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5F7F67> | 더 섀그스 The Shaggs | }}} | |
<colbgcolor=#5F7F67><colcolor=#FEEF54> 국적 | 미국 | |||
결성 | 1968년 | |||
미국 뉴햄프셔 프레몬트 | ||||
데뷔 | 1969년 6월 15일 | |||
데뷔 앨범 | ||||
해체 | 1975년 | |||
재결성 | 1999년, 2017년 | |||
장르 | 개러지 록, 익스페리멘탈 록 | |||
멤버 | 도로시 위긴 (리드 기타) 베티 위긴 (리듬 기타) 헬렌 위긴 (드럼) 레이첼 위긴 (베이스) | |||
레이블 | 서드 월드, 레드 루스터, 라운드 월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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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활동하고, 1999년, 2017년에 재결성 공연한 위긴(Wiggin)가의 자매들로 구성된 미국의 록밴드.2. 상세
멤버는 도로시(도트) 위긴(보컬, 리드기타), 베티 위긴(백킹 보컬, 리듬기타), 헬렌 위긴(드럼),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레이첼 위긴(베이스)이었다. 그 외에도 그들과 남매지간인 오스틴 주니어 위긴과 조카인 로버트 위긴이 남자 보컬로 가끔 활동하기도 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더 후, 비틀즈 등과 함께 펑크 록, 아방가르드 역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음악가로 평가받는다.
커트 코베인은 그녀들의 앨범을 명반으로 지정하기도 했고 프랭크 자파가 사랑한 밴드였으며, 평론가 레스터 뱅스는 비틀즈보다도 위대한 록밴드라는 표현까지 바 있었다. 물론 비틀즈보다 위대하다느니 비틀즈보다 대단하다느니 하는 미디어에서의 표현은 꼭 정확한 우열비교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어떤 새로 발견된 뮤지션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점을 파격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쓰는 수식어적인 표현에 가깝다. 특히 너무 과소평가 받는다고 여기거나 대중에게 안 알려져 있는 존재를 확 띄우고 싶을때 영미 평론가들은 저런 식의 자극적인 문구를 쓰곤 한다.
후일 실험 음악계에서도 추앙받는 존재로서 윌코, 디어후프 등의 실험 음악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그녀들을 향한 트리뷰트 앨범도 발매되었을 정도였다. 뮤지션의 영향력 뿐만 아니라 메타크리틱, 피치포크 등의 각종 평단에서도 높은 점수의 찬양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위에 언급된 것은 100% 사실임을 알린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3. 실체
이 밴드는 연주를 지지리도 못하고 음악의 기초조차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그들의 유일한 스튜디오 앨범 Philosophy of the World의 수록곡들, 특히 "My Pal Foot Foot"을 들어보면 안다. 30분 내내 보컬과 기타가 드럼과 전혀 다른 리듬을 따라가며, 지속적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리듬과 멜로디가 뒤바뀌고 악기 튜닝은 전혀 되어있지 않은 등 음악 전체가 불규칙하고 기괴하다. 음악계의 더 룸.
이토록 재능이 없던 이들이 밴드를 결성한 이유는 아버지 오스틴이 자신의 딸들이 유명한 음악 그룹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틴의 어머니는 아들이 어렸을 때 세 가지 예언을 했는데, 아들이 스트로베리 블론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과 결혼할 것이고, 자신이 죽은 후에 딸을 두 명 더 낳을 것이며, 그리고 이후 딸들은 유명한 음악 그룹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앞의 두 예언은 밴드 결성 이전에 실현되었는데, 그냥 금발도 아니고 스트로베리 블론드라는 특정한 색깔의 금발, 그리고 자기가 죽은 후에 두 딸을 더 낳을 것이라는 것까지 들어맞았으니 단순히 우연이라기엔 신기할 정도로 잘 맞히긴 했다. 때문에 오스틴은 어머니의 예언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딸들에게 음악 활동을 강권했고 밴드 결성의 계기도 오로지 아버지의 강요 때문이었다.[4] 딸들은 음악에 별 흥미도 없었음에도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면서 악기들을 강제로 쥐게 되었으니 제대로 된 곡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탄생한 결과물은 위에 듣다시피.
