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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례


1. 개요2. 상세3. 행적4. 원문5. 이후6. 평가7. 관련 문서

1. 개요

大夫 禮
(? ~ ?)

기원전 4세기 후반 활동한 고조선의 인물.

2. 상세

이름이며 대부는 성이 아닌 그가 역임한 직책명이다. 보통 직책명 대부와 이름 예를 띄어 (고)조선의 대부 예라 칭하는게 흔하지만 편의상 그냥 대부례라 칭하는 사람도 많다.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인물인데, 부왕(否王) 이전의 인물이자 조선왕 1세의 신하로서 한국사상 최초로 문헌에 이름이 전해지는 인물[1]이며 위만조선 이전 시대에서 [2]을 제외하고 이름이 전해지는 유일한 인물[3]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라는 명칭에서 보듯 고조선에 오래전부터 관직 제도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인물이며, 그의 행적에서 보듯 높은 수준의 외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3. 행적

중국 사서 위략에 따르면, 기원전 323년 연(燕)나라의 왕이 동쪽으로 고조선을 공격하려고 하자 위기를 느낀 조선 왕도 연을 공격하려고 준비했다. 이 때 고조선의 대부 예가 왕에게 조언하여 군사 동원을 막았고, 외교사절로 연나라에 파견되어 왕을 설득하고 전쟁을 막았다.

기자 관련 기록이 있어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쓸데없는 분쟁으로 일어나지 않아도 될 전쟁을 막았으며, 대부 예는 주나라가 약해지자 연나라와 함께 타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왕을 칭해 자주권을 확보한 걸로 미루어서 고조선의 현명한 외교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참고사항이 있다면 전국시대의 칭왕 상황은 제나라가 기원전 334년, 진(秦)과 한은 기원전 325년, 위, 조, 연 등은 기원전 323년으로 이해되고 있다. 기원전 323년 연(燕)나라는 제(齊)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한(韓), 조(趙), 위(魏), 중산국(中山國) 등과 서로 왕(王)이라 부르기로 하는 이른바 ‘오국상왕(五國相王)’이라 불리는 동맹을 맺었다. 고조선과 대부 례는 주나라가 약해지고 고조선 주변의 여러 나라가 왕을 말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을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4. 원문

역왕 10년(기원전 323년), 연나라의 군주(연역왕)가 왕을 칭했다.
사기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위략에서 말하길, 과거 箕子 이후에 조선후가 있었고, 周나라가 쇠퇴해지자 燕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침략을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燕을 쳐서 周왕실을 받들려 했는데, 대부 예가 간하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를 파견해 燕을 설득하니 燕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위략《魏略》 인용문
가덕왕(嘉德王) 후(詡)는 연(燕)나라 왕 쾌(噲)의 무도(無道)함을 듣고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대부(大夫) 예(禮)의 간언에 따라 군대를 일으키지 않았다.
동국사략

5. 이후

다만 진개의 침략과 5군 설치(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로 고조선의 영향권이 축소되는 건 막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연소양왕 시기에 연나라는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6. 평가

기자 관련 기록은 중국의 주나라 입장에 따라 일방적으로 기록한 기록이고, 무엇보다 고고학적 발굴과 맞질 않아서 기자조선은 학계에 비판받아 부정되고 있으므로 걸러서 봐야한다. 기록상 당대보다 800년 이상 이후의 시점에서야 등장하며, 그 또한 중국이 조선을 인식하고 복속시키려 한 진대 · 전한대임을 들어 후대의 사료 윤색으로 보고 학계에서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7. 관련 문서


[1] 단군은 직책이지 이름이 아니며, 기자는 동래설을 부정할 경우.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2] 부왕준왕.[3] 사실 고조선 대에 지어졌다는 시인 공무도하가까지 넓히면 곽리자고, 여옥 등도 있긴 하지만, 공무도하가는 정확한 연대를 모르며 논란이 있다.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