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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에고 밀리토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1.1. 라싱 클루브
1979년에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를 닮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디에고 아르만도라고 이름 붙였지만 부인과 친척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디에고 알베르토라는 이름이 되었다.온 가족이 인디펜디엔테의 서포터였지만 동생 가브리엘에 대한 라이벌 의식 때문에 라싱 클럽을 응원했다고 하며 9세의 나이로 라싱 클루브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14세때 9군(유스조직의 가장 아래에 있는 카테고리)에 입단했고 1998년에 4군(1군 바로 아래의 카테고리)에서 리그 우승을 이뤄낸뒤 1군으로 승격했고 1999년 12월 11일에 1군 데뷔를 이뤄냈다. 2001년 아페르투라에서는 35년만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1.2. 제노아 CFC
아르헨티나의 실적으로 2003-04시즌 세리에 B의 제노아로 이적하면서 다음 시즌은 39 경기에 출전해 득점 순위 2위로 21골을 기록하여 클럽을 10년 만에 세리에 A 승격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클럽이 승부조작 사태에 연루되며 제노아는 세리에 C1(3부) 강등을 피할 수 없게되었다.1.3. 레알 사라고사
2005년 여름에는 동생 가브리엘 밀리토가 속한 스페인 사라고사로 이적했는데, 원래는 클라우디오 로페스와 합의 직전 이었지만, 개막 직전에 디에고 밀리토 영입에 초점을 맞춰 바로 이적 시장이 닫히는 2005년 8월 31일 이적료 200만 유로에 이적이 결정했다. 매입 옵션을 포함하여 2년간 임대했다. 이미 시즌이 개막하고, 원정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0-0 무승부를 거뒀다. 사라고사에 결정력있는 공격수가 부족한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그당시 톱라인 스쿼드에는 FC 바르셀로나의 칸 테라 출신으로 아직 젊은 세르히오 가르시아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이적해 온 에베르톤 두 명의 공격수만 재적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이적료 1,200만 유로에 발렌시아 CF로 이적 한 다비드 비야를 대체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되었다.2005년 9월 11일의 2라운드, 발렌시아 전에서 라리가를 데뷔했을 때는 득점이 없었지만, 4라운드 오사수나와의 경기에서 올린 득점은 사라고사의 유니폼을 입고 라고 홈 라 로마레다 스타디움에서 올린 첫 골이 되었다. 이후 2005-06 시즌 코파 델 레이 준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6:1 스코어로 이긴 경기 중 4골을 넣으며 믿을 수 없는 잠재력을 보여줬다. 그 해 밀리토는 레알 사라고사에서 15골을 넣은 탑스코어러로 시즌을 마쳤다.
2006-07 시즌, 두 명의 아르헨티나 대표 파블로 아이마르와 안드레스 달레산드로 영입되면서 팀이 전력이 더욱 상승, 스페인식 원하는 공격 축구를 표방하는 빅토르 페르난데스 감독 아래, 통산 23골을 기록하고 클럽을 UEFA컵 출전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2007-08 시즌, 자신은 안정된 결과를 내면서도, V 페르난데스 감독과 달레산드로과의 불화와 감독의 해임, 디펜스 라인의 불안정 등의 악조건이 겹쳤다. 2008년 4월에 왼쪽 발목을 다쳐 한때 소집 명단에서 제외했지만, 그때까지 15골을 득점해 랭킹 2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발목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로 복귀했을 때는 결국 이후 팀은 1점도 기록하지 못하고, 마지막 라운드의 5월 18일, 5년만의 세군다 디비시온(2부) 강등이 결정됐다.
1.4. 제노아 CFC 2기
2008-09 시즌에는 제노아로 복귀했다. 잔 피에로 가스페리니 공격의 중심에 밀리토를 잡고 득점을 양산했는데. 15라운드, 삼프도리아와 제노아 더비에서 결승골을 기록. 결국 팀은 5위를 차지해 UEFA 유로파 리그 출전권을 획득했다. 2008-09 시즌에는 볼로냐의 마르코 디바이오와 함께 24득점을 기록,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에 이어 득점 순위 2위를 차지했다.[1]1.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71경기 75골 29도움
2008-09 시즌 종료 후 티아고 모타와 함께 인테르로 이적했다.[2] 2009-10 시즌에는 주제 무리뉴 감독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3], 거의 모든 경기에 스타팅 멤버로 출전. 투톱과 원톱 가리지 않고 뛰며 인테르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또한 훌륭한 승부사적 기질을 자랑했는데,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에서 결승전의 멀티골을 포함하여 매 라운드마다[4] 득점을 했으며, 세리에 A 우승의 향방을 결정 짓는 38라운드 시에나전,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도 결승골을 득점, 해당 시즌 인테르가 트레블을 결정짓는 모든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는 대활약을 펼쳤다. 리그에서는 22골로 득점 2위,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6골을 넣으며 득점 4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밀리토는 해당 시즌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와 세리에 A 올해의 외국인 선수에 선정되었으며, UEFA 올해의 공격수와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까지 수상했다.