사실 그냥 들리는 것으로만 따졌을 때 섀그즈의 음악 이상으로 특이하고 괴상하게 들리는 전위음악은 의외로 많지만, 섀그즈 음악은 그들을 뛰어넘는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건 바로 이 모든 불협화음이 절대 의도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는 점이다. 기존 음악과 음악계의 규범과 질서에 대해 거의 모르는 [5] 10대 소녀들이 아버지를 위해 진실하게 내놓은 음반이라는 점이 작품 전체에 다소 음울한 감성을 덧씌우며, 보컬인 도로시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잃어버린 고양이나 부모님의 중요성 등 건전가요나 동요에 나올법 한 주제에 대해 노래하며 기괴한 아이러니를 더해준다.[6] 이토록 해괴망측한 음악에 건전하고 순수하기 짝이 없는 주제의 가사라는 언밸런스한 조합으로 하여금 섀그스의 음악은 가히 세상에 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특이한 경험을 제공한다. 피치포크의 리뷰도 이 점을 강조해서 언급한다. 한 마디로 또 다른 것과 비유하자면,이제 이십대가 된 여자가 초등학생때의 감성과 순수함을 가지고서 아무 기초도 없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내키는대로 그린 그림 같은 느낌이랄까. 아이들 그림을 보면 조잡하고 기본기조차 없을 지언정 보기에 기분 나쁘지는 않은 경우가 많듯이, 그걸 이십대의 나이에 한다는 게 더 특이하면서도 재밌게 다가왔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고, 라이브 공연에서는[7] 관객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거기에 음반 제작자 측에서 상당수의 음반들과 제작비를 횡령하는 악재까지 겹치며 밴드 활동은 더더욱 구렁으로 몰리게 되었고, 앨범을 낸 뒤에도 몇 년 간 활동은 했지만 1975년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멤버들은 당연히 미련없이 밴드 활동을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기괴하고 자유분방한 음악이 라디오쇼에 출연한 아방가르드 음악의 거물 프랭크 자파의 취향은 저격한 건지 이들의 곡을 즐겨 연주한다는 발언을 한 걸 시작으로 더 섀그스는 여러가지 이유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1979년에 Philosophy of the World의 리이슈 음반이 발매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한 롤링 스톤지의 평은 '전두엽 절제술 받은 트랩 가족같다.' 이를 보다 못해 팬들은 My pal Foot Foot을 정상적인 곡으로 완성시켜 부르는 일도 있었다.
놀랍게도 오스틴의 어머니, 섀그스 할머니의 예언은 결국 정말로 사실이 되었다. 방향은 좀 이상할지 몰라도 어쨌건 일단은 음악사에 이름을 남기는 유명 음악 그룹이 되었으니 말이다.[8] 최악의 연주와 어설픈 가창이 되려 펑크 록과 전위 음악 뮤지션에게 각광을 받으면서 상기한 뮤지션들 이외에도 비트 해프닝이나 요 라 텡고, 하프 재패니즈, 레인코츠, 파스텔즈, 슬리츠, 바셀린즈 같은 인디 록 밴드라던가 존 존에게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오프웨이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2001년에는 여러 인디 뮤지션들이 모여 섀그스 음악을 커버하는 헌정 앨범을 내기도 했다. 해당 앨범의 수록곡인 유명 실험음악 밴드 디어후프의 My Pal Foot Foot 커버 직접적으로는 노이즈 팝/쟁글 팝의 하위 분파인 트위 팝의 선조로 꼽힌다. [9]
1975년 활동 중단 직전 1집 시절 일부 자작곡들과 당대 히트곡들을 커버하던 Shaggs' Own Thing이란 리메이크 앨범도 발매했는데, 의외로 한층 정돈되고 무난하게 들어줄만한 완성물을 들려주는 평범한 작품이다.[10] 수록곡 중 리메이크한 My Pal Foot Foot을 듣자면 엉망진창이던 리듬감이 상당히 개선되었는데 1집 녹음 당시가 프로듀싱 단계부터 얼마나 개판 분위기였는지 유추할 수 있는 부분.
