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22:48:20

대한민국(Kaiserreich)


1. 개요2. 1930년 이전 역사3. 1930년후 역사4. 게임 시작시점 당시 지지도5. 플레이 방법

1. 개요

Kaiserreich에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설명.

2. 1930년 이전 역사

3.3일 독립운동을 빌미로 일본은 순종을 일본내의 조선의 왕으로 즉위시켰으나 허수아비 였다. 그후 조선이 독립하고 순종(대한제국) 서거후 한국 정부 관련 지지도에서도 국론이 크게 둘로 나뉘었다. 일본 정부는 군부의 눈치를 봐서 이승만을 위시한 사회보수주의/권위민주주의 진영을 내각 요직에 앉혔지만, 많은 국민들이 여운형과 조선건국동맹을 지지하고 있었다. 여운형 본인이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었을뿐만 아니라 주장 자체도 서민 생활의 개선을 중시했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 수 있었고, 박헌영계 생디칼리스트/전체주의자들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었던, 이후 김원봉/백남운계로 분류되는 아나키즘/급진사회주의 진영도 조선건국동맹을 지지한다. 결국 자치 결정 이후 4년만에 치러진 첫 총선에서 건동이 40퍼센트 이상의 득표를 얻으며 약진하고, 이승만의 거만한 태도에 학을 뗀 김규식과 김성수가 한국민주당 좌익을 이끌고 이탈, 동양식 기독교 민주주의를 표방한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이 서북 지방에서 의외의 선전을 보이며 둘이 합쳐 30퍼센트 정도의 득표를 얻으면서 결국 이승만이 새로 세운 정당인 자유당은 과반에 한참 못 미치는 30퍼센트 정도의 득표를 얻게 된다. 비록 여운형과 김규식의 첫 연정이 결렬되고 조만식과 이승만의 제휴가 성립되면서 이승만은 어떻게든 중추원 내 제1당의 위치를 지키지만, 이는 명백히 이승만의 리더쉽에 의문을 표할 수 있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하지만, 라이벌인 아나키스트들의 국내 활동에 격앙한 생디칼리스트들 때문에 상황이 꼬이게 되었다. 1930년 벌어진 일련의 테러/암살 시도에서 박헌영의 사주가 드러나면서 이를 이승만이 기회로 이용하게 되었고, 반공을 국시로 해서 거국내각이 들어서게 된다. 1930년 5월 26일(제1공화국 발췌개헌을 위해 이승만이 좌파 의원들을 체포한 날에서 정확히 22년 전) 이승만이 조선 주둔 일본군을 동원해줄 것을 요청한 뒤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각지의 사회주의 계열 주요 인사들을 죄다 잡아들이고, 국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진압되고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총선을 무기한 미루고 현 내각을 유지할 것을 발표한다. 동시에, 형식적으로나마 이왕이 새 내각의 성립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권한을 줘서 이승만과 코드가 잘 맞았던 영선군이 살아있는 동안엔 보수 세력의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안배해놓는다.

