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5 20:42:57

헤이세이 연구회

다케시타파에서 넘어옴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D7003A><tablebgcolor=#D7003A> 파일:자유민주당(일본) 흰색 로고.svg 자유민주당의 파벌 분류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지공회
아소 다로[회장]
아마리 아키라
산토 아키코
사토 쓰토무
에토 아키노리
스즈키 슌이치
고노 다로
이와야 다케시
마쓰모토 다케아키
이노우에 신지
헤이세이 연구회
모테기 도시미쓰[회장]
누카가 후쿠시로
신도 요시타카
오쓰지 히데히사
오부치 유코
가토 가쓰노부
후나다 하지메
지수회
니카이 도시히로[회장]
하야시 모토오
다케다 료타
이마무라 마사히로
히라사와 가쓰에이
나카소네 야스타카
에사키 데쓰마
야마구치 쓰요시
고바야시 다카유키
나가시마 아키히사
호소노 고시
하토야마 지로
무파벌
기시다 후미오
스가 요시히데
이시바 시게루
고이즈미 신지로
무라카미 세이이치로
가지야마 히로시
모리야마 히로시
하야시 요시마사
가미카와 요코
일본 정당별 계파 (기타 일본 혁신정당 · 입헌 · 국민 · 자민)
}}}}}}}}} ||

헤이세이 연구회
모테기파
<colbgcolor=#693041> 형성 <colbgcolor=#ffffff,#1f2023>1987년 7월 4일
전신 목요 연구회
설립자 다케시타 노보루
회장 모테기 도시미쓰
주요 정치인 모테기 도시미쓰 (회장)
누카가 후쿠시로 (최고고문 / 일시 이탈)[1]
와타나베 히로미치 (부회장)
가토 가쓰노부 (부회장)
후나다 하지메 (상임고문)
오쓰지 히데히사 (일시 이탈)[2]
신도 요시타카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
2.1. 목요회로부터의 이탈2.2. 다케시타파 시절2.3. 오부치파 시절2.4. 하시모토파 시절2.5. 쓰시마파 시절2.6. 누카가파 시절2.7. 다케시타파 시절2.8. 모테기파 시절
3. 역대 회장

[clearfix]

1. 개요

헤이세이 연구회(平成研究会) 또는 모테기파(茂木派)는 일본의 정당인 자유민주당의 파벌이다. 사실상 유일한 보수본류 파벌이다.[3]

직접적인 전신은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파벌인 목요회에서 유래되었다. 목요회의 2인자였던 다케시타 노보루가 경세회를 창설한 뒤 목요회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한 때 다나카 가쿠에이 시대 말기에서 가토의 난 발발 이전[4]까지 1980-90년대에 자민당을 대표했던 파벌로, 총리도 많이 배출했었다. 하지만, 90년대 초 파벌 인원 중 다수가 오자와 이치로와 하타 쓰토무, 오쿠다 게이와, 와타나베 고조를 따라 신생당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 등으로 이탈했고, 그 후 자민당으로 복당한 인사들도 헤이세이 연구회가 아닌 지수회, 지공회 등 다른 파벌로 가버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우정 민영화를 명목으로 보수본류 의원들을 대거 공천 학살하면서 그 세가 크게 꺾였다. 그 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이후로는 총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2. 역사

2.1. 목요회로부터의 이탈

1970년대 초반부터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끄는 목요회(木曜クラブ)는 자민당 내부의 최대 파벌로,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비록 다나카 가쿠에이는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비리 논란들로 인해 자민당을 탈당했지만, 여전히 당 외부에서 목요회를 장악하고 있었고, 막후에서 자민당과 내각을 움직였다.[5] 이 시기에 다나카는 자신의 파벌 장악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 확실한 후계자(2인자)를 키우지 않았고, 목요회에서 총리가 나오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목요회에서 차세대 주자로 거론되고 있던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85년, 이들은 창정회(創政会)를 창설하면서 다나카의 독단적인 파벌 운영에 반기를 들었다. 다나카는 창정회의 실체를 알게 되자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정계에서 밀려나고, 목요회는 다케시타 노보루가 장악했다.