1999년에 섀그스는 재결합 공연을 한번 열었고, 2006년에 드럼을 맡았던 헬렌이 사망하였다. 이후 섀그스의 팬이던 뉴욕의 뮤지션 몇 명은 밴드를 결성해 2012년에 섀그스 헌정 공연을 열고 도로시와 베티를 초대했는데, 여기서 도로시에게 아직도 여러 미완성/미발매곡과 악보[11]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제시 크라코우가 여타 뮤지션을 데리고 도로시와 밴드를 결성해 2013년 앨범 Ready! Get! Go!까지 냈다. 전반적으로 섀그스 때보다 훨씬 얌전하고 정상적인 편. 수록곡 중 하나 Banana Bike
이후 도로시의 밴드는 2015년에 뉴트럴 밀크 호텔 투어에서 오프닝 공연을 섰고, 2017년 6월에는 윌코의 솔리드 사운드 페스티벌에서 베티를 데리고 재결합 공연을 하였다. [12] 예전 미공개 곡을 녹음해 발매하고 리허설에도 잘 응하는 등 그래도 어느정도 음악에 뜻이 있었고 몇 차례 공연 경험이 있던 도로시랑 달리, 베티는 정말 음악에 관심을 끊었는지 리허설 때도 소극적이고 어쩔줄 몰라 했다고 한다. 베티가 재결성 합류한 것도 돈 때문이었으며 향후 더 할 의향이 없다고 도로시가 공연 후 밝혔을 정도. [13] 그래서인지 재결성 공연 평 자체는 '멤버들이 좀 굳어 있었던 같다', '실수로 만들어진 음악을 애써 재현한 것 같다' 등 미묘했던 편이다.
사실 이들은 당대 상당히 특이한 포지션이었다. 이들은 록 음악계 변방인 뉴햄프셔 출신의 갓 악기를 든 이웃집 소녀 이미지에 가까웠는데 이런 이미지의 여성 뮤지션은 없었다. 버블검 아이돌이나 디바를 제외한 당시 주류 여성 뮤지션은 캐롤 킹이나 조니 미첼처럼 자기고백적이고 지성적인 성향이 강했고, 섀그스 해체 후 등장한 패티 스미스나 데비 해리, 조안 제트는 도회적이고 날카로운 이미지에 가까웠다. 그나마 카펜터즈의 카렌 카펜터즈가 비슷하게 이웃집 소녀 이미지를 어필했으나 섀그스처럼 투박하고 어설픈 느낌은 아니었다. 그나마 화려하지 않은 이미지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밴드 아티스트로는 패니(Fanny)가 있겠으나, 이마저도 패니는 이웃집 소녀보다는 수수한 이미지에 가까웠고, 음악도 전위적이지 않은 하드 록에 가까워 비교 대상이라고 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당시 개러지 록 씬 역시 남자들 위주로 거칠고 반항적인 이미지를 내세웠다. 새그스와 비슷하게 아마추어스러움을 어필하는 여성 뮤지션은 포스트 펑크 시절부터 등장했다. 이들이 왜 인디 록 씬에서 추앙받는지 알 수 있는 부분.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더 섀그스는 미국 현지에서는 대표적인 아웃사이더 음악가로 꼽힌다. 아웃사이더 음악은 음악 산업 바깥에서 투박하고 괴짜스러운 음악과 더불어 지역 기반으로 소규모 활동을 벌이던 뮤지션들이 만든 음악을 일컫는다. 레지던츠나 다니엘 존스턴이 대표적. 로파이나 인디 음악 프로토타입이라 생각하면 좋다. 이 장르는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시절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이들은 60년대 말부터 등장했다. 레지던츠와 더불어 아웃사이더 음악가 중에서도 초창기에 속하는 인물인 셈.
