거야."

랜턴에서 나오는 희끄무레한 녹색 빛이 작아지며 일렁였다. 루시안은 그녀가 손을 뻗어 영혼과 기억으로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한 포옹을 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루시안…

그녀의 목소리에 루시안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쓰레쉬의 말이 맞았다. 세나는 그가 다가올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만남을 거듭할수록, 지옥의 간수가 가하는 고문에 저항하듯 교감할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났다. 두 사람은 루시안이 섬에 들어온 순간부터 서로를 느낄 수 있었다.

쓰레쉬가 잡아채자 랜턴이 흔들렸다. 밝은 빛이 랜턴 속에서 작아졌다 커지며 소용돌이쳤다. 쓰레쉬는 그 소란을 잠시 쳐다보곤 조소할 뿐이었다. 루시안은 랜턴 속의 폭풍에 총을 겨누었다. 랜턴에서 나오는 보호의 빛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내 사랑…

루시안은 총을 발사했다.

꿰뚫는 빛이 보호막을 태우고 철제 유물을 강타했다. 랜턴이 사슬 끝에서 세차게 흔들렸다. 정화의 불이 고대 영혼 감옥을 맞힌 것은 처음이었다.

쓰레쉬가 분노에 차 울부짖으며 랜턴을 휘둘렀다.

랜턴 속에서 사악한 검은 안개가 덩굴처럼 뻗어 나와 빛의 소용돌이를 압도했다. 격렬한 그림자는 탈출하기 위해 애쓰는 수많은 영혼들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집어삼켰다. 어둠이 랜턴 안에 퍼지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안 돼! 그녀를 풀어 줘!" 루시안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고통에 찬 세나의 비명을 들으며 쓰레쉬는 잔혹하게 비웃었다.

루시안의 총이 쓰레쉬를 향했다. 그는 모든 분노를 총에 실어 마구 난사했다.

총알은 쓰레쉬를 집어삼켜 그의 망령 형상을 정화의 불꽃으로 태웠다. 루시안은 앞으로 돌진해 다시 한번 난사했지만, 랜턴에서 나오는 어둠의 보호막에 막혔다.

쓰레쉬를 태우던 불꽃은 어둠의 힘에 의해 사그라들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랜턴을 미끼처럼 들어 올려 보였다.

루시안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랜턴의 보호막을 뚫은 총알이 소용없던 것이다. 사방에서 떠다니던 은이 땅으로 떨어졌다. 검은 안개의 덩굴이 수류탄에 의해 생긴 보호 공간으로 스며들어 틈이 메워지기 시작했다. 때는 지나갔다.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물러나 총을 들어 올린 후 앞으로 돌진했다.

흐릿한 물체가 채찍처럼 튀어나와 루시안을 가격했다. 사슬에 달린 갈고리에 맞은 그는 공터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땅에 떨어진 그는 단단한 자갈 위를 구르다 정신을 잃었다. 파도가 밀려와 그의 몸을 덮쳤다.
처음은 웃음으로 시작된다… 돌바닥 위에 쇠사슬이 끌린다… 짙은 안개 속에서 소리가 울려 온다… 그의 반응은 언제나 한발 늦는다… 총을 꺼내 들어 빛을 마주한다… 불꽃은 나오지 않는다… 그에겐 승산이 없다… 그녀가 눈앞에 서 있다… 그와 갈고리 사이에…

그녀의 눈에 혼란이 서린다… 잉크처럼 검은 눈동자… 그녀가 비명을 지른다… 몸 전체가 뒤틀린다… 땅으로 쓰러진다… 생기가 빠져나간다… 머릿속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린다… 그에게 도망치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루시안은 벌떡 일어나 옆구리를 쥐었다. 갈비뼈 사이가 아팠다. 그는 간이침대 위로 다시 누우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나무 기둥과 회벽 천장을 응시하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걸까 궁금해했다.

세나의 비명이 머릿속에 울렸다. 또다시 그녀를 실망시켰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는 갈비뼈 주위에 단단히 감긴 붕대 아래에 검붉은 멍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처 주변에 손을 대니 통증이 밀려왔다.

가슴에는 약을 잔뜩 바른 나뭇잎이 올려져 있었다. 축축한 잎을 벗겨 내니 사슬 갈고리가 스치고 지나간 검은 상처가 드러났다.

그는 옆으로 돌아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일어나 앉았다. 햇빛이 창문 가림막 사이로 들어와 어두운 방 한구석에 있는 큰 나무 상자를 비췄다. 상자 위에는 살짝 시든 꽃과 석고 거북이 조각이 있는 제단이 차려져 있었다. 그의 가죽 코트와 조끼는 간이침대 옆의 작은 탁자 위에 개켜져 있었다. 옷 위에는 유물 총이 있었다.

루시안은 총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과거에 세나가 가르쳐 준 대로, 석조 총신과 청동 장식이 있는 그녀의 총을 먼저 살펴보았다. 총신에 새겨진 깊은 홈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아이오니아에서 그녀와 함께했을 때의 추억이었다. 그는 미소를 짓고 이어서 자신의 총을 살피기 시작했다. 금속 총신을 누르자 살짝 휘는 것이 느껴졌다. 새로 생긴 결함을 곧 수리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신음을 내며 일어서 무기를 집어넣었다. 그리곤 손잡이에 손을 올려 높이와 각도를 점검했다. 위치가 약간 어긋나 있었다. 그는 각도를 조정하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곤 만족한 얼굴로 조끼를 집어 들어 조심스레 팔을 넣고, 같은 방법으로 긴 프록코트를 입었다.

그는 창문으로 가서 나무로 된 가림막을 열었다. 희미하고 부드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햇빛이 들어왔다. 좁은 각도 때문에 구불구불한 시냇물과 식물 덤불만이 보였다. 해로윙이 끝나 아침이 되어 있었다.

쓰레쉬는 이미 멀리 도망쳤을 것이다.

다시 배를 타고 추적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본 뒤 문으로 향했다.

집 밖에는 십여 구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젊은 여자가 그 사이에 앉아 수건으로 한 노인의 몸을 조심스레 닦고 있었다. 그녀는 아몬드 모양의 부어오른 눈으로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일어나면 안 돼요."

"난 괜찮아. 네가 날 치료해 준 거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미라예요. 절벽 후미 근처에서 당신을 발견했어요."

"그게 언제였지?"

"동이 튼 직후였어요. 아버지를 찾던 중이었죠."

그는 미라의 발치에 있는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살짝 낙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분이 아니에요. 나가서 수색을 계속해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하네요."

그녀는 새 수건을 집어 들었다. "몸이 괜찮아졌다면, 도와주셨으면 좋겠는데."

루시안은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막 따온 나뭇잎 위에 누워 있었는데, 아직 눈을 뜨고 있는 자도 있었다. 반짝이는 대리석처럼 검은 눈이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돌아섰다. "그건 가족이 할 일이야."

그녀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마을 반대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황소가 이끄는 수레에 더 많은 시신이 실려 온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미라는 그 광경을 잠시 응시하다가 서둘러 나섰다.

마을 곳곳에서 주민들이 모여드는 동안, 루시안은 멀찌감치 떨어져 미라를 따라갔다. 사람들은 제각각의 속도로 자갈길을 따라 움직였다. 일부는 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생존자 무리가 한 젊은 남자를 중심으로 모여 섰다. 그는 육중한 지팡이를 들고 한 마디씩 끊어 말하기 시작했다. "이럴 수는 없어요! 놈들은 그럴 자격이 없단 말입니다!" 그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미라가 물었다.

"낙투족이 시신을 태우고 있어요!"

군중이 분노로 술렁이며 젊은 남자에게 동조했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슬픔에 차 주저앉았다.

"낙투족?" 루시안이 물었다.

"화염 숭배자들이에요. 섬 서쪽 끝에 사는 자들이죠." 미라가 말했다.

"놈들이 그녀의 영혼을 태워 버릴 거야. 선조들에게 가지 못하게 할 셈이야." 나이 든 남자가 울부짖었다. 루시안은 미라의 눈에 두려움이 서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수레로 달려가더니, 시신 더미를 서둘러 살피기 시작했다. 시신 중에는 나이 든 여성이 몇 명 있었지만, 대부분은 젊은 남자와 어린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없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물러났다.

늙은 남자는 흐느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라가 팔을 뻗어 그를 안아 주었다. 그녀가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자, 남자는 마음이 진정된 듯했다.

그녀가 마을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주민들을 찾아야 해요. 더 살필 만한 곳이 있나요?"

사람들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여러 제안이 나왔지만, 모두 반대 의견이 있었다. 실종자 수에 비해 생존자가 너무 적었다. 미라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침묵했다.

루시안이 앞으로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어."
외딴 언덕은 대낮의 햇살 아래 고요히 서 있었다. 사나운 폭풍이 지나간 후였다. 남은 것이라곤 마른 버드나무와 수풀 사이에 널브러진 시신뿐이었다.

미라와 마을 사람들은 절벽을 가로질러 망자들 사이를 걸었다. 사람들은 곧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들의 시신을 찾아갔다. 지팡이를 든 젊은 남자는 자갈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여자의 시신 앞에 주저앉았다. 분노는 슬픔으로 바뀌어 있었다.

루시안은 미라에게 주의를 돌렸다. 그녀는 나이 든 여자의 시신 앞에 웅크리고 그녀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기도문일지도 모른다. 루시안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여기 없어요."

그는 시신으로 가득한 눈앞의 풍경을 응시했다. 가슴속이 아려 왔다. 세나라면 주민들을 구했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시도라도 했을 것이다. 그녀는 너무 다정한 사람이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으니까.

미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분을 집에 모셔다드려야겠어요."

루시안은 팔을 뻗어 노인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팔에 안은 그녀는 쇠약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는 시신을 수레로 옮겨 나뭇잎이 깔린 나무판자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는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다른 이들을 도우러 갔다.

그들은 정오가 지날 때까지 시신을 옮겼다. 수레에 시신이 어찌나 많이 담겼는지 수레 밖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루시안과 미라가 마지막 시신을 싣자, 마을 사람들이 줄로 단단히 고정했다.

루시안은 물러서서 옆구리를 매만졌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등으로 번지고 있었다. 너무 무리한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해도. 지친 그는 절벽 가장자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뜨거워 땀이 흘렀다.

"갈비뼈는 어때요?"

"괜찮아."

미라가 그의 옆에 앉아 물병을 건넸다.

"얼마 안 남았군." 루시안이 무게를 가늠해 보며 말했다.

"당신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는 물병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길고 두꺼운 코트를 벗었다. 바닷바람이 피부를 식혔다. 그는 물을 천천히 마신 후 빈 물병의 뚜껑을 닫았다.

미라는 오랫동안 바다를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바다거북 무리가 공기를 마시러 수면으로 올라왔다 다시 가라앉았다.

"직접 보셨나요?"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끝나 있었어."

미라는 루시안의 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본 적이 있죠?"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버지를 찾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미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루시안은 절벽 아래에서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파도가 칠 때마다 물이 차올랐다 빠졌다. 곧 만조가 절정에 달할 테니,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미라에게 물통을 건네준 후 다시 일어서 코트를 입었다.

"부두로 가는 지름길은 어디지?"