2009/10 시즌: 52경기(선발 47경기) 30골 8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5 | 33 | 2 | 22 | 5 |
챔피언스 리그 | 11 | 11 | 0 | 6 | 3 |
코파 이탈리아 | 5 | 2 | 3 | 2 | 0 |
수페르코파 | 1 | 1 | 0 | 0 | 0 |
합계 | 52 | 47 | 5 | 30 | 8 |
그러나 그 다음 시즌에는 회광반조라는 단어 그대로를 보여주고 말았다. 10/11 시즌에 보여준 밀리토의 모습은 지난시즌 리그에서만 32경기 22골, 시즌 종합 52경기 30골을 넣고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상과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을 동시에 받았던 폭발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즌에서는 리그에서는 23경기 5골, 시즌 종합 34경기 8골이라는 엄청난 부진을 거듭하며 2011년에는 한 해만에 비도네 도로, 우리나라에는 황금쓰레기통상으로 잘 알려진 상을 받을 정도였다. 즉, 세리에 A 에서 시즌 시작을 기준으로 기대에 가장 못미치는 선수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시즌 트레블의 최대 공신 중 하나로 평가받았던 선수와 같은 선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심각하게 하락한 폼을 보여준 것이다. 이로 인해 2010년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가 처음 합쳐진 FIFA 발롱도르에서도 2010 남아공 월드컵 부진과 겹쳐 최종 후보 23인에 선정되지 못하게 되었다.[5] 사실 부진의 원인은 아무래도 같은 시기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던 같은 나이의 디에고 포를란처럼 노쇠화로 인한 기량 하락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리고 전 시즌 트레블에 크게 기여했을때의 밀리토의 나이도 이미 31세였다.[6]
2010/11 시즌: 34경기(선발 24경기) 8골 9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23 | 16 | 7 | 5 | 7 |
챔피언스 리그 | 4 | 3 | 1 | 1 | 0 |
코파 이탈리아 | 3 | 1 | 2 | 1 | 0 |
수페르코파 | 1 | 1 | 0 | 0 | 1 |
슈퍼컵 | 1 | 1 | 0 | 0 | 0 |
클럽 월드컵 | 2 | 2 | 0 | 1 | 1 |
합계 | 34 | 24 | 10 | 8 | 9 |
2011/12 시즌: 41경기(선발 35경기) 26골 5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3 | 29 | 4 | 24 | 3 |
챔피언스 리그 | 7 | 5 | 2 | 2 | 2 |
코파 이탈리아 | 1 | 1 | 0 | 0 | 0 |
합계 | 41 | 35 | 6 | 26 | 5 |
2012/13 시즌: 26경기(선발 23경기) 9골 6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20 | 19 | 1 | 9 | 3 |
유로파 리그 | 6 | 4 | 2 | 0 | 3 |
합계 | 26 | 23 | 3 | 9 | 6 |
2013/14 시즌: 18경기(선발 7경기) 2골 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17 | 6 | 11 | 2 | 1 |
코파 이탈리아 | 1 | 1 | 0 | 0 | 0 |
합계 | 18 | 7 | 11 | 2 | 1 |
1.6. 라싱 클루브 2기
2014년 여름 10년 만에 친정팀에 복귀하게 됐다. 계약연장을 하지 않는다면 2016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듯 보이며, 5월 27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1] 이때, 세 선수가 마지막 경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모두 24득점을 기록하고 있어 세 명이 동시에 수상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즐라탄이 막판에 한 골을 더 추가하면서 단독으로 득점왕에 올랐다.[2] 2004-05 시즌 종료 후 인테르에서 이적 제의를 했으나, 동생과 함께 뛰어 보고 싶어 레알 사라고사로 이적했다고 밝힌 바 있다.[3] 이후 무리뉴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할 때 밀리토 영입을 시도하기도 했었다.[4] 16강 1차전 선제골, 8강 1차전 결승골, 4강 1차전 1골 2도움, 결승전 2골.[5] 다만 밀리토의 2010년 FIFA 발롱도르 최종 후보 23인 탈락은 같은 팀 동료인 베슬리 스네이더의 포디움 탈락과 함께 2020년대 현재까지도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그럴만도 한게 비록 2010 월드컵과 10/11 시즌 전반기에 부진했지만 그래도 09/10 시즌 인테르의 트레블에 가장 크게 일조하여 2010년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세리에 A 올해의 선수까지 수상한 것이 밀리토였기 때문이다.[6] 실제로 포를란도 아틀레티코에서의 마지막 시즌은 노쇠화로 인한 잔부상과 기복으로 많은 고생을 하여 모든 대회 통틀어 42경기 10골 5도움이라는 과거 시즌들과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골든볼을 수상한 선수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아쉬운 기록을 남겼고, 그나마 국대에서 우승을 차지한 2011 코파 아메리카에서의 골도 결승전에서의 두 골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후 밀리토는 재기에 성공해서 아래와 같이 리그에서 24골을 넣으며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포를란은 아예 그동안 이어져왔던 하향세가 인테르에서 정점이 되어 리그에서 2골만 넣는 엄청난 부진을 모습을 보이고 그 이후에도 유럽 빅리그가 아닌데도 리그에서 10골 이상을 넣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몰락하고 만다.[7] 우디네세의 안토니오 디 나탈레에 이어 득점 2위[8] 얼마나 심각했나면 12/13 시즌은 리그 20경기 9골, 13/14 시즌은 리그 17경기 2골을 넣는 엄청난 부진을 보여주었다. 다만 이 마지막 두 시즌의 부진은 단순 노쇠화 때문만이 아닌 2013년 초에 당한 십자인대 부상의 여파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