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레지날드 그레이 Reginald Grey | |
생몰년도 | 1240년경 ~ 1308년 4월 5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더비셔 셜랜드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윌튼 | |
아버지 | 셜랜드 기사 존 그레이 | |
어머니 | 에마 드 카우즈 | |
아내 | 모드 드 롱챔프 | |
자녀 | 존 그레이 | |
직위 | 초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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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2. 생애
그레이 가문은 노르망디 공국의 기사 안체틸 드 그레이가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한 뒤 사우스 옥스퍼드셔에 있는 레드필드와 그레이스 코트의 영지를 받은 이래 잉글랜드 중부에서 여러 토지를 소유한 기사 집안이었다. 아버지 존 그레이는 헨리 3세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를 때 참여했으며, 1253~1255년에는 가스코뉴의 총독을 지냈다. 시몽 드 몽포르 등이 헨리 3세에게 도전했을 때 시몽의 편을 들었지만, 나중에는 헨리 3세 편으로 돌아섰고,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했을 때 웨일스에서 왕실군을 이끌고 시몽과 맞섰 뒤 더비셔와 노팅엄셔의 보안관을 역임했다. 어머니 에마 드 카우즈는 기사 로저 드 카우즈의 딸로, 존 그레이의 두 번째 아내였다.1257년 헨리 3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고, 1266년 3월 18일 이전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잉글랜드 왕국의 7개 주(베드퍼드셔, 버킹엄셔, 헌팅던셔, 글로스터셔, 에식스, 체셔, 헤리퍼드셔)에 걸쳐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다. 또한 결혼을 통해 윌트셔에 있는 윌튼 영지를 인수했고, 그곳을 자신의 주거지로 삼았다. 1266년 노팅엄셔와 더비셔의 보안관, 노팅엄 성주를 역임했고, 1268년 노샘프턴 성주가 되었으며, 1270년 체스터의 순회 판사이자 체셔의 보안관을 맡아 1274년까지 역임했고, 1281년 체스터의 순회판사로 선임되었다.
1277년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한 뒤 푸르페트와드의 지배권을 얻었다. 그는 새로 확보한 영지에 살던 웨일스인들을 가혹하게 수탈해 1282년 웨일스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후 에드워드 1세의 2차 웨일스 원정에 참여해,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과 함께 클루이드 계곡으로 진군해 웨일스가 잉글랜드 왕국에 최종적으로 정복되는 데 기여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루틴 성이 있는 옛 귀네드 왕국의 영지를 수여했다. 1295년, 레지널드는 초대 윌튼의 그레이 남작으로서 의회에 소환되었다.
그 후 레지날드는 웨일스의 영주로서 왕실군에 경보병을 공급하는 임무를 정기적으로 수행했다. 1294년 가스코뉴 원정을 떠나는 에드워드 1세를 위해 신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했다가 웨일스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다. 1298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폴커크 전투에서 윌리엄 월레스의 스코틀랜드 반란군을 무찌르는 데 일조했다. 1301년,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이자 웨일스 공인 에드워드 왕자에게 웨일스 영지의 주권자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1307년 7월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2세가 즉위한지 7개월 후인 1308년 4월 6일에 윌튼에서 사망했다.
레지날드는 생전에 윌튼의 영주 헨리 드 롱챔프의 딸인 모드와 1267년경 결혼하여 외아들 존 그레이를 낳았다. 존 그레이는 아버지 사후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