언덕의 서쪽 면을 가리키려 돌아선 미라는 남자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들이 밧줄로 흑요석을 감은 나무 철퇴를 들고 있는 사제를 따라오고 있었다.

"여기 계세요."

루시안은 아무 말 없이 몇 걸음 떨어져서 그녀를 따라갔다.

지팡이를 든 젊은 남자가 걸어 나와 그들을 맞았다. 몇몇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와 그들의 앞을 막았다.

"강의 '동쪽'은 우리 땅이야." 남자가 말했다.

"망자들을 위해 길을 밝히러 왔소." 사제가 말했다.

"그건 우리 전통이 아니에요." 미라가 무리에 다가서며 말했다.

사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망자들이 깨어나면 자네가 싸울 생각이오?"

젊은 남자가 지팡이를 꽉 쥐며 내뱉듯 말했다. "내 아내를 태우는 걸 보고만 있을 줄 알아?"

사제가 그를 노려보더니 무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루시안은 사제의 손끝이 철퇴를 가볍게 스치는 것을 보았다. 어서 싸우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망이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루시안이 앞으로 나섰다. "망자들은 깨어나지 않을 거야. 시신을 제대로 수습한다면 말이지."

사제가 루시안에게 시선을 돌려 그를 자세히 뜯어 보기 시작했다.

루시안 역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곤, 순식간에 자세를 바꾸어 가죽 코트를 열고 총을 거머쥐었다.

사제는 유물 총을 힐끗 보더니 다시 루시안의 눈을 응시했다.

루시안은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그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미라가 팔을 뻗으며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만둬요. 이미 충분히 고통받고 있잖아요."

미라가 낙투족 사제가 이끄는 무리 쪽으로 돌아섰다. "한 섬에서 두 부족이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잖아요. 우린 우리 부족 사람들을 우리 전통대로 묻고 싶을 뿐이에요."

사제에게 시선이 쏠렸지만, 그는 루시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미라의 말을 곱씹었다. 모두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신을 수습해도 좋소. 단, 강의 동쪽에서만." 사제가 말했다.

모두가 안심하며 물러섰지만, 루시안과 낙투족 사제는 상대가 움직이기를 기다리며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통대로 시신을 묻는 건 그들의 자유야." 루시안이 말했다.

"먼저 시신을 찾아야 해요. 싸우고 있으면 수색을 할 수 없잖아요." 미라가 말했다.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손끝으로 총신의 청동 장식을 쓰다듬었다.

미라가 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부탁이에요. 당신은 손님이잖아요."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총에서 손을 뗐다. "좋아. 너희 부족 사람들이니, 네가 결정해야지. 서쪽 길을 따라가면 부두가 나온다고 했지?"

"그래요." 미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아버지를 꼭 찾길 빌게." 그는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부두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만에 있었다. 배 몇 척이 수면 위에 외로이 떠서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루시안의 배는 화물과 썩은 생선으로 가득한 어망이 실린 선박들과 함께 부두 끄트머리에 정박해 있었다.

그는 부두를 따라 걸었다. 옆에 정박한 어선에서 벌레 떼가 부패한 어획물 주변을 맴돌며 윙윙거렸다. 이번 배는 경험 부족으로 두 척의 배를 잃은 후 세 번째로 얻은 것이었다. 항해는 어려웠지만, 남의 배 선장에게 검은 안개를 따라가 달라고 설득하는 것보단 훨씬 쉬웠다.

배에 올라탄 그는 갑판 아래로 내려가 점검을 시작했다. 별 추적기가 선반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는 추적기를 제자리에 올려놓고 침대에 앉았다.

벽과 천장을 가득 메운 세계 곳곳의 지도와 도표에는 수심, 조류, 해저 지형 등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해로윙을 몇 달이나 쫓고 있었다. 마지막 추적은 라이콘에서 시작해 수다로까지 이어졌다. 검은 안개를 따라 드넓은 바다를 건넜지만, 그 저주받은 섬의 해안에서 놓치고 말았다. 동풍을 타고 바다뱀 삼각주로 이동해서야 마침내 폭풍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는 지도에서 삼각주의 수많은 섬 중 하나에 압정을 꽂았다. 그리곤 끝에 줄을 달아 그림자 군도의 압정과 연결했다. 압정에는 북쪽의 아이오니아에 있는 수다로로 이어진 줄이 몇 개 더 붙어 있었다. 지도에는 지난 몇 년간 표시한 수십 개의 줄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루시안은 도표를 응시하며 패턴을 알아내려 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발로란 전역에 흩어진 실패의 흔적뿐이었다. 그는 세나를 구하기 위한 수 없는 시도와 번번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쓰레쉬의 모습과 엇나간 분노가 떠오르자 목이 메 왔다.

세나의 비명이 머릿속에 울렸다.

밀려오는 절망에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심장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버텼다. 다시 결의에 찬 그는 지도로 돌아가 작업을 시작했다.

새로운 항로를 계획하고 출항 준비를 마쳤을 때는 모래시계에 약간의 모래가 남아 있었다. 전에 비해 속도가 빨라졌지만, 정확한 측정은 여전히 어려웠다. 검은 안개는 바람의 방향과 상관없이 움직였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갈비뼈 주위의 붕대를 고쳐 매었다. 통증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위층 갑판으로 돌아가 주돛의 줄을 풀기 시작했다. 곁눈으로 해안선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미라가 해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미라는 커다란 열매를 주워들더니 몇 번 흔들고는 다시 모래 속으로 던졌다. 그리곤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갯짓으로 간단히 인사하고 출항 준비를 계속했다. 잠시 후 미라는 또 다른 열매를 주우며 해변을 가로질러 다가오기 시작했다.

"칼라사 열매예요." 미라가 열매를 루시안에게 던졌다.

그는 열매를 흔들어 보았다. 안에서 즙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언제나 베나루에서 칼라사 열매를 싣고 오셨죠. 그 열매는 수확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지?"

"대부분 장례를 준비하러 집으로 갔어요. 진흙 동굴과 석호로 간 사람들도 있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폭풍이 닥쳤을 때 이곳에 계셨을 거예요."

"저기 있는 게 아버지 어선이야?" 그가 열매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몇 개의 난파선과 돛대가 만의 얕은 물 속에 잠겨 있었다.

"네 아버지는 해안에 도착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미라는 손에 든 칼라사 열매를 응시했다. "해변에서 다른 배의 선장을 찾았어요. 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요."

루시안은 해안선을 확인했다. 만조가 절정에 달하려면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는 돛줄을 몇 번 감아 다시 고정했다.

"안내해 줘."

미라는 해안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만의 구불구불한 가장자리를 따라 바위 덮인 모래톱을 지난 후 산호초 더미 근처에 멈춰 섰다.

"이곳에서 선장의 시신을 발견했어요."

루시안은 모래를 살펴보았지만, 약간의 조개껍데기와 산호뿐이었다. 그는 배의 잔해를 찾아 수면을 둘러보았다. 잔잔한 바다가 수평선을 가로질러 뻗어 있었다.

"아버지가 베나루에서 출발하셨다고?"

"네. 그 선장도 마찬가지고요. 두 사람 모두 시장에서 거래하시거든요."

"폭풍은 동쪽에서 불어왔어. 그래서 선장의 시신이 이곳으로 쓸려 왔는지도 몰라. 아버지가 평소에 선장보다 먼저 출발하시니?"

"더 늦게 출발하세요." 미라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바다를 내다보더니 깊이 숨을 들이켜곤 작게 몸을 떨었다.

"폭풍 속에 혼자 계셨을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샌들을 신은 발에 물이 닿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도 해안으로 쓸려 오셨을까요?"

미라가 고개를 들어 서쪽을 바라보았다. 길게 뻗은 해안선은 섬의 굽이진 가장자리로 이어졌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낙투족 영토 깊은 곳에 있었다.
그들은 풀로 덮인 모래 언덕과 오랜 시간 바닷물에 깎여 나간 드높은 해식 아치를 지나 서쪽으로 이동했다. 해안선은 갈수록 바위가 많고 험난해져 화산의 경사면을 기어올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능선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남쪽 끝에는 거대한 바위가 물속에서 솟아올라 높이 서 있었다. 슬픔의 기둥이라 불리는 이 바위는 베나루 섬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었다.

미라는 아버지의 배를 찾으려 해안선을 살폈다. 그녀는 아래쪽 바위 위에 펼쳐진 죽은 바다사자 무리를 가리켰다. 갈매기들이 그 근처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산등성이를 내려와 계곡으로 향했다. 강이 좁은 골짜기를 따라 내려와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이 강이 바로 섬에 사는 두 부족의 자연 경계선이었다.

미라는 말없이 강을 건넜다.

그들은 두 번째 언덕을 올라갔다. 미라는 무성한 덤불을 헤치며 능숙하게 경사를 타고 올라갔고, 루시안은 서서히 뒤처졌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갈비뼈의 뻐근한 통증이 퍼졌다. 그는 언덕을 반쯤 올랐을 때 붕대가 느슨해진 것을 느끼고 멈춰 섰다. 그는 붕대를 단단히 고정하며 점점 심해지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숨소리가 깊고 거칠어졌다.

그는 미라가 언덕 꼭대기에 도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눈 부신 태양에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해안선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 발짝 물러섰다.

루시안은 덤불의 굵은 가지와 덩굴을 붙잡고 성긴 자갈밭을 올랐다. 그는 정상에 올라 미라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서진 돛대가 바위 사이에 걸쳐 있었다. 돛의 잔해는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잔해 너머를 살폈다. 뒤틀린 해안선과 모래톱이 펼쳐졌고, 늘어선 무인도를 지나 저만치에 길고 높다란 절벽이 보였다. 갈매기 무리가 해안을 선회하고 있었다.


시신은 화산암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울퉁불퉁한 해안에 거센 파도가 몰아쳐 금방이라도 시신을 쓸어갈 것 같았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시신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곧 썰물이 들어올 거야."

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루시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미라."

그녀가 움찔하더니 최면 상태에서 방금 깨어난 듯 눈을 깜박였다.

"톨라 덩굴로 밧줄과 들것을 만들면 될 거예요."

발걸음을 옮기는 미라를 보며, 루시안은 처음으로 그녀의 의지가 얼마나 굳건한지 깨달았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빽빽한 수풀에서 두꺼운 덩굴을 한 무더기 모았다. 루시안은 굵은 줄기를 꼬아 밧줄을 만들었고, 미라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시신을 담을 들것을 짰다.

루시안은 밧줄을 근처의 나무에 고정하고 무게를 버틸 수 있을지 확인했다. 밧줄은 튼튼했다. 그는 만족한 얼굴로 밧줄과 들것을 아래로 던졌다.

"내가 내려갈게."

"제가 갈게요. 절벽 타는 데 익숙하거든요."

"나도 할 수 있어."

"아까 언덕 오르면서 힘들어하셨잖아요."

"이번엔 괜찮을 거야."

그녀는 답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귀와 볼이 붉게 물들었다.

"아버지는 무거워요. 바위를 피해 들것을 조종하는 건 제가 할 수 있지만, 끌어 올릴 땐 당신이 해야 해요."

루시안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신은 다년간 뱃일을 하면서 다져진 넓은 어깨와 두꺼운 팔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무게가 족히 100킬로그램은 될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라에게 밧줄을 건넸다.

