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50년대 대중음악을 다루는 문서.2. 역사
1950년대가 되며 SP가 쇠락하고 LP가 이를 대체하며 싱글이 아닌 앨범 단위의 음악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로큰롤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며 대중음악은 엄청난 상업적 성과를 이루기 시작한다.1950년대에 흑인음악인 블루스가 미국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유행하게 되는데 블루스가 스윙 재즈를 흡수하면서 리듬감이 중요해지고 리듬 앤 블루스, 줄여서 R&B가 탄생한다.[1] 그러다 1950년대 척 베리라는 로큰롤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척 베리는 백인의 음악인 컨트리도 가미하며 신선한 사운드를 연주했는데 이후로 백인들도 블루스를 하기 시작하며 로커빌리라는 장르가 탄생한다. 로큰롤의 정체성의 확립과 태동에 큰 영향력을 준 인물로, 존 레논은 그를 보고 일컬으길 로큰롤의 다른 이름이 있다면 그건 척 베리[2]라고 정의했다. 척 베리의 대표곡으로 Johnny B. Goode[3]이 있다.
로큰롤은 척 베리, 고전 로큰롤의 대명사 같은 곡으로 사실상 로큰롤의 시작을 알린 Tutti Frutti[4]로 스타덤에 든 리틀 리처드같은 아티스트들이 이끌며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으면서 떠오르는데[5] 그러나 당시 시대의 주류들은 천박하다고 경멸을 표현했고,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트레디셔널 팝을 즐겼다. 그러다 혼자만의 폭발적인 인기로 흐름을 변화시킨 대중음악사의 거인 엘비스 프레슬리가 홀로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며 로큰롤을 끌어올려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인종차별이 격렬하던 시대에, 시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세계적인 성공을 하면서 음악의 인종 화합을 이루었다.대중음악 내에서 처음 주류 진입에 성공한 하위문화 음악으로, 이는 50년대 이후에도 반복되며 주류음악과 하위음악의 대립 구도가 지속되는 형국을 맞는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 시대를 이끈 명곡으로 Heartbreak Hotel, Jailhouse Rock, Hound Dog 등이 있다.
무려 20대 초반의 애송이 주제에 미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스타가 된 엘비스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그때까지 오락 산업이든, 일반 대중컬쳐든 30대 ~ 50대 중심으로 흐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트렌드 또한 그러했으며, 지금의 영미권을 본다면 상상도 못 하겠지만 10대는 물론이고 청년층의 입지는 상당히 낮았다. 그러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성공을 기점으로 청년층의 입지가 메인스트림에 오르기 시작한다.[6]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락스타의 탄생이 청년 문화를 지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는 훗날 후배 음악가인 비틀즈의 문화 혁명으로 문화계 뿐만 아니라, 하위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10-20대의 이념, 서브컬처가 메인스트림으로 오르게 되면서 사실상 주 핵심이 청년층이 됐는데, 이러한 혁명의 첫 신호탄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성공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대중음악 사상 최초의 락스타이자, 당시 음악계의 주류를 혼자만의 폭발적인 인기로 변화시켜버린 대중음악사의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 등장 이전까지의 대중음악계에서는, 스탠다드 팝 무대든 재즈 무대든, 기존 클래식 시대의 춤곡에서 유례한 댄스가 일반적이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의 경박한 댄스[7]로 본격적으로 대중음악계만의 댄스 형식이 시작된다.Jailhouse Rock 영화에서
그리고 로큰롤의 탄생으로 기존의 팝 음악도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1950년대 ~ 1960년대에 걸쳐서 로큰롤, 록 음악과 젊음 지향적인 성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영미권을 중심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그렇게 이전 시대 스타일의 팝은 트레디셔널 팝으로 불리게 된다.
블루스와 컨트리는 각각 흑인과 백인 커뮤니티 내에서 지역 음악으로 유행했고, 대중음악은 백인 가수 중심의 로큰롤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가자면 아무리 로큰롤, R&B이 탄생하고 유행한 시대라고 하지만 이때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은 다름이 아닌 재즈였다. 이 재즈의 영향력은 1960년대 초중반에 비틀즈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시작으로 급락하게 된다.[8]
1958년부터, 미국에서는 "로큰롤의 종말"이라 일컬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58년 제리 리 루이스의 13세 사촌과의 결혼, 리틀 리처드의 "락앤롤은 사탄의 음악이다!" 발언 이후 가수 생활 은퇴[9], 척 베리의 체포[10], 이 사건들로 인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입대[11], 후일 엘비스 프레슬리는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발라드 명곡 Can't Help Falling in Love를 발매한다.
그리고 1959년 버디 홀리를 포함한 로큰롤 가수 3명의 경비행기 추락해 사망하며, 이 사건을 가리켜 음악이 죽은 날이라 부르게 된다.[12] 같은 해 락앤롤을 퍼트리는 데 크게 기여한 라디오 디스크 쟈키 앨런 프리드의 페이올라 사건 등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락앤롤 정신은 사장되고야 말았다.
[1] 당시의 R&B는 로큰롤의 초기 형태와 상당히 유사했다. 현재의 컨템퍼러리 R&B와는 유사성을 찾기가 힘들다.[2] If you wanted to rename rock and roll just call it Chuck Berry.[3] 척 베리 최고의 명곡이자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명곡 중 하나다.[4] 리틀 리처드 최고의 명곡이자, 역사상 가장 중요한 희대의 명곡 중 하나다. 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의 Johnny B. Goode 등보다 발매 시기는 Tutti Frutti가 가장 빠르다.[5] 주로 Slient Generation 세대였다. 베이비 부머 세대(1946 ~ 1964 출생)는 락앤롤의 전성 시대가 시작될 당시에 태어난 세대이다.[6] 오락 산업, 즉 엔터테인먼트의 흐름이 기존 중년층에서 청소년, 청년층으로 흐르기 시작하고, 기존 대중문화계의 문학(소설) 등에서 청소년 주인공 등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그 예시 중 하나이다.[7] 지금이야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 당시는 경악 그 자체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당시 방송사에서는 엘비스의 상반신만 방송한 적이 부지기수였다.[8] 현대 문화사 인용,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기준해서 정확하게는 재즈를 위시한 클래식 시대의 음악 유산의 영향력이 희미해진다고 한다. 음악적 변화를 포함해서 공통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시기를 1960년대 중반부터 잡고 있다.[9] 목사 안수를 받았다.[10] 당시 만연했던 인종차별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다.[11] 기성세대들에게 좋은 인식을 남기고, 오랫동안 가수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2년 동안 독일에서 운전병 생활을 했다.[12] 훗날 벌어지는 비극적인 사건에도 그렇게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