1986년, 다케시타는 본인이 만들었던 창정회를 해산하고 세력 확대를 위해 1987년 5월 21일, 1987년 총재선을 앞두고 다케시타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한 후원회를 열었는데, 참가자만 13,000명 정도였고 매출로는 대략 20억엔을 찍는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1987년 7월 4일, 다케시타는 경세회(経世会)[6]를 창설하면서 해산 당시 목요회 소속 의원이 141명이나 되었지만 다케시타파 114명, 잔류파(니카이도그룹) 15명, 중립 12명으로 세 갈래로 분열되었다.

2.2. 다케시타파 시절

같은 해 10월에 치러진 1987년 총재선에서 다케시타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자민당의 확실한 주류 파벌로 올라섰다. 다케시타는 총리와 파벌 회장 분리를 위해 회장을 잠시 가네마루 신에게 물러줬다. 가네마루는 회장에 취임하긴 했지만, 사실상 허수아비 회장이었고, 다케시타가 실세로 군림했다.[7]

이 시절 경세회의 핵심 인원이었던 오부치 게이조, 가지야마 세이로쿠, 하시모토 류타로, 하타 쓰토무, 와타나베 고조, 오쿠다 게이와, 오자와 이치로의 7명을 가리켜 '다케시타파 칠봉행(竹下派七奉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리쿠르트 사건으로 인한 다케시타의 총리 사퇴 이후 사실상 임시 회장을 맡기로 한 가네마루는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가며 회장직을 유지하자 사실상 실세인 다케시타와 관계가 악화되어갔다. 그때 1989년 총재선에서 간사장을 역임했던, 하시모토 류타로가 출마하려고 했지만, 오자와 이치로가 하시모토의 여성 스캔들을 집요하게 잡아 하시모토의 출마를 불발시켰다.

총재선에서 가이후 도시키가 총리로 당선된 후 오자와는 간사장, 하시모토는 대장대신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오자와와 하시모토 간의 갈등이 본격화 되었는데, 이를 '일룡전쟁(一龍戦争)'이라고 불린다. 하시모토와 오자와는 각각 다케시타, 가네마루와 가까웠기 때문에 다케시타와 가네마루의 대리전이라는 측면이 있었다. 즉 경세회의 분열을 알리는 신호탄이 만들어진 것.

1991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자민당 본부가 추천한 나카마츠 요시로 후보가 자민당 도쿄도련이 지원한 스즈키 슌이치[8]후보에게 패하자 오자와는 책임지고 간사장직에서 사퇴한 후 가네마루 회장에 의해 회장 대행에 올랐다. 하시모토도 개각으로 대장대신직에서 물러났다.

1992년 10월, 가네마루는 사가와 규빈 사건에 대해 책임지고 회장직과 중의원 의원직을 동시에 사퇴했다. 가네마루 후임 회장 자리를 두고 친 오자와계와 반 오자와계 두 갈래로 나뉘게 되는데, 다케시타파 칠봉행 중에서 친 오자와계는 하타 쓰토무를, 반 오자와계는 오부치 게이조를 회장으로 옹립을 주장했다. 고문 격인 다케시타 전 회장이 반 오자와계가 미는 오부치 옹립에 대해 찬성하면서 반 오자와계가 수적으로 우세해졌다.

2.3. 오부치파 시절

1992년 10월 28일, 임시 총회에서 오부치는 경세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오부치가 회장에 취임한지 약 5시간 후, 하타 쓰토무오자와 이치로 등 오자와파는 유감을 표하며 경세회를 탈퇴한 후 개혁포럼 21을 창설했다. 이로써 당 내 최대 세력이었던 경세회는 각각 제4대 파벌인 경세회와 제5대 파벌인 친 오자와계로 쪼그라든다.[9]

이후 1993년 6월, 오자와파는 신생당을 창당하고 제40회 중원선에서 정권교체에 성공한 후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비자민 내각에 참여했다.