그녀는 절벽 가장자리로 이동해 천천히 벽에 몸을 밀착했다. 밧줄을 마지막으로 한번 시험해 본 후, 튀어나온 돌에 발끝을 걸쳤다. 그리곤 어깨 너머를 돌아보고 심호흡한 후 옆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불안한 눈으로 미라가 밧줄을 타고 내려가 발을 디디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뒤를 보며 다음 위치를 찾고,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내려가 절벽의 3분의 1쯤 되는 지점에서 넓은 바위에 도달했다. 바람이 불어와 신선한 바다 냄새가 났다. 미라는 팔을 뻗어 바람을 막았다. 그리곤 루시안을 올려다보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잠시 휴식한 후 밧줄을 잡고 다음으로 디딜 곳을 찾았다. 한참을 살피더니 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발을 안전하게 디딜만한 곳이 없었다. "올려 줄게."

"아직 안 돼요."

미라는 오른편의 바위를 살폈다. 그러더니 몇 미터 떨어진 곳의 좁은 바위 턱을 가리켰다. 그곳에 닿으려면 옆으로 이동해야 했다.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래의 얕은 바다와 뾰족한 바위를 살폈다.

그녀가 밧줄을 팔에 감자 루시안은 가슴을 졸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절벽을 딛고 달려 뛰어올랐다.

미라는 절벽 경사면을 가로질러 바위 턱에 착지했다. 발밑에서 흙과 바위가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몸이 비틀리며 한쪽으로 기울더니, 추락하기 시작했다.

미라는 밧줄을 타고 미끄러지며 발을 디디기 위해 다리를 찼다. 발이 성긴 흙에 걸려 미라는 위아래가 뒤집힌 자세가 되었다. 허우적대던 팔이 덩굴에 감기자, 거친 충격과 함께 추락이 멈췄다. 그녀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밧줄이 풀려 미라는 바위에 부딪힌 후 물속으로 사라졌다.

루시안은 황급히 일어나 밧줄을 잡았다. 정신없이 내려갈 길을 찾고 있는데, 미라가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높은 파도 속에서 발버둥 치며 바위로 가득한 해안으로 기어 나왔다. 그리곤 지쳐 바위 위에 쓰러진 후 가쁘게 숨을 쉬었다.

"내려갈게!"

미라가 떨리는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숨이 점차 진정되자, 그녀는 일어나 앉았다. 그리곤 아버지의 시신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곤 시신을 바로 뉘어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울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과거가 물밀 듯이 떠올랐다. 미라 역시 절망에 사로잡혀 평생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 후, 미라는 일어서 들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견디기 힘든 슬픔을 이겨내고 딸의 도리를 다하려 하고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영원한 죽음을 준비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녀는 시신을 조심스레 옆으로 뉘고 덩굴로 만든 포를 깐 뒤, 그 위에 놓았다. 시신이 고정되자, 미라는 끌어 올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루시안은 밧줄을 잡고 시신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미라는 절벽을 타고 오르며 들것이 바위에 부딪히지 않도록 유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시안의 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옆구리의 뻐근함은 날카로운 통증으로 변했다.

밧줄을 당길 때마다 통증이 심해지더니, 상체로 퍼져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밧줄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덩굴을 잡고 시든 나무 그루터기에 둘렀다.

"괜찮아요?"

"그래... 조금만 기다려." 그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통증이 가라앉았다. 그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들것이 경사면 가운데에 매달려 있었다. 미라는 근처의 노출된 바위에 몸을 기댄 채 기다렸다.

루시안은 밧줄을 풀고 천천히 신중하게 밧줄을 당길 준비를 했다. 그리곤 다시 덩굴을 잡고 당기기 시작했다. 노 젓는 사공처럼 박자를 맞추자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었다.

갑자기 갈비뼈에서 경련이 일어났고, 그는 밧줄을 놓쳤다.

아래에서 미라가 소리를 질렀다.

밧줄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루시안은 숨을 몰아쉬었다. 거친 덩굴을 꽉 쥐자, 피부가 타들어 가는 듯하더니 마침내 멈췄다. 시신의 무게 때문에 절벽 가장자리로 몇 미터 끌려갔다.

그는 발을 뒤로 뻗었다. 뒤꿈치가 부드러운 흙 속으로 파고들어 깊이 팬 자국을 남기며 단단히 고정되었다. 떨리는 팔이 힘겹게 무게를 지탱했다. 그는 어깨뼈가 부서질 듯이 밧줄을 당겼다. 그러나 들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갈비뼈의 통증이 다시 한번 격해지며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덩굴 밧줄을 꽉 쥐고 묶을 만한 곳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버텨야 했다.

손이 아프기 시작하자, 그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수평선 너머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그의 여정이 여기서 끝난다면,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실패의 대가는 너무 컸다.

루시안은 고개를 젓고 손의 힘을 풀었다. 밧줄이 살짝 미끄러졌다.

그러자 곧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라면 결코 밧줄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고집스러운 그녀는 아래에 매달린 젊은 여자의 믿음에 보답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이렇게나 큰 위험을 감수했다면 더욱.

밧줄이 미끄러지려 하자, 루시안은 다급하게 덩굴을 팔에 감았다. 밧줄이 토끼의 목을 휘감은 올가미처럼 조여와 그를 앞으로 당겼다. 루시안은 다시 한번 뒤꿈치를 흙 속으로 파묻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신의 무게가 그를 절벽 쪽으로 끌어당겼다.

피투성이 손이 아래에서 튀어나와 절벽의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잠시 후, 미라가 올라와 루시안의 옆으로 와서 밧줄을 잡았다. 그들은 함께 시신을 절벽 위로 끌어당겼다.
해가 지자 곧 불길이 보였다. 루시안과 미라는 계곡 밑에서 수십 개의 장작불이 타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언덕 아래로 들것을 끌어 내렸다.

두 사람은 바니안나무 아래에서 잠시 휴식했다. 루시안은 바닥에 앉아 멍든 갈비뼈를 살피고 새로 감은 붕대를 고쳐 매었다. 미라는 불꽃을 응시했다. 그리고 떨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눈가를 닦았다.

"손은 괜찮아?"

그녀는 붕대가 감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괜찮아요."

"또 피가 나고 있잖아. 이리 줘 봐."

미라가 손을 내밀자 루시안은 조심스레 붕대를 풀었다. 밧줄이 미끄러지면서 화상을 입어 손바닥이 상처투성이였다. 루시안은 미라와 마을 사람들이 겪은 고통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는 물병의 마개를 열고 상처투성이인 피부를 씻어냈다. 그리곤 천을 새로 잘라 상처에 감았다.

"시신을 태우면 영혼도 함께 불타게 돼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죠." 미라가 먼 곳에서 타고 있는 불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루시안은 그들의 신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망자에 대한 약속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제 가야 해."

루시안과 미라는 각자 밧줄을 잡고 어깨 위에 걸었다. 그들은 함께 줄을 당겨 무거운 들것을 끌고 이동했다. 경사로를 오르기 시작하자 발밑에서 자갈이 저벅거렸다.

언덕 꼭대기에 도달하려던 찰나, 노랫소리가 들렸다.

루시안은 미라에게 몸을 숙이라는 신호를 보낸 뒤 덤불 뒤로 몸을 숨겼다. 우거진 수풀에 숨어 계곡을 살피자, 강가에 모인 낙투족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나무 그림자에 가려 있었지만, 루시안은 사제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제가 철퇴를 들어 올리자, 흑요석이 밝은 주홍빛을 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빛이 풀 속에 누워 있는 시신을 밝혔다. 시신에서 불길이 일었다.

불꽃이 밝게 타오르자, 낙투족은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사제가 철퇴를 내리자, 흑요석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무리는 침묵했다.

루시안은 총을 빼 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저들을 막을 거야."

미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끝났어요."

그는 미라의 어깨 너머를 보며 걸음을 떼었다. 미라가 그의 팔을 잡았다.

"왜죠? 저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잿더미가 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아요." 미라가 호소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낙투족은 강둑을 따라 이동해 또 다른 시신 앞에 모여 섰다.

"놈들은 강의 동쪽에 있어."

"나도 알아요!" 미라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서서 팔을 치켜들었다. "내가 좋아서 가만있는 줄 아나요? 저들은 제 동족이에요!"

그녀는 아버지의 시신이 담긴 들것을 내려다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 가야만 해요. 낙투족도, 그들이 저지른 일도 아닌, 아버지가 가장 중요해요."

미라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들것에 달린 줄을 어깨에 멨다. 그리곤 몸을 앞으로 기울여 무거운 시신을 옮기려 애썼다. 마침내 들것이 거친 자갈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라는 홀로 들것을 끌며 천천히 나아갔다.

낙투족의 노랫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는 또 다른 시신에 다가서는 낙투족을 노려보았다. 사제가 철퇴를 들어 올려 불꽃을 지폈다. 분노가 끓어 올랐지만, 미라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분노는 서서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슬픈 체념뿐이었다. 그는 무기를 거두고 미라와 합류했다.
루시안과 미라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빈집에 도착하자 수군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지친 두 사람은 들것에 매인 밧줄을 내려놓고 문밖에 앉았다. 근처의 몇몇 집에서는 횃불이 타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둡고 조용했다.

"아버지를 안으로 옮겨야 해요."

그들은 거실을 정리하고 나뭇잎으로 만든 침대에 시신을 뉘었다. 미라는 주전자에 물을 붓고 화로에 올린 뒤 불을 붙였다. 방 안에 온기가 퍼졌다.

미라는 아버지 곁에 앉았다.

"이쪽은 루시안이에요, 아빠. 아빠를 집으로 모셔 오는 걸 도와줬어요."

루시안은 그 말에 속이 뒤틀렸다. 그는 언덕 위에서 포기하고 싶었다. 미라의 결의가 없었다면 마음을 다잡고 그녀의 아버지를 마지막까지 옮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옷에 달린 조개껍데기 단추를 조심스레 풀어 해지고 닳은 옷을 벗겼다.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팔과 가슴에는 검은 상흔이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나머지 옷을 벗기기 위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 멈추고 물기 어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괜찮다면 내가..." 루시안이 제안했다.

"부탁드려요." 미라가 작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신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마지막 순간이 그의 몸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공포와 고통스러운 최후의 흔적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밀려오며 슬픔이 그를 압도하려 했다. 그는 생각을 떨쳐 내며 미라에게 작게나마 위안을 주는 데 집중했다.

루시안은 남자의 신발을 벗기고 바지의 끈을 풀었다. 바지를 벗겨 내려고 했지만, 가죽이 바닷물에 수축해 쉽지 않았다. 그는 코트 안에서 단검을 꺼냈다. 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리의 이음새를 가르고 옷을 걷어냈다.

미라가 화로에서 주전자를 꺼내 물에 녹나무 기름을 넣었다. 증기와 함께 달콤한 향이 퍼졌다.

두 사람은 모직 수건으로 시신을 부드럽게 문질러 흙과 소금, 시신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불순물을 닦아냈다. 미라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손톱 밑을 정성껏 청소했다. 수습이 끝나자 그녀는 아버지를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눈에는 사랑과 슬픔이 어려 있었다.