4. 디스코그래피
4.1. Philosophy of the World
Philosophy of the World | |
<colbgcolor=#5F7F67><colcolor=#FEEF54> 발매일 | 1969년 6월 15일 |
4.2. Shaggs' Own Thing
4.3. Ready! Get! Go!
5. 관련 문서
- Met Romana Op De Scooter - 더 섀그스와 비슷한 사례로 그다지 좋지않은 가창실력에 병맛같은 뮤비에 가사로 인한 시너지로 인해 입소문을 타게 되어 아이튠즈 랭킹 98위를 찍게 되었고 가수 본인도 출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 레베카 블랙 -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허접한 음악 때문에 놀림감으로 시작했지만, 절치부심 끝에 뮤지션으로서 우뚝 서게 된 인물.
[1] 국내는 물론 서양권에서도 프랭크 자파의 어록으로 잘못 알려져서 오기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론 프랭크 자파가 아니라 평론가인 레스터 뱅스가 한 말이다.[2] 사운드 오브 뮤직의 원제가 트랩가 합창단 이야기(The story of the Trapp Family Singers)다.[3] 이 촌평을 날린 롤링 스톤지도 상술했듯 유일 앨범 40선에서 이 밴드를 무려 17위에 랭크시켰다.[4] 도로시는 2000년에 가진 인터뷰에서 대놓고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변덕스러웠다. 우리 자매는 그저 복종했을 뿐'라고 깠다. 출처 막장 아버지였던 셈.[5] 사실 괴상한 겉모양새랑 달리 이들의 음악은 결성 당시에도 1세대 이전의, 초기 비치 보이스나 비틀즈 같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서프 록음악이나 샹그리라 같은 60년대 초 걸그룹 사운드에 가깝다. 당시 기준으로 유행이 지나간 음악을 이상하게 연주하면서 생긴 결과물인 셈.[6] 더 부조리한 점은 이 때 멤버들의 나이는 마냥 순수함을 내뿜을 나이인 10대 초반도 아닌, 10대 후반 내지 20대 초반이었다는 점이다. 위긴 가족의 양육 분위기가 어땠는지 돌려서 보여주는 부분.[7] 라이브 공연이라고 해봐야 동네 회관이나 양로원에서 연주하는 게 전부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동네 밴드인 셈.[8] 멤버 본인들도 사람들이 왜 자기들을 좋아해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어안이 벙벙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9] 이 장르는 순진하면서도 묘한 감수성을 지닌 멜로디와 가사, 아마추어식 소박한 연주력을 내세운 기타 팝을 보였는데, 많은 지점에서 섀그스의 방향성과 일치한다. 연주력과 작곡을 다듬으면 요새 트위 팝 밴드가 되는 셈.[10] 심지어 시드 바렛 시기 제작된 핑크 플로이드의 초기 음반들이 연상된다는 의견도 있다.[11] 즉 일견 무질서하고 무계획적으로 보였던 섀그스 음악은 적어도 보컬과 기타 부분에서는 전부 도로시가 직접 작곡/작사해 악보에 적힌, 이론적으로는 완성된 상태였던 것이다. 다만 드럼과 전혀 맞춰지지 않았고, 연주에 있어서 무수한 실수가 있었을 뿐이다.[12] 다만 당시 공연은 크라코우가 이끄는 백밴드에게 연주를 맡기고 자매는 보컬로만 나왔다. 도로시는 백밴드가 연주 실수를 수정하지 않은 것에 실망했지만 반응이 좋아서 그냥 넘겼다고.[13] 사실 밴드 리더 담당에 곡도 쓴 도로시랑 달리, 베티는 딱히 작곡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억지로 못 하는 악기 잡으며 연주랑 코러스 넣은 거라 별로 의욕이 없을 법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