이후 호소카와 내각 ~ 하타 내각이 단기간에 붕괴되었고, 자민당이 이틈을 노려 비자민 연립내각에서 소외되었던 일본사회당연립정부를 구성해 여당으로 복귀하자, 경세회는 점차 세력을 회복해 나갔다.

1995년 총재선에서 다케시타는 하시모토 류타로 옹립을 결정했다. 총재선에서 당선된 하시모토는 1996년 1월, 총리에 취임했다. 1993년에 정권교체를 당한 후 고노 요헤이 집행부 때 쇄신 차원에서 파벌 해체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고, 소파벌 전락으로 사무소 유지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지자 파벌 명칭을 헤이세이 연구회로 바꿨다.

1998년, 제18회 참원선에서 패배하자 하시모토는 총리직을 사퇴했다. 1998년 총재선에서 헤이세이 연구회는 오부치 회장을 총리 후보로 추대했고 오부치 후임 회장으로 와타누키 다미스케가 취임했다. 그러나 가지야마 세이로쿠는 이 결정에 대해 불복하며 파벌을 탈퇴한 후 총재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4. 하시모토파 시절

2000년 7월, 와타누키 다미스케 회장이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자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노나카 히로무아오키 미키오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하시모토는 2001년 총재선에 출마했지만, 세이와 정책연구회 소속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패배했다. 고이즈미는 헤이세이 연구회의 지원 없이 최초로 총리가 되었다고 공언하면서 헤이세이 연구회 소속 인사들을 집행부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등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로인해 헤이세이 연구회는 미키 집행부 이후 25년 만에 집행부에 입성하지 못했고, 결국 당 내 영향력이 급격히 줄었다.

2003년 총재선에서 노나카 히로무는 독자 후보 옹립을, 아오키 미키오, 무라오카 가네조는 고이즈미를 지지하며 무옹립을 주장해, 총재 후보 옹립을 두고 분열되어 갈등이 벌어졌다. 노나카는 정계 은퇴를 걸고 후지이 다카오를 옹립했지만, 고이즈미의 총재(총리) 재선을 허용당하며 낙선했다. 결국 노나카는 공인한 대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실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고이즈미 집행부는 누카가 후쿠시로를 정무조사회장, 규마 후미오를 총무회장으로 기용해 약 2년만에 집행부에 입성했다.

2004년, 헤이세이 연구회 정치자금 수입 불기재 논란[ 2001년]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무라오카 가네조는 검찰에 의해 구속되고 유죄를 선고받는 사태가 벌어져 7월 30일, 하시모토는 책임지고 회장직에서 사퇴하며 헤이세이 연구회를 탈퇴했다.

2005년, 제44회 중원선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우정 민영화 법안 반대파들을 대거 공천 학살해 당내 제1파벌의 자리를 뺐겼다.

하시모토 회장 사퇴 이후 회장직이 공석으로 남았다가 11월 4일, 쓰시마 유지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2.5. 쓰시마파 시절

2007년 참원선에서 아오키 미키오는 불출마했고,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참의원 간사장과 다케미 게이조는 낙선해 참의원에서도 세이와 정책연구회에 이은 제2파벌로 떨어졌다.

2008년,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사퇴로 치러진 총재선에서 파벌 간부는 위공회 소속 아소 다로와 무파벌인 요사노 가오루 지지 선언, 젊은 인사들은 이시바 시게루를 옹립하는 등 총재선을 두고 다시 한 번 분열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2009년 7월 19일, 쓰시마 유지 회장이 제45회 중원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해당 선거에서 자민당은 대참패했고, 헤이세이 연구회 소속 중의원 의원도 해산 전 45명에서 1/3 이하인 14명으로 줄었다.

2.6. 누카가파 시절

2009년 9월 8일, 은퇴를 선언한 쓰시마 유지 후임 회장으로 누카가 후쿠시로가 취임했다.

이시바 시게루, 하토야마 구니오 등 연쇄적으로 주요 인사들이 이탈하는 출혈이 발생해 제3파벌로 떨어졌다.