미라는 일어서서 옆방으로 가 마노와 산호로 장식된 머리핀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는 아버지의 손에 핀을 쥐여준 후 가슴에 놓았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선물하신 유품이에요."

루시안은 왼쪽 총집에 들어 있는 유물 총을 바라보았다. 세나의 총에 장식된 청동은 자신의 것보다 우아하고 정교했다.

"어머니는 제가 첫 여름을 맞이하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며 걱정하셨죠. 나이가 너무 들어 어머니를 만났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면서."

미라가 몸을 떨며 애잔하게 웃었다. "저는 바보 같은 걱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는 분명 아버지를 알아보고 집으로 인도하실 테니까." 미라의 눈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는 검은 안개에 사로잡힌 수많은 영혼들을 떠올렸다. 지금쯤 미라의 아버지도 그중 하나가 되어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그는 미라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너는 약속을 지켰잖아. 그거면 충분해."

미라는 오랫동안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검은 안개를 쫓는 건가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몸을 움직여 등을 기댔다. "내게서 모든 걸 앗아갔어."

"그렇다면 복수를 쫓는 건가요?"

루시안은 불꽃을 응시했다. "직접 본다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될 거야..."

미라는 아버지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각자 생각에 잠겨 깊은 침묵에 빠졌다. 화로가 타는 소리를 내며 정적을 깨트렸다. 미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직접 보지 못했으니...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알 수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하지만 복수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오진 않잖아요."

그녀는 눈가를 닦고 다시 아버지에게 주의를 돌렸다.

루시안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총을 감싸 쥔 손이 청동 총신을 매만졌다.

그는 세나를 구하려 쏟은 노력과 실패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몇 년간 복수심을 극복했다고 믿어 왔지만, 미라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쓰레쉬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까지도.

그는 눈을 감고 오래전에 배운 만트라를 조용히 외웠다. "원치 않는 것은 깎아 내라. 바위만을 남겨라… 원치 않는 것은 깎아 내라. 바위만을 남겨라…"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계속해서 웃음소리가 울렸고, 손이 떨렸다. 그는 손가락이 저리고 자신의 심장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총을 움켜쥐었다.

옛 기억이 펼쳐졌다. 오래전 그녀를 잃던 순간부터 마지막 실패까지의 기억이 눈 부신 섬광과 천둥 같은 울림이 되어 밀려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속이 뒤틀리게 만드는 비명... 가학적인 웃음소리... 분노로 가득한 돌진이 떠올랐다. 그가 찾으려 애썼던 패턴이 마침내 보였다.

진실을 마주한 그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분노가 그녀를 놓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녀를 기억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분노였다. 그 분노를 놓는 것은 곧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는 사랑하는 사람의 안식을 방해했다. 평안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의 행동은 그녀의 불행을 더 크게 만들 뿐이었다.

그는 세나가 죽은 순간부터 지금껏 그녀를 실망시킨 것이었다.
루시안은 자신의 배 갑판에서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미라와 마을 사람들은 조각한 거북이 껍질에 사랑하는 이들의 시신을 실어 옮겼다. 시신은 흰색 모직으로 단단히 싸여 있었다. 그들은 새벽이 되자 모래사장의 깊은 공동 매장지에 시신을 묻었다.

그는 미라의 말을 기억했다. "망자들이 다시 태어나 바다로 돌아오면 조상들이 집으로 인도할 거예요."

루시안은 출항 준비를 했다. 그는 줄을 풀고 당겨 주돛을 끌어 올렸다. 천이 돛대를 따라 올라가 바람을 타고 퍼졌다. 밧줄을 걸고 있는데, 미라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손을 흔들었다.

"훌륭한 장례식이었어."

"그동안 고마웠어요."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다를 내다보았다. 잔잔한 수면 너머로 수평선이 보였다.

"다시 안개를 쫓을 건가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망자를 묻을 거야."

미라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든 게 정리되고 나면 돌아오는 게 어때요?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생각해 볼게." 루시안은 그렇게 말했지만,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루시안은 해안으로 돌아가는 미라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잘 익은 칼라사 열매를 주워 몇 번 흔들어 보더니, 손에 든 채로 걸음을 옮겼다. 늘어선 나무와 마을로 이어지는 길에 도달하자, 그녀는 돌아서 손을 흔들었다.

루시안 역시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그림자 군도는 그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더 이상 압정도, 줄도 필요 없었다. 그는 분노를 깎아 내고 약속만을 남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안식뿐이었다. 루시안은 그것이 바로 그의 마지막 행동이 될 것을 알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한번 듣고 싶었다.

진정으로 운이 좋다면, 그녀가 그를 집으로 인도할 것이다.

4. 변함없는 마음

5. 하이 눈 스킨 세계관

그림자 사나이는 2018년 하이 눈 루시안 스킨 발매와 동시에 공개된 하이 눈 세계관 관련 단편 소설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스킨 세계관 참고 바람.

5.1. 그림자 사나이

"당신이 보안관인가?" 강의 괴인이 말했다. 저지대의 먼지와 말라 시든 쇠뜨기 가시가 녹청색 얼룩을 형성하고, 그것이 또 호수 바닥에 켜켜이 쌓여 있던 진흙과 뒤범벅이 되어 온 얼굴을 덕지덕지 뒤덮고 있는지라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강의 괴인은 루시안의 개인용 객실 입구에 우뚝 서 있었다. 작은 것 같기도 하고 큰 것 같기도 한 몸뚱이에는 금가루가 묻은 누더기를 둘렀다. 프로그레스 외곽에서 사금을 몰래 채취하다 죽은 자에게서 벗겨낸 것이 분명했다.

강의 괴인은 숨을 내쉬지도 들이쉬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루시안은 강의 괴인이란 존재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강의 괴인은 수분이 없으면 말라 죽어버리기 때문에 자신들이 태어난 진흙 바닥 호수나 협곡의 개천에서 절대 멀리까지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강의 괴인이 사는 악취 나는 강물로 휴대용 물통을 채우려 하거나, 그 강바닥 모래진흙에 사금 채취용 냄비를 집어넣는 사람은 운이 지지리도 없는 것이다. 강의 괴인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마치 악어처럼 그자를 낚아챌 테니까. 널따랗고 진흙투성이인 팔을 내밀어 냄새 지독한 배설물 속으로 곧장 끌어들일 테니까. 한 순간에 자취가 사라지고 서부의 황야에 흔해 빠진 또 하나의 유령이 될 테니까.

"이젠 아니야." 루시안이 대꾸했다.

루시안은 강의 괴인을 바라보았고 강의 괴인은 그 시선을 되받았다. 루시안은 객실 창에 드리운 꽃무늬 커튼을 배경으로 온몸을 편안히 늘어뜨리고 있었다. 기차는 덜커덩거리며 질주했고, 흔들리는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조각조각 부서지며 강의 괴인의 어두컴컴한 눈을 비추었다. 말라서 쩍쩍 갈라지긴 했으나 얼굴을 온통 뒤덮은 진흙 아래에 거의 감춰지다시피 한, 생선을 연상케 하는 눈이었다.

"당신 배지가 필요한데." 강의 괴인이 말했다.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방 정부가 발급한 보안관 배지가 있으면 정부가 파견한 괴물 사냥꾼들을 피해 녹스 요새를 통과할 수 있다. 마차를 타고 남으로 내려가 밴들 바로 남쪽에 강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늪지 숲으로 갈 수도 있다. 어쩌면 거기서 가게라도 낼 작정인지도 모르지. 요즘 들어 동부 해안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그쪽 저지대 사막 지역에 와서 정착하고 있으니까. 이자가 이렇게 절박한 도박을 감행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봐줄 수는 없는 일이지.

"너희 종족이 많이 안 남은 모양이군." 루시안이 말했다.

"모든 게 많이 안 남았어." 강의 괴인이 대꾸했다.

선로의 고르지 못한 부분을 기차가 지나가면서, 화물칸을 연결하는 용수철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죄어들었다. 그 순간 객실이 마구 흔들렸고, 강의 괴인은 양팔을 벌렸다.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진흙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바늘처럼 끝이 날카로운 이빨 수십 개가 드러났다. 양 어깨에서는 큼지막한 가시들이 솟구쳐 나왔다. 용수철들이 다시 한 번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기 직전, 총소리가 났다. 지옥의 불길 같은 가느다란 빛살이 기차 한쪽을 뚫고 나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태양 쪽으로 사라졌다. 강의 괴인이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루시안의 총은 총집 안에 다시 들어가 있었다.

섬광을 정통으로 맞은 강의 괴인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유황과 산사나무 타는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안쪽에서부터 불꽃이 일어나 지글지글 타오르면서 뒤틀렸다. 루시안은 모자를 고쳐 쓰고 객실에 깔린 어둠 속으로 다시 상체를 뉘였다. 그의 주변에서 어둠이 가볍게 몸을 떨더니, 미소를 지었다.

루시안을 살펴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수분이 말라버린 몸뚱이를 치우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루시안과 강의 괴인은 침묵 속에서 함께 여행을 계속했다. 객실 문은 계속 열려 있었다. 종점인 "천사의 안식처"에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

죽은 이와 이야기하는 목사가 있는 곳에 닿을 때까지.
프로그레스 주민들은 이미 수군거리고 있었다. 지금 오는 법 집행관은 소문의 그 악마와 영혼을 잃은 사람들과 지독한 인연이 있으며, 뉴 에덴으로 가서 그 성스러운 목사를 만날 것이라고… 악마도 목사도 이곳 서부에서 불길한 징후로 통했기에, 그 누구도 그림자 사나이의 길을 막지 않을 것이었다. 주민들은 트윈 리즈나 레드리버 같은 사태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 마을들은 우연한 사태가 잔혹하게 꼬이고 뒤틀린 끝에 완전히 집어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주민들은 루시안이 조금이라도 빨리 자기들 마을에서 나가 주기를 바랄 테니, 루시안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줄 것이었다.

이번 일은 루시안이 연방 정부를 위해 일했던 때부터 문젯거리였다. 당시 정부는 루시안에게 그 악마를 잡아 문명세계로 끌고 오라는 임무를 맡겼다. 정부는 그 악마를 ‘법정에 세울’ 작정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려 했다. 서부 개척지대가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으니까.

물론 루시안은 악마가 하나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은 ‘유일무이’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루시안은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모여든 낯선 존재들이 서부의 사막에서 활개치는 모습을 신물나게 보았다. 말끔하게 다림질한 양복을 걸친 악마들, 험한 바위 산 속에 몸을 숨긴 천사들, 마녀와 유령과 온갖 야수들이 저마다 달빛을 둘러 정체를 숨기고, 전혀 의심하지 않는 순례자에게 달려들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서부 토박이 주민들과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생경한 무기, 해골 같은 머리통을 하고 살점을 먹어치우는 거인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기계 인간… 이 모든 것들이 오래 전부터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악마들은, 항상 존재했다.