3. 1930년후 역사

이렇게 정권이 완전히 영선군과 이승만에 의해 장악당하면서, 정국은 또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주의 정치인/사상가들이 잡혀간 뒤엔 문화계에 전면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나운규 영화감독 같이 비록 사회주의적 사상을 갖고 있어도 너무나도 큰 지지를 받는 거물들을 잡아가둘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만만한 편이었던 사상 문학가들과 시인들을 위주로 해서 피바람이 불게 된다. 특히 국내의 불안정을 틈타 성립한(1925.08) KAPF(조선 프톨레타리아 예술가 동맹)가 최우선 탄압 대상이 되었는데, 약 1년간의 전면적인 탄압을 못 이기고 KAPF는 현실보다 4년 일찍 해체, 지하조직이 됨. 사회주의자들의 주 영역이었던 사상계와 예술계가 봉쇄당하면서 그렇게 조선 내의 좌익 세력은 위축되는가 했지만, 정작 좌익 세력이 그 1931년도를 기점으로 사상에서 행동 쪽으로 방향을 선회해서 브나로드 운동을 비롯한 각종 합법적/실천적 계몽운동으로 영역을 바꾸면서 멀쩡하게 살아남는 결과를 낳는다. 현실의 일제 치하 군정과는 다르게 한국의 내각은 '민정'에 해당했으므로 일방적으로 이런 계몽운동을 조질 방법이 없었고, 다른 정치적 세력들 또한 이전의 계엄령 때문에 곳곳에 유사 밀정을 심어놓고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꼼수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도의 기록적인 폭염으로 경상도민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 여론이 썩 좋지 않자 이승만 정부는 하는 수 없이 국내 사회주의 세력의 '공식적인' 소멸을 발표하고 4년 뒤인 1936년 두 번째 총선을 실시할 것을 약속한다. 한편, 우파 극단주의 계열에선 이범석이 서서히 영향력을 얻기 시작한다. 1930년도의 계엄령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일본군의 숫자가 마땅치 않자 결국 일본은 한반도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준군사조직을 허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민족청년단, 소위 '족청'이다. 당시 운남 군벌 소속의 육군강무학교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오랜 기간 독립군을 지휘한 경력이 있던 몇 안 되는 베테랑인 이범석은 분명 뛰어난 지휘관급 인재였고, 아나키스트였던 김좌진이 생디칼리즘 진영의 사주로 암살당한 이후(1930.01.24) 생디칼리스트인 홍범도, 공사관 도시에서 김구와 활동하고 있는 지청천을 제외하면 사실상 최고이자 최선임인 지휘관이었다. 인망이 높아서 최소 정규사단급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이범석을 돈 거의 안 쓰고 총만 쥐어준 채 동원할 수 있다는데 일본 정부가 마다할 일은 전혀 없었고, 결국 그를 중심으로 군국주의자+군인들이 집결하게 된다. 정규사단급 전력인 병단을 일본의 무기 지원 하에 3개 운용할 수 있었던 이범석은 이를 각각 서울, 함흥, 대구에 배치했고, 만약 일본군의 묵인이 있을 시 이 세 도시를 빠르게 장악하고 쿠데타를 시전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다른 한 축으로는 의친왕이 1935년도에 귀국(실제 역사에서는 사료가 안 남아있어서 언제쯤 귀국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적어도 1930년대에 귀국한 건 확실)한 것인데, 의친왕 본인은 이미 장남 이건에게 친왕위와 재산을 전부 물려줬기 때문에(1930.06.12) 실질적으로 뭘 주도할 수는 없었지만 이전의 독립운동 기여로 인해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아직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이왕이 고종에게 쫓겨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동안 얻은 만성 신장/심장질환으로 인해서 오늘내일 하던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이왕의 양자로 가있던 자신의 차남 흥영군 이우가 성공적으로 계승권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뜻인 조선의 독립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여력을 모아 흥영군을 지원하게 되었다. 당연히 영친왕은 이번 기회마저 놓칠 수는 없다면서 달려들 게 뻔했고, 이에 만약 흥영군이 즉위할 시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진 않을 거라 생각한 이승만이 영친왕 쪽에 가세하면서 계승권 문제가 또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승만 본인이 정해놓은 '이왕의 내각 승인권 및 거부권' 때문에 만약에 흥영군이 이왕직을 계승하기라도 한다면 우익이 총선에서 이겨봤자 거부권을 행사해 정국에서 쫓겨날 게 뻔했기 때문에 이승만 및 자유당에게는 무조건 이겨야 할 이유가 있었고, 이범석 및 족청의 경우엔 그들 나름대로 권력을 탐해서 왕의 서거 이후 혼란을 틈타 정권을 장악한다는 야심이, 생디칼리즘 진영의 경우엔 마찬가지로 혼란을 틈타 혁명을 일으키고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을 무너뜨리는 첨병으로 삼는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면서 게임 시작 시점인 1936년이 되면 거의 모든 정치적 세력이 왕의 빠른 죽음만을 기다리는 상황이 찾아오게 된다.

4. 게임 시작시점 당시 지지도

전체주의 - 조선공산당(CPK), 지지도 0%
생디칼리즘 - 조선공산당(CPK), 지지도 1%
급진사회주의 - 조선건국동맹(APKI) 김원봉계, 지지도 6%
사회민주주의 - 조선건국동맹(APKI) 여운형계, 지지도 38%
사회자유주의 - 한국민주당(KDP) 좌익, 지지도 8%
시장자유주의 - 한국민주당(KDP) 우익, 지지도 4%
사회보수주의 - 조선민주당(JDP), 지지도 9%
권위민주주의 - 자유당(LP), 지지도 24%
독재전제주의 - 자유당(LP), 지지도 8%
국가대중주의 - 조선민족청년단(PYK), 지지도 2%

5. 플레이 방법

독일이나 중국등 자신이 하고싶은 루트와 정당이 똑같거나 비슷한 국가를 골라 일본을 패망시킨다.
그후 한국을 해방한후 플레이 할수 있다 (치트로 국가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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