이렇듯 파벌 상황이 좋지 않았고 2012년 총재선에서는 후보를 옹립하지 못했지만, 제46회 중원선에서 자민당 정권교체에 성공하며, 파벌 소속 의원들이 49명으로 대폭 늘어나 제2파벌로 돌아왔다. 그러나 2015년 총재선에서 후보를 옹립하지 못했고, 2017년, 지공회에게 밀리며 몇 년 안가서 다시 제2파벌 자리를 뺐겼다. 이때문에 2018년 1월, 요시다 히로미 참의원 의원을 중심으로 누카가에게 회장직 사퇴를 요구했고, 3월, 누카가는 회장직에서 사퇴했다.

2.7. 다케시타파 시절

누카가 후임으로 다케시타 노보루의 아들 다케시타 와타루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2018년 총재선에서는 다케시타는 후보 옹립을 모색했지만, 파벌 내 다수의 중의원 의원은 아베 신조를 지지, 참의원 의원은 이시바 시게루를 지지하며 중·참의원이 분열되었다. 사실상 자주 투표로 결정되었고, 이번에도 파벌이 분열된 모습을 보여줬다.

2021년 1월 9일, 다케시타가 식도암 투병으로 인해 누카가 후쿠시로, 모테기 도시미쓰, 요시다 히로미가 회장 대행을 맡았다. 다케시타의 건강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갔고, 결국 9월 17일, 식도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2.8. 모테기파 시절

자민당이 제49회 중원선에서 선전한 이후 11월 11일, 파벌 회의를 통해 11월 4일에 자민당 간사장으로 취임한 모테기 도시미쓰[11]를 후임 회장으로 선임했다. 같은달 25일, 파벌 총회에서 모테기 간사장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2023년 12월에 불거진 정치자금 문제로 인해 오부치 유코 등 파벌 중요 인사들이 이탈하는 출혈이 발생했고, 모테기 회장은 자금 모집과 인사 추천 기능이 없는 정책집단으로 바꿨다.

3. 역대 회장

<rowcolor=#fff> 대수 이름 파벌 호칭 임기
1 다케시타 노보루 다케시타파 1987년
2 가네마루 신 1987년 ~ 1992년
3 오부치 게이조 오부치파 1992년 ~ 1998년
4 와타누키 다미스케 1998년 ~ 2000년
5 하시모토 류타로 하시모토파 2000년 ~ 2004년
공석 (2004~2005년)
6 쓰시마 유지 쓰시마파 2005년 ~ 2009년
7 누카가 후쿠시로 누카가파 2009년 ~ 2018년
8 다케시타 와타루 다케시타파 2018년 ~ 2021년
9 모테기 도시미쓰 모테기파 2021년 ~


[1] 중의원 의장 취임으로 일시 이탈.[2]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일시 이탈.[3] 굉지회도 보수본류 파벌로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었으나 2023년 12월에 불거진 정치자금 수입 불기재 논란으로 인해 해산되었다.[4] 다케시타 노보루가네마루 신이 은퇴하고, 1990년대 초에 발생한 자민당 분당 사태가 벌어졌을 때 하타 쓰토무오자와 이치로를 포함한 파벌 내 주류 인사들이 몇몇 이탈하긴 했으나, 55년 체제 붕괴 이후에도 하시모토 류타로오부치 게이조를 총리로 배출해내며 사실상 가토의 난이 발발하고 보수방류의 세이와 정책연구회가 세를 불려갈 때까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5] 이때 얻어진 다나카의 별명이 '어둠의 쇼군'이다.[6] 중국 고전의 경세제민에서 따왔다.[7] 그래서 가네마루 회장 시절 파벌 호칭이 '다케시타파'였다.[8] 현 재무대신 스즈키 슌이치와 동명이인.[9] 이때 칠봉행 중 다케시타 계열이었던 오부치, 가지야마, 하시모토는 잔류, 오쿠다, 와타나베는 하타, 오자와를 따라갔다.[ 2001년] 7월 2일, 하시모토 류타로, 노나카 히로무, 아오키 미키오가 일본치과의사연합에게 수표 1억엔을 받은 것을 정치자금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은 사건.[11] 노나카 히로무 이후 약 21년만에 헤이세이 연구회 소속 간사장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