하지만 이 악마는 달랐다. 이 악마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사신, 학살의 신, 고대의 간수, 그리고 거대한 뿔. 이 악마는 영혼을 수집했다. 적어도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러했다. 그는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그 음산한 일을 계속했다. 산 자에게서 영혼을 빼앗고, 육체는 그 자리에 버렸다. 서부의 황야에서 태어난 존재이자 거친 개척 지대가 낳은 악마로, 다른 악마들과 마찬가지로 기대감 가득한 해맑은 얼굴을 한 채 끊임없이 서부로 밀려들어오는 개척자들을 상대로 끔찍한 굶주림을 만족시켰다. 마침내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알기 시작했다. 정착지를 넓히려는 연방 정부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 이후 세 명의 보안관이 그 악마의 손에 죽었다. 그 중 두 명은 루시안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쪽 주민들은 그놈을 쓰레쉬라고 부르더군." 정부 관리들이 말해주었다. "그자를 잡을 수 있겠나?"

루시안은 쓰레쉬를 그린 스케치를 훑어보았다. 놋쇠로 만든 소 머리통처럼 생긴 머리 주변을 일곱 지옥에서 타오르는 듯한 불꽃이 둘러싼 형상이었다. 줄을 달아 들고 있는 기묘한 랜턴이 쓰레쉬의 힘의 원천일 것이라고, 루시안은 판단했다. 만약 저 랜턴을 명중시켜 부술 수 있다면, 싸움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악마와의 싸움이 그렇게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특히 연방 정부가 파견한 사람들을 죽이는 악마의 경우에는 더더욱… 루시안은 추파로사 부근에서 특히나 고약한 악마와 얽혀들었던 일을 기억했다. 놈은 사막에 불어닥치는 폭풍처럼 민첩하게 움직이며 돌개바람을 일으켰다. 총알로는 도저히 명중시킬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동료가 때맞춰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그곳이 루시안의 무덤이 될 뻔했다. 이번 사냥에는 조력이 필요했다.

"혼자서는 어렵지." 루시안이 말했다. "세나가 있어야 해."
"이번 역은 종점인 '천사의 안식처'입니다." 차장이 말했다. 거의 속삭이듯 약한 목소리였다. 더운 날씨 탓에 강의 괴인은 이제 쪼글쪼글한 가죽 한 장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객실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속, 루시안의 자리에는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형체가 걸터앉아 있었다.

몸뚱이는 화염과 연기로 감싸였고, 이빨 같은 것이 돋아난 팔다리는 불꽃이 온통 이글거렸다. 무기는 시커먼 심연의 바닥에서 주조하여 악마 부대의 지휘관이 쓸 법한 생김새였다. 형체는 얼추 사람 같기는 했지만,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마치 장작불의 불꽃과 재로 빚은 듯했다. 가슴팍에는 연방 정부 보안관임을 나타내는 상징이 뒤집힌 채, 달아오른 인장처럼 찍혀 있었다. 양 다리는 고대 느릅나무 첨탑이 소용돌이치는 불꽃에 휘감긴 듯한 형상이었다. 시뻘건 심장은 지상의 모든 분노를 담아 펄떡이는 것만 같았다.

"신이시여…" 차장이 말했다. 어떤 신을 들먹이는 것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것'은 기묘하게 생긴 멀쑥한 다리를 움직여 좌석에서 일어났다. 기차 안은 고요했다. 그 무시무시한 형체의 얼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끔찍스러운 희열을 느끼는 듯 입 주변이 부서지더니 그 틈새로 지옥의 불길이 새어나오며 조소하는 형상이 되었다.

바로 그 순간 재와 불꽃이 흩어져 버렸고, 객실의 어둠 속에서 루시안이 걸어나왔다.

"실례. 겁줄 생각은 아니었소."

차장은 루시안이 옆을 스쳐지나 객실의 금속 출입구로 내려가 황혼에 물든 저녁 공기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사람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을 할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천사의 안식처.' 문명 세계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신흥 도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공기에는 꿀과 포도주의 향이 가득했다. 도시 서쪽은 높직한 산자락의 기슭으로, 어마어마하게 큰 소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개척지대 저 너머에서 그 무엇이 덮쳐오더라도 충분히 막아낼 만큼 총과 인원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천사의 안식처 주변에 살고 있는 생명체만으로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저 산을 넘어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사람은 정신이 완전히 나간 채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루시안은 북적대는 기차역을 나와 천사의 안식처 중심부로 가는 동안 동부 산업 지대에서 만든 인공 마법 연고인 뱀 기름을 파는 장사꾼 셋과 몸뚱이가 코브라인 술집 여인 한 명을 지나쳤다. 여인은 우유처럼 희부연 눈을 베일로 감추고 있었다. 안 그랬다가는 술집 손님과 나란히 앉아 술 한 잔 얻어 마시기도 전에 손님이 화강암 돌덩어리로 변해 버릴 테니까.

벌목꾼과 가스등을 켜는 점등원들, 잡화점과 사창가, 옛날에는 신이었으나 타락해 버렸다는 소문이 따라다니는 외톨이 총 제작자 너머, 중심가로 들어서기 직전에,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이 서 있었다. 들리는 바로는 이 도시가 개척지였을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다고도 하고, 심지어 그보다 더 전부터 장사를 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상호는 '세속의 왕'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야수든, 법망을 피해 달아날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여, 세속의 왕국은 그대들에게 열려 있나니… 물론 돈을 낼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 술집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잃을 만한 자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항상 보이지 않는 끈들이 자신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힘을, 어두운 그림자가 등 뒤에서 웃음을 머금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오래 머무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서부 오지에 자리잡은 정착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런 곳에 사는 주민들은 한 판 붙지 않고서는 귀중한 비밀을 털어놓는 법이 없다. 토착민들은 더더군다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상한 기계를 가지고 와서 법석을 떠는 정착민들까지도 참아 줬을 정도니…

루시안은 친구들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루시안의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라면 대개는 연방 정부 보안관들이겠지만, 그들은 악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든 싫든 간에 루시안은 곧 악마가 될 것이었다. 그러니 친구라는 개념을 훨씬 넓힐 필요가 있었다. 연방 정부와 계약하기 전, 성 자운의 자갈길 깔린 거리를 밟았던 때보다 더 전인, 돈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해치우던 자신만만한 풋내기 총잡이였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때 루시안은 많은 친구를 만났고, 그들은 손에 리볼버를 든 채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그 중 한 명만은 한결같았고 완강했다. 누군가에게 죽기에는 너무 컸고 그냥 죽기에는 너무 늙었다. 사실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오래 전 이 대륙에 처음 선박들이 닻을 내릴 때부터 싸워왔고, 모르긴 해도 모든 것이 먼지와 속삭임으로 화한 후에도 오랫동안 싸울 친구였다.

루시안은 '세속의 왕'의 널찍한 출입구로 들어섰다. 술집 안이 고요해지며, 온갖 몰골 사나운 손님들의 품평하는 눈길이 루시안에게 꽂혔다. 루시안은 약간 난처해졌다. "알리스타를 찾는데." 루시안의 말에 손님들은 즉시 시선을 거두고 카드 게임을 계속하거나 마시던 맥주에 관심을 돌렸다. 여기저기에서 다시 맥락 모를 폭소와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고, 음이 맞지 않는 피아노에서 나오는 새된 소리가 합세했다.

곧 루시안의 눈에 먼 구석에 앉아 있는 알리스타가 보였다. 아무리 세속의 왕 실내가 요란한 손님들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그 거대한 덩치가 눈에 띄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알리스타는 덩치에 맞지 않게 되도록 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시건방진 젊은 총잡이들이 명성 좀 얻어볼까 하는 욕심에 모욕적인 언사로 싸움을 걸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그런 싸움이 젊은이들에게 좋게 끝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알리스타는 미노타우로스였다. 키는 3미터가 넘고 어깨 너비도 2미터에 가까웠다. 그러니 누군가와 싸움이 붙으면 그 결과야 뻔했다.

"알리스타." 루시안이 말했다.

"보안관." 알리스타가 답했다.

"뉴 에덴으로 가려고 하는데 말야." 루시안이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절대 안 가는 곳이지." 알리스타가 대답했다. 루시안은 그 옆 의자에 앉았다.

알리스타도 이제 늙은 티가 났다. 하지만 몇 남지 않은 미노타우로스 중에서 알리스타가 가장 오래 살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낮 시간은 자기보다 약한 종족들의 아첨 어린 찬탄을 들으며 지냈고, 밤 시간은 자기 몸의 반밖에 안 되는 종족의 덩치에 맞게 만들어진 바 의자에 앉아 보냈다.

두 친구는 엄숙한 표정으로 앞쪽을 응시했다. 천사의 안식처로 오는 사람은 예외 없이 뭔가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너무나 절박한 사람만이 세속의 왕의 출입구에 들어선다. 세속의 왕은 변절자와 죽은 자들이 모여 술을 들이키는 소굴, 목적 없는 인생이 서서히 나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하수관, 황무지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자들이 마지막으로 멋들어진 총격전을 꿈꾸며 동전푼을 낭비하는, 그런 곳이었다.

루시안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북서쪽 깊숙한 지역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기찻길은 당연히 없고, 사악한 신들이 나무 사이를 누비는 곳이었다. 그는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소문을 추적하려는 것이었다.

둘 다 그에 따르는 위험은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특전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요청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뭐라고 할까?" 알리스타가 물었다. "네가 거기 간다고 하면 말이야."

"모르겠어." 루시안이 대답했다. "전혀 모르겠어."

알리스타는 마시던 술잔에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두터운 맥주잔으로, 크기가 거의 어린아이 만했다. 알리스타는 기약 없는 작별 인사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지도를 그려줄게."
루시안은 '대머리수리 협곡'에서도 가장 지저분한 술집에서 피비린내나는 총격전을 벌이던 중에 총구 너머로 세나를 처음 만났다. 그 총은 세나의 총이었다. 대머리수리 협곡 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것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이번 총격전은 어떤 멍청한 현상금 사냥꾼이 어느 '외부인'이 등을 돌렸을 때 총을 뽑아들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게 전개되었다.

그 '외부인들'은 어디에도 있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말끔하게 양복을 빼 입었고, 도박을 미친 듯이 좋아해서 불량배들과 자포자기한 정착민들 사이에 악평이 자자했다. 이들에게 이기면 그야말로 비길 데 없는 부를 얻는 것을 의미했다. 일확천금을 벌 기회였고, 외부인은 밀랍 봉인—이것만으로도 상당한 값이 나갔다—으로 약속을 보증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지면 문제가 전혀 달라졌다. 외부인은 상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만을 판돈으로 받았다. 농장, 시계, 아이들, 영혼… 제일 좋아하는 단도까지. 상대는 미처 모르는 사이에 깊숙이 빠져 버리기 일쑤였다.

떠도는 소문에는 제레미아 제임스라는 백만장자도 이들과의 도박에서 졌다고 했다. 철도업계의 거물이자 거한인 남작으로, 루시안도 이전에 그가 의뢰하여 자잘한 일을 몇 가지 해결한 적이 있었다. 도박에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던 제레미아는 어리석게도 지극히 소중한 것을 담보물로 내놓았고, 도박에서 패하자 두 번 파산하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다.

그리고 총잡이라면 거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온갖 비열하고 비겁한 술수가 판치는 대머리수리 협곡 시의 수배 게시판에 현상금을 준다는 종이가 나붙고 그것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도시 노동자들의 구역으로 흘러들어가면, 현상금 사냥꾼들이 꼬여든다. 그런 작자들은 돈과 폭력 외에 다른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사냥꾼은 별 경고도 없이 총을 빼들었다. 술집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외부인은 아무 흥미도 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무장한 악당과 살인자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 세나와, 몇 안 되는 보안관들과, 알리스타가 있었다. 모두들 누군가가 행동을 개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친구." 사냥꾼이 속삭였다. 사탕처럼 달콤하지만 피냄새가 풍기는 목소리였다. "내가 찾는 걸 당신이 갖고 있다는 거 다 알아. 그걸 나한테 넘겨. 그럼 모두들 여기 들어왔을 때처럼 평온하게 여길 나갈 수 있을 거야."

외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얼굴은 도자기 인형처럼 차분했고 6연발 쌍권총을 든 사냥꾼의 위협에도 근육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사냥꾼이 온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기 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하지만 저물어가는 태양이 내뿜는 열기와 이 세계의 가장자리 끝에서 퍼마신 술 때문에, 누가 진짜로 싸움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지, 누가 그저 허풍을 떠는 것뿐인지를 가려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술집을 가득 메운 침묵을, 사냥꾼은 총 한 방으로 깼다. 그녀의 권총에서 대형 탄환이 발사되어 외부인의 몸 한복판을 파고들었다. 외부인의 몸뚱이에서 연기구름이 피어올랐고, 구멍에서는 새까만 연기가 까마귀 모양으로 번져나오더니 그 연기 속에서 커다랗고 사악하게 생긴 까마귀 한 마리가 튀어나와 포커판이 벌어진 탁자로 뛰어들었다. 사냥꾼은 마구 총을 쏘아댔고, 카드와 칩과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루시안은 사냥꾼을 겨누었고, 보안관들은 루시안을 겨누었고, 알리스타는 그 짧은 시간에 되도록 큰 몫을 챙기려고 돌격해 들어갔다. 술집 안의 모든 총구가 불을 뿜었다. 총알이 사냥꾼과 보안관 한 명을 뚫고 지나가는 순간, 루시안은 당구대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거기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곤경에 처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세나가 말했다. 그녀의 총구는 루시안의 이마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눈은 온화한 대초원의 빛깔이었고, 중간중간에 검은색 반점이 떠 있었다. 루시안은 장전된 총을 겨눈 상대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뻔했다.

"안녕하세요." 루시안이 대답했다.

"이 강직한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을 택하신 모양이죠?" 세나가 물었다. 그때 술집 주인의 몸뚱이가 힘을 잃고 두 사람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검은 연기가 하늘하늘 피어올랐다.

"다는 아니고, 일부죠." 루시안이 대답했다.

순간 세나는 몸을 숙였다. 대형 총알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 당구대 한쪽이 떨어져나갔다. 세나의 동작이 어찌나 빨랐는지 루시안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사람이 총알을 피하는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신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지만, 세나는 자신감이라면 흘러넘치고도 남았다.

세나는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배지가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수석 보안관의 별 모양이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총을 뽑는 사람 중 한 명임을 입증하는 표식이기도 했다.

"그럼, 일단은…" 세나는 싱긋 웃더니,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루시안의 권총을 압수했다. "걱정 말아요. 나중에 돌려줄 테니… 이 소동이 끝난 후에도 당신이 죽지 않았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엄폐 사격으로 재빨리 두 발을 쏘면서 다시 눈앞의 총격전에 뛰어들었다. 루시안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 뒤의 총격전은 흐지부지해졌다. 어느 순간엔가 현상금 사냥꾼이 연기에 휩싸인 외부인의 몸뚱이에서 기름에 흠뻑 젖은 정체불명의 물체를 낚아채 술집 출입구로 달려나갔다. 외부인은 고함을 지르며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술집 손님들이 대부분 사망하고 누구도 총을 쏘지 않게 되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른 술집에서 술을 마시려고 나가버렸다. 대머리수리 협곡 시에서 술과 시체는 절대 공급이 부족해지지 않는 두 가지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보안관들은 바로 그때부터 루시안이 청부 총잡이 일을 때려치우고 연방 정부를 위해 괴물을 사냥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하곤 한다.

물론 루시안의 마음은 야수들에게서 사람들을 구해내기보다는 미소를 지으며 총알을 피하는 미녀에게 가 있었다는 사족도 잊지 않는다.
알리스타의 지도는 엉성하기는 했지만 꽤 유용했다. 지도에 그려진 대로 천사의 안식처에서 북쪽으로 하염없이 걷다 보니—백 년 정도 걸린 느낌이었다—, 그 어떤 살아 있는 사람도 감히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법한 풍경이 나타났다. 사물의 색감은 훨씬 선명해 보였고, 공기 자체가 기이한 마법을 발산하고 있었다. 루시안이 잠을 청하면, 그의 시야 바로 바깥에서 거대한 생명체들이 도사리고 앉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해가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면 천막을 쳤고,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그림자는 밤에 가장 강해졌다.

루시안은 그 사악한 그림자가 자신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을, 자신을 몸 밖으로 끄집어 내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얼마 안 가 피부가 가려워지더니 박편이 되어 떨어져나갔다. 입이 비틀리면서 굶주린 활짝 웃음 모양이 되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고, 악마가 루시안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지옥의 화염 바다에서 서부 지대에 자라나는 쪽빛 덤불들이 솟아올랐고, 그 타닥거리며 불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익사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분노가 느껴졌다. 무시무시하고,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분노, 수치심, 역겨움. 루시안 자신의 영혼 어두운 곳에서부터 태어난 혐오스러운 증오. 그때서야 비로소 전투는 시작될 것이다. 악마는 루시안의 육신을 취하려 하고, 그에게 남은 자아는 그것을 되찾으려고 허우적거릴 바로 그때.

얼마 전부터 악마로의 변신이 루시안이 감내할 수 있는 시간보다 더 길게 지속되기 시작했다.

문득 살갗에 따끔거리는 느낌이 강해지더니,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쩍쩍 금이 갔다. 루시안은 쓰러진 통나무에 최대한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온몸의 근육이 얼어붙었다. 변화와 사투에 대비하여, 그리고 아침이 주는 약속을 기다리며.

루시안의 눈이 흐려졌다. 하늘이 비틀리더니 진홍색으로 물들어 갔다. 마치 일몰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만 같았다. 어느덧 화염이 하늘을 에워쌌고,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짙은 안개가 덮쳤다. 주변에 우뚝우뚝 선 나무들이 마치 섬뜩한 토템처럼 보였다. 루시안이 피운 장작불만이 이 세계를, 군데군데 초목이 자리한 평원의 초록색과 갈색을 비추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변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은 확실했다.

울창한 숲 저편에서 기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공허하고 뒤틀렸으며 어두운 목구멍을 떡 벌린 듯한 소리였다. 악마가 퍼뜨려 놓은 듯한 암갈색 안개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소리였다. 이것은 겪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루시안이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존재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 휘말려 있는 참이라 돌아볼 수도, 총을 뽑을 수도 없었다. 루사인이 몸을 일으켜 보려고 기를 쓰는데, 두툼한 금속 다리 여러 개가 태곳적부터 빽빽이 자라 있던 나무들을 장난감처럼 가볍게 부수며 다가왔다. 그 다리가 어색한 동작으로 이끌고 오는 것은 거인의 상체였다. 루시안은 움직일 수도, 그 괴상한 존재에게서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거인의 상체 중심부는 뻘겋게 달아오른 석탄 더미였고, 주변에는 피부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둥글넓적한 기관차 밸브들이 오래 전 죽어버린 거인의 어깨를 떠받친 채 연기를 뿜어냈다.

악마다. 루시안은 생각했다. 악마가 또 하나 있었어.

거대한 괴물은 루시안 앞까지 다가왔지만 안개 때문에 전체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괴물이 육중한 금속 다리를 구부리자 상체가 앞으로 쏠리며 얼굴이 장작불빛 속에 드러났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루시안." 괴물이 입을 열었다.

루시안은 즉각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오래 전에 행방불명되었거나 죽었을 거라고 여겨졌던, 외부인과의 도박에서 자신의 심장을 판돈으로 내걸었던 바로 그 백만장자였다.

"제레미아?"

한때 백만장자 기업가였던 괴물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 흉측스러울 정도로 기형적인 형체는 제레미아라는 인간성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명확히 보여주었다. 버려진 화물 기차 십여 량의 녹슨 골조로 뼈대를 삼고, 지옥의 화염으로 작동하는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괴물일 뿐이었다. 악마의 용광로가 내뿜는 열기에 배는 터질 듯이 불룩했다. 루시안과 괴물 사이에 타오르는 장작의 불길이 괴물 쪽으로 끌려가듯 쏠렸다. 마치 제레미아가 그 불길을 들숨으로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 이름은 떨쳐버린 지 꽤 됐어, 친애하는 보안관 나으리." 괴물이 말했다. 그 목소리가 주변의 땅으로 스며드는 동안, 루시안은 온몸이 굳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젠 우르곳이라 불러주실까. 그게 내가 택한 이름이거든."

"궁금해하는 거 다 알아." 우르곳이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절망적인 땅을 문명화하려던 노력을 그만 뒀어. 위대한 강철 제국을 세우겠다는 내 계획도 버렸고 말이야. 난 자만심 때문에 실수를 저질렀던 거지. 나는 거래를 받아들였고… 당신이 그랬듯이 말이야. 그리고 그 대가를 너무나 비싸게 치렀지."

거대한 괴물은 오래 전 자기 심장이 자리하고 있었을 부위, 지금은 달아올라 백열을 내뿜는 석탄더미가 박혀 있는 부분을 몸짓으로 가리켰다. 소문이 맞았군. 제레미아는 오래 전에 죽었던 거야.

"그건 죽음이 아니었어." 마치 공중에서 루시안의 생각을 낚아채기라도 한 듯, 괴물이 말했다. "비록 내 소중한 소유물을 돌려받았을 즈음에는 나를 살아 있다고 부르기엔 너무 늦었지만. 내 뭄뚱이는 사막 가장자리에 버려졌어. 그… 동료들이… 그랬지. 배반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된 자들이 말이야.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여긴 악마가 아주 많아… 당신이 죽이지 못했던 그 괴물과는 달리, 나는 어떤 악마에게서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제안을 받았지."

우르곳과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장작의 불길은 끊임없이 위로 솟아올라 우르곳의 뱃속으로 쏟아져들어갔다. 우르곳의 몸뚱이 안쪽 어디에선가 굶주린 기어 수백 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루시안은 걸신 들린 거대한 목구멍이 하늘을 잡아채어 우걱우걱 집어삼키는 장면을 상상했다.

"난 당신이 자신과의 결투에서 패할 거라는 걸 알아, 보안관. 내가 그랬거든. 난 도박에서 진 후에 시시한 강도 나부랭이가 될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슬픈 필멸의 존재답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구렁텅이로 빠져들었지. 당신도 나와 같은 길을 따라간다면—틀림없이 그렇게 되겠지만—, 조만간 난 당신이라는 껍데기를 걸친 괴물과 만나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거대한 금속 다리들이 펴지자 우르곳의 얼굴이 멀어져갔다. 이글거리는 열기와 불꽃을 내뿜던 지옥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늘이 찌그러지더니 금이 가면서 부서졌다. 매서운 빛살을 내쏘던 태양이 다시 한 번 싸늘하고 빛 한 줄기 없는 한밤중으로 바뀌었다. 루시안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곧 그림자가 그를 부를 것이었다.

신속하게 행동해야 했다.
당시 루시안은 경솔했다.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악마가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와 세나는 말을 몰아 극지 산악 지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단 한 방으로 쓰레쉬를 잡겠다는 투지가 넘쳐 흘렀다. 루시안은 역대 가장 뛰어난 보안관 중 한 명이었고, 세나는 역대 가장 뛰어난 보안관이었다. 두 사람은 용감하고, 무모했으며, 서로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쓰레쉬는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쓰레쉬라고 불리는 그 악마는 고지대 개척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괴물과는 달랐다. 게걸스러웠고 잔혹했으며, 사람들이 이 대륙의 동쪽 해안에 상륙하고 서부에 정착하기 훨씬 전부터, 영겁 이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다.

신들을 탄생시켰던 우주의 존재들도 차츰 나이가 들고 죽어갔으며, 그들의 태고의 육신은 지상으로 떨어져 산과 계곡과 원시 바다를 만들었다. 하지만 쓰레쉬는 계속 살아 있었다. 파괴를 갈망하는 끝간 데 모를 게걸스러움 덕분에 비정상적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에게 이름을 붙여줄 만큼 발달한 언어가 생기기도 전부터 이 대륙의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야수의 해골을 닮은 머리는 혐오스러운 불길에 휩싸여 있고, 악의가 가득한 시선은 상대를 빤히 응시했다. 그 오래된 육신에 깃든 적의는 그 무엇으로도 정화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쓰레쉬는 자신보다 먼저 죽어간 존재들의 뼈와 살을 짓밟고 돌아다니며, 그 슬프고도 잊혀진 자손들의 영혼을 탐닉했다.

루시안은 칼날처럼 예리한 채찍이 한쪽 어깨를 곧장 파고들 때까지도 상대를 보지 못했다. 채찍은 그를 말에서 끌어내리고 총을 쏘는 쪽 팔을 못 쓰게 만들어 버렸다. 세나는 연인이 떨어뜨린 총을 잡으려 뛰어들었으나, 그녀 역시 악마의 힘에 당하고 말았다. 땅바닥에서 화염이 벽처럼 솟구쳐 오르더니, 음산한 웃음이 들려왔다. 창백하고, 눈이라고는 구멍 두 개뿐인 쓰레쉬의 머리통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쓰레쉬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태고의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심연처럼 깊은 목소리였다. 루시안은 그 야수가 세나에게 칼을 꽂는 것을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목격했다. 전투는 고작 몇 초만에 끝났다. 사실 쓰레쉬는 시작하기 전부터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악마는 땅에 쓰러진 세나를 굽어보고 섰다. 공기는 살을 에듯 차가웠으나, 쓰레쉬의 몸 안쪽에서는 화염이 구불구불 피어올랐다. 쓰레쉬는 돛처럼 부풀어 오른 누더기 코트 안쪽에서 날이 깔쭉깔쭉한 칼을 꺼내들었다. 루시안은 쓰레쉬의 소굴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십여 군데 마을에서 쓸쓸하게 버려진 시체를 여러 번 보았다. 또한 쓰레쉬와 마주친 불운한 마차들에서도 그런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래서 쓰레쉬에게 붙잡혔을 때의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리고 늘 그 각오를 되새겼다. 하지만 어리석은 풋내기 보안관이 맞이해 마땅한 운명에 세나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사악한 살육의 축제를 벌였던 쓰레쉬가 순간적으로 재미있겠다는 기분이 들어 루시안에게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은.

그거야 간단한 일이지. 루시안은 생각했다. 너무 확실해서 1초도 주저할 것이 없었다.

세나 대신에 자신의 영혼을 가져가겠다는 제안이었으니까.

그러자 그림자가 루시안의 육신을 장악했다. 그의 몸 안에서 증오와 수치심이 들끓어 올랐고, 그의 오감을 점령했다. 세나의 애원하는 두 눈 앞에서, 루시안의 육신은 타락해 버렸다. 거래는 끝났고, 봉인은 찍혔다. 그리고 루시안의 시야가 화염으로 가득 찰 무렵, 그는 자신이 사냥하기로 했던 악마가 세나의 무력한 육신으로 몸을 숙이는 것을 보았다. 놈은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뜨리며, 기어코 세나의 심장을 가져갔다.
뉴 에덴의 신성한 목사의 정체나 내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힘이 서부를 넘어 동부 지역까지도 퍼져나갔다는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서부 주민들은 그 목사가 죽은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소문을 즐겨 퍼뜨렸지만,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북서쪽의 미개척 지대로 떠난 순례 행렬 중에 살아 돌아온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하물며 뉴 에덴으로 향했던 사람 중에 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부근의 언덕에서 뉴 에덴을 내려다보고 있는 루시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뉴 에덴은 교회를 둘러싼 소규모 공동체였지만 악천후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숲에 사는 야수들의 습격도 받지 않았다. 자그마하지만 번창 일로에 있었다. 공동체 주변의 밭은 작물이 풍성했고 예스러운 분위기의 건물들은 생기가 흘렀다. 흙먼지가 날리는 도로를 아이들은 뛰어다녔고 장사꾼과 주민들은 평온하게 걸어다녔다. 악마, 외부인, 마녀, 거인은 물론이고 오래 전부터 서부의 황야에서 활개치는 강도떼의 기계 무기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맑고 깨끗한 장소였다. 루시안은 잠시, 자신은 이미 악마와의 결투에서 져 버렸고 눈앞의 이 광경은 악마가 위로 삼아 보여주는 보상인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는 언덕을 내려갔다. 뉴 에덴 주민들은 불쑥 나타난 낯선 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신성한 목사님을 만나러 오셨나요?" 해말간 얼굴의 젊은이가 물었다.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낯선 이여, 할렐루야!" 젊은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주 정확히 찾아오신 겁니다."

루시안이 기억하는 그 어떤 마을이나 도시의 모습도 뉴 에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빵집을 지나자 갓 구운 빵의 향기가 그의 콧속을 가득 채웠다. 거리 곳곳에서 젊은 여성들이 춤을 추었고 악사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예배당에서는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서부에 만연한 폭력과 광기는 단 한 순간도 끼어든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루시안이 길을 걷는 동안 주민들은 인사를 건네고, 갖고 있는 음식이나 물을 권하고,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 중인지를 물었다.

루시안의 내면에 있던 악마가 격렬하게 날뛰었다. 하지만 이렇게 밝은 대낮에는 악마를 눌러버리고, 통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뉴 에덴에는 무언가 루시안을 차분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아주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여기선 아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루시안이 돌아보니 다정한 느낌의 노인이 서 있었다. 목사들이 입는 검소한 프록코트 차림이었다. 나이 때문에 눈색은 바랬지만 젊은이 못지않은 생기가 반짝였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건 삶을 두려워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불확실성에서 나오는 올가미 같은 유혹을 모르는 삶을 살 수 있답니다."

루시안은 노인이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마치 노래하듯 경쾌한 억양이었다.

"그걸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루시안이 대답했다.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노인은 무심히 걷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그를 따라갔다.

"우리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땅에 살고 있지요. 그들은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좋든 나쁘든 말이지요. 그들이 재앙을 일으키는 것도 볼 수 있어요. 이 세계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우리의 신들 중 다수는 아직 살아 있어요. 그리고 그들의 자손인 우리를 지금도 굽어보고 있는 거지요."

노인은 마을 중앙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하얀 벽과 파란 지붕이 마치 그림처럼 보이는 교회가 하나 서 있었다. 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스테인드 글라스 창도 어찌나 광나게 닦여 있는지 반짝반짝거렸다. 어른들은 교회를 들락날락하며 웃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그 다리 사이를 누비며 뛰어다녔다. 건물은 마치 어제 지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신들은 믿는 자에게 많은 선물을 내려줍니다. 삶이라는 선물, 사랑이라는 선물이죠."

노인이 몸을 돌려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다 안다는 듯한 미소가 그 얼굴에 떠올랐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선물도."

무언가 기묘하다는 느낌이 루시안의 귓전을 울렸다. 그건 노인이 죽음을 말하는 방식이었다. 그 소리가 노인의 입술에서 만들어지는 방식이었다. 마치 연인에게 비밀을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나가던 주민들도 순간 입을 다물면서 마치 꿈을 꾸듯 눈을 감더니, 그 기묘한 선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눈을 떴다.

"안에 들어가 있을 테니, 마음이 내키시면 언제라도 들어오세요." 노인이 말했다. "참, 사람들은 나를 카서스 목사라고 부르지요. 당신에게 보여줄 게 아주 많군요."
교회 내부도 역시 말끔하고 온통 흰색이었다. 신도들이 앉은 의자도 광이 났지만, 설교단은 검소했다. 카서스는 안에 있던 신도들에게 손을 내저어 밖으로 내보냈다. 신도들은 밖으로 나가며 루시안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곁을 지나갈 때 "환영합니다."라고 속삭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양 손바닥을 부딪혀 차분히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루시안에게, 뉴 에덴은 문 밖의 세계에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이 작은 마을이 평온한 것이야말로 저 카서스라는 목사가 어떤 종류든 무언가 힘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루시안의 내면 깊숙한 안쪽에서, 그림자가 격분했다. 또다시 살갗 아래쪽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영혼 어두운 구석에서 불꽃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입술이 뒤틀리며 상대를 조롱하는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지금 그림자는 겁을 먹고 있었다. 루시안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이런." 카서스가 말했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지금은 그러면 안 되겠지요."

목사는 조그만 책을 집어들었다. 검은 표지에 황금색 열쇠 문양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목사가 부드럽게 손을 저으며 뭐라고 몇 마디 중얼거리자마자, 악마는 급작스럽게 조용해졌다. 하지만 루시안은 느꼈다. 악마는 조용해지기 직전, 그 짧은 찰나에 루시안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꺼져가는 장작불이 내는, 낮게 타닥거리는 소리로.

"저들이 괴물이다."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땅에서, 당신은 무엇이 될지 궁금해지는군요." 카서스가 빛 바랜 사제용 천을 어깨에 두르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루시안에게 자기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손짓했다. 루시안은 시키는 대로 했다. 그 자신도 놀랄 일이었다.

"왜 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요?"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사방의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뉴 에덴을 가득 채우던 발랄한 음악 소리는 서서히 비틀리면서 기이하고 구슬픈 가락이 되어갔다. 카서스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목사의 미소는 더욱 커졌다. 루시안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뒤쪽 마루널에서 뭔가가 잽싸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안이 너무나 잘 아는 소리였다.

"우리는 자신을 두려움에 너무 많이 내줍니다." 카서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 깊어지고 더 어두워졌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대부분을 내주었군요."

늙은 목사의 주변에 에너지가 소용돌이쳤다. 그 안에서 빛을 내는 파란색과 초록색 형상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더니 루시안이 잃었던 친구들과 루시안이 죽였던 것들을 닮아갔다. 그 형상들은 교회 서까래를 배경으로 춤을 추었다. 교회는 이제 다 쓰러져 가는 건물로 변했다. 하얀 칠이 벗겨지면서 시커멓게 썩어가는 벽이 드러났다.

루시안은 등 뒤에 적어도 열 개가 넘는 형체가 있음을 감지했다. 어떤 것은 네 발로 기었고, 또 어떤 것은 뒤틀리고 부서진 신도석에 올라갔으며, 또 어떤 것들은 아직 교회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인간인 척했던 외양은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루시안은 이제야 깨달았다. 왜 이 마을은 온전했는지, 왜 주민들은 그토록 착하고 친절했는지.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전에는 인간이었으나 아주 오래 전에 죽었다고 해야 옳을까.

루시안은 양손을 조금씩 권총 쪽으로 움직였다.

목사는 이제 키가 엄청나게 커져서 루시안을 굽어보고 있었다. 황금 열쇠를 새긴 책을 단단히 붙든 채, 목소리가 겹쳐져 광적인 합창처럼 들리는 설교를 사방이 쩌렁쩌렁하도록 늘어놓고 있었다. "우리의 혼은 죽음의 서늘한 물 속에서 정화되리라! 우리의 망가진 영은 제 모습을 찾으리라! 우리가 잃었던 것들은 되돌아오리라!"

루시안의 뒤쪽에서, 괴물들이 굶주림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앞으로 기어나왔다. 카서스는 양팔을 활짝 벌리고 퀴퀴한 냄새 가득한 공기 중으로 몸을 더 높게 띄워올렸다. 그 주변을 루시안의 과거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빙글빙글 돌며 되풀이되었다. 남자와 여자들이 죽고 죽고 또 죽었다.

문득 친숙한 목소리가 루시안의 귓전을 스쳐지나갔다. 어떤 단어를 말한 듯했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카서스가 물었다.

루시안은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타닥타닥거리는 서사시, 장작불의 잿더미, 성냥이 마찰하는 소리였다. 세나의 죽음을 이야기했고, 루시안이 얼마나 큰 절망에 빠졌는지를 이야기했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 버린 보안관은 몇 년 동안이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이름 말고는 모든 것이 죽어버렸고,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하루 이틀 날이 갈수록, 처음에는 조그마했던 잔혹한 그림자가 그의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루시안의 내면에서 마구잡이로 자라났고, 내면의 어둠은 루시안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날뛰었다. 이 고투를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제아무리 위험하거나 어리석은 방안이라도 시도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시안은 죽은 이와 이야기할 수 있다는 남자에 대해 들었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루시안은 이미 자신의 끔찍스러운 증오를 형상화한 그림자에게 자신을 내주었고, 그 그림자가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용납한 터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루시안은 교회에서도 뉴 에덴의 거리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악마와 단 둘이,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달빛이 비추고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이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루시안의 살갗에 닿았다. 저 멀리 산꼭대기에 마을이 있는지 점점이 불빛이 보였고, 달은 하늘에 낮게 걸려 있었다. 악마가 발을 디딘 땅의 꽃들은 화염에 휩싸여 타버렸지만, 정작 악마는 차분하게 서 있었다. 얼굴에는 낯익은, 탐욕스럽게 일그러진 웃음을 띠고 있었다.

루시안은 공기를 들이켜 보았다. 그는 자신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그림자에게 내주었다. 쓰레쉬에게, 그리고 가차 없는 서부에게도… 하지만 루시안은 아직 자신의 영혼은 놓지 않았다. 비록 반쯤 타락하긴 했어도, 그리고 그림자가 그 일부이기는 했어도.

그림자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한 발을 디딜 때마다 꽃들이 더 많이 타들어갔다.

루시안은 한 손을 내밀었고, 그림자는 시커멓게 탄 한 손을 그 위에 얹었다. 그림자가 속삭였다. "너의 적들을 불 속으로 던지겠는가?"

루시안은 침묵을 지켰다. 그림자가 닿은 손의 살갗이 치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그림자는 다시 속삭였다. 이번에는 루시안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 잿빛 몸뚱이가 루시안의 육신과 연결되어 있을 때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함께 할 것이다."
"그대가 잃은 사랑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카서스가 노래했다.

루시안은 권총을 빼들었다. "아니."

루시안의 한 팔이 길게 늘어나면서 내면에 잠들어 있던 악마의 총과 하나가 되었다. 불경스러운 화염 한 줄기가 카서스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혔다. 목사가 쓰러지자, 루시안은 몸을 휙 돌려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그때 부서진 신도석 어딘가에서 악귀 하나가 괴성과 함께 그에게 달려들었다. 루시안은 다시 총을 쏘아 악귀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고, 쪼글쪼글 오그라든 채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다른 악귀들, 악사, 제빵사, 춤추는 여자, 농부들이었으나 이제는 뒤틀리고 텅 비어버린 형체들에 세 번째로 총탄을 발사했다. 총탄은 악귀들 한가운데에서 폭발했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자 다 쓰러져가는 교회의 문과 창문, 출입구에 공포가 홍수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뉴 에덴이 루시안을 맞으러 일어섰다.

루시안의 몸을 그림자가 잠식했다. 공포의 화염이 격류가 되어 괴물들을 집어삼키자 그림자는 양팔을 번쩍 쳐들었다. 악마는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고, 그 목소리는 루시안 자신의 목소리와 섞여들었다. 지옥의 불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와중에 악마는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교회 천장의 나무판자가 불이 붙은 채 떨어져내렸고, 마구 쏘아대는 총탄은 무너지기 직전인 교회 벽을 뚫고 나가 뉴 에덴의 거리로 퍼져나갔다. 마을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악귀들은 공포에 찬 괴성을 지르며 마을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악마는 그들보다 빨랐다. 폭삭 주저앉은 교회에서 빠져나온 악마는 엉망이 된 거리를 누비며 떡 벌린 악귀들의 입을 향해 지옥의 총탄을 닥치는 대로 발사했다.

그때, 루시안은 악마의 몸을 뚫고 뛰쳐나왔다. 악마의 몸뚱이는 잿빛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언데드 악귀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동안, 루시안은 두 권총을 하나로 모아 잡았다. 총의 금속에 깃든 인공 마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정교한 선 세공 문양이 바깥쪽으로 소용돌이치면서 두 총구가 굶주린 듯 하나로 합쳐졌다. 그 안쪽 어딘가에서 한 줄기로 모인 빛의 섬광이 뿜어져나왔다. 섬광은 평원을 사정없이 갈랐고, 괴성을 지르며 도망가던 악귀들은 그 광포한 불꽃 아래 말 그대로 녹아버렸다.

얼마 안가 섬광은 희미해졌다. 루시안이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는 동안 총은 저절로 다시 분리되었다.

루시안은 기다렸다. 그의 내면에 있는 그림자는 이제 조용했다. 불타오르는 낡은 건물에서, 아니면 썩어버린 작물 틈바구니에서 뛰쳐나오는 악귀도 더 이상 없었다. 카서스의 시신은 교회 건물이 무너져 내릴 때 그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가 무시무시한 마법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기억조차 거센 불길에 자취도 없이 타 버릴 것이다. 하지만 루시안은 곁눈으로나마 똑똑히 보았다. 불타는 교회 지붕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 그 밑에서 뉴 에덴 주민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나이 든 목사의 얼굴을.

이윽고 전직 보안관은 몸을 돌려 문명세계 쪽으로 향했다. 그가 걷기 시작했을 때, 씨익 웃는 그림자가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루시안은 세나와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뻔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이제 더 이상 오래된 의식과 주문이 가져다주는 위안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에게는 세나를 다시 만날 기회가 올 것이었다. 죽어서 땅에 묻히면 되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정 용맹한 총잡이가 마땅히 맞이할 결말이었다. 그때가 오기까지는,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끔찍한 일이 무수히 많고, 그건 곧 그 악마가 문을 두드릴 것이라는 의미다.

저 드넓은 개척지대의 광대한 땅 어딘가에, 루시안이 처치해야 할 악마가 아직 살아 있다.

6. 펄스 건 스킨 세계관

6.1. 시간을 거슬러

이즈리얼/배경 문서 참고 바람.

7. 구 배경

7.1. 단문 배경

한 때 빛의 감시자였던 루시안은 죽지 못한 영혼인 언데드를 지칠줄 모르고 추적해 고대의 마력이 깃든 한 쌍의 총으로 섬멸하는 죽음의 사냥꾼이다. 죽은 아내의 복수심에 사로잡힌 루시안은 아내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인 쓰레쉬가 파괴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비 없고 외골수인 루시안은 복수의 길을 가로막는 그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는다. 누구든, 어떤 것이든 루시안을 막으려는 멍청한 짓을 한다면 마법의 총의 압도적인 포화에 맞아 나가 떨어질 것이다.

7.2. 장문 배경

"감사해라. 내가 널 파괴하면 너는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누군가를 지키려고 싸우는 사람은 무서울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 언데드 사냥꾼 루시안은 언제나 혼자서 행동한다.

고대의 마력이 깃든 한 쌍의 총이 루시안의 무기다. 그의 투철한 신념은 어떤 끔찍한 적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양손에 든 총구에서 뿜어 나오는 정화의 불길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마물들을 태워 없앤다. 언데드의 육체 안에 사로잡혀 안식을 얻을 수 없는 영혼들을 저승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그의 사명, 루시안의 존재 이유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잃어버린 것들을 위해 싸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영원히 잊을 수도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안식을 위하여.

루시안이 사용하는 한 쌍의 무기처럼 그에게도 한때 영혼의 짝이 있었다. 루시안과 그의 아내 세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오랫동안 룬테라를 지켜왔다. 사악한 마물들의 침략으로 삶과 죽음의 틈새에 사로잡힌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들은 정의의 등불을 자처했다. 루시안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굳건한 신념이 있었고, 세나에게는 속박에서 벗어난 영혼들을 달래줄 수 있는 특유의 상냥함과 다정함이 있었다. 그 누구도 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림자 군도의 악령들은 과거의 적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저주받은 섬에서 마물들이 몰려나와 발로란 곳곳에 출몰하자 루시안과 세나는 악을 섬멸하기 위해 그들이 나타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게 되었다. 어지간한 전사라면 공포스러운 마물과의 지난한 싸움을 버텨낼 수 없었겠지만 루시안과 세나는 그 누구보다 용감했고 절대 패배하지 않았다. 적어도 영혼 약탈자 쓰레쉬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쓰레쉬는 지금껏 마주친 그 어떤 언데드보다도 강력했으며 그 사악한 마물과의 사투는 결국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예상치 못한 함정이었다. 궁지에 몰린 쓰레쉬는 간교한 속임수를 부렸고 세나의 영혼은 쓰레쉬의 영혼 감옥에 갇혀 영영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언데드와의 전투를 시작한 이래 언제나 자신의 아내와 함께였던 루시안은 이제 혼자서 그 사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지옥의 간수는 그저 한 사람의 영혼을 더 수집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림자 군도의 악령들은 이제 그 누구보다 강력하고 위험한 적에게 쫓기게 되었다. 어두운 집념의 화신이 된 루시안은 룬테라에서 언데드를 완전히 전멸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 손에 자신의 총을, 또 다른 한 손에는 세나의 총을 쥐고서, 루시안은 그녀의 뜻을 이어 최후까지 사명을 완수하겠다고 맹세했다. 비록 세나를 되찾아올 방법은 이제 없지만 언젠가 그녀의 영혼에 안식을 찾아줄 그 날을 고대하면서. 언데드 사냥꾼 루시안은 언제나 그녀와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