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4:18:31

헤이세이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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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자유민주당(일본) 흰색 로고.svg 자유민주당의 파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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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된 파벌 : 굉지회, 근미래정치연구회, 번촌정책연구소, 세이와 정책연구회, 수월회, 지수회, 헤이세이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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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연구회
모테기파
<colbgcolor=#693041> 형성 <colbgcolor=#ffffff,#1f2023>1987년 7월 4일
전신 목요 연구회
설립자 다케시타 노보루
회장 모테기 도시미쓰
주요 정치인 모테기 도시미쓰 (회장)
누카가 후쿠시로 (최고고문 / 일시 이탈)[1]
와타나베 히로미치 (부회장)
가토 가쓰노부 (부회장)
후나다 하지메 (상임고문)
오쓰지 히데히사 (일시 이탈)[2]
신도 요시타카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
2.1. 목요회로부터의 이탈2.2. 다케시타파(다케시타 노보루) 시절2.3. 오부치파 시절2.4. 하시모토파 시절2.5. 쓰시마파 시절2.6. 누카가파 시절2.7. 다케시타파(다케시타 와타루) 시절2.8. 모테기파 시절
3. 역대 회장

[clearfix]

1. 개요

헤이세이 연구회(平成研究会) 또는 모테기파(茂木派)는 일본의 정당인 자유민주당의 파벌이다. 굉지회가 해산된 이후 사실상 유일한 정통 보수본류 파벌이다.[3]

직접적인 전신은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후계자 중 한명인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파벌인 목요회에서 유래되었다. 목요회의 2인자였던 다케시타 노보루가 경세회를 창설한 뒤 목요회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정계에서 은퇴한 후 가토의 난이 발발하기 전까지 자민당을 대표했던 파벌로, 이 시기를 거친 자민당 총리 7명[4] 중 3명이나 배출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가토의 난 이후 보수방류가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 의해 2005년, 제44회 중원선에서 보수본류 의원들이 대거 공천학살을 당해 당내 영향력이 대폭 줄었고, 이후 2023년 12월에 불거진 정치자금 파문으로 인해 정책집단으로 바뀌었다.

2. 역사

2.1. 목요회로부터의 이탈

1970년대 초반부터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끄는 목요회(木曜クラブ)는 자민당의 최대 파벌이었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비리 논란들로 인해 1976년에 자민당을 탈당했지만, 여전히 당 외부에서 목요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다나카는 자신의 파벌 장악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확실한 후계자(2인자)를 키우지 않았고, 목요회에서 총리가 배출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목요회에서 차세대 주자로 거론되고 있던 다케시타 노보루는 1985년, 다나카의 독단적인 파벌 운영에 반발하며 창정회(創政会)를 창설했다. 이 시기 다나카는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어 자연스럽게 다케시타가 목요회를 장악했다.

1986년, 다케시타는 창정회를 해산하고 세력 확대를 위해 1987년 5월 21일, 1987년 총재선을 앞두고 다케시타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한 후원회를 열었는데, 참가자만 13,000명 정도였고 매출로는 대략 20억엔을 찍는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1987년 7월 4일, 다케시타는 경세회(経世会)[5]를 창설하면서 해산 당시 목요회 소속 의원이 141명이나 되었지만 다케시타파 114명, 잔류파(니카이도그룹) 15명, 중립 12명으로 세 갈래로 분열되었다.

2.2. 다케시타파(다케시타 노보루) 시절

같은 해 10월에 치러진 1987년 총재선에서 다케시타가 총재로 당선되며 총리에 오르자 자민당의 주류 파벌로 올랐다. 다케시타는 총재와 파벌 회장 분리를 위해 회장을 잠시 가네마루 신에게 물러줬지만, 가네마루는 허수아비 회장에 불과했고 사실상 다케시타가 실세로 군림했다.[6]

이 시절 경세회의 핵심 인원이었던 오부치 게이조, 가지야마 세이로쿠, 하시모토 류타로, 하타 쓰토무, 와타나베 고조, 오쿠다 게이와, 오자와 이치로의 7명을 가리켜 '다케시타파 칠봉행(竹下派七奉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89년, 리쿠르트 사건으로 인해 다케시타는 총리직에서 사퇴하고, 다시 경세회 회장으로 복귀하려고 했지만, 가네마루는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가며 회장직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 결과 가네마루와 다케시타의 관계가 악화되어갔고 특히 가네마루는 본인 측근인 오자와 이치로를 회장 대행에 임명하자 다케시타의 측근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1992년 10월, 가네마루는 사가와 규빈 사건에 대해 책임지고 회장직과 중의원 의원직을 동시에 사퇴했다. 그 후 가네마루 후임 회장을 두고 친 오자와계와 반 오자와계 두 갈래로 나뉘게 되는데, 친 오자와계는 하타 쓰토무를, 반 오자와계는 오부치 게이조를 회장으로 옹립을 주장했다. 한동안 교착상태가 이루어지다가 다케시타 전 회장이 반 오자와계가 미는 오부치 옹립을 찬성하면서 반 오자와계가 수적으로 우세해졌다.

2.3. 오부치파 시절

1992년 10월 28일, 임시 총회에서 오부치는 경세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오부치가 회장에 취임한지 약 5시간 후, 하타 쓰토무오자와 이치로 등 오자와계는 유감을 표하며 경세회를 탈퇴 후 개혁포럼 21을 창설했다.[7] 이로인해 당 내 최대 파벌 자리를 빼앗겼다.

1995년에 치러진 총재선에서 헤이세이 연구회는 하시모토 류타로를 옹립했다. 총재선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누르고 총재에 당선된 하시모토는 1996년 1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사퇴로 차기 총리에 올랐다. 1993년에 정권교체를 당한 후 고노 요헤이 집행부 때 쇄신 차원에서 파벌 해체 운동이 일어났고 오자와계의 파벌 이탈로 인해 사무소 유지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파벌 명칭을 헤이세이 연구회로 바꿨다.

1998년, 제18회 참원선에서 패배하자 하시모토는 총리직을 사퇴했다. 1998년 총재선에서 헤이세이 연구회는 오부치 회장을 총리 후보로 추대했고 오부치 후임 회장으로 와타누키 다미스케가 취임했다. 그러나 가지야마 세이로쿠는 이 결정에 대해 불복하며 파벌을 탈퇴한 후 총재선에 출마했지만, 2위로 낙선했다.

2.4. 하시모토파 시절

2000년 7월, 와타누키 다미스케 회장이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자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노나카 히로무아오키 미키오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하시모토는 2001년 총재선에 출마했지만, 세이와 정책연구회 소속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패배했다. 고이즈미는 헤이세이 연구회의 지원 없이 최초로 총리가 되었다고 공언하면서 헤이세이 연구회 소속 인사들을 집행부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등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로인해 헤이세이 연구회는 미키 집행부 이후 25년 만에 집행부에 입성하지 못했고, 결국 당 내 영향력이 급격히 줄었다.

2003년 총재선에서 노나카 히로무는 독자 후보 옹립을, 아오키 미키오, 무라오카 가네조는 고이즈미를 지지 선언을 주장하여, 총재 후보 옹립을 두고 분열되어 갈등이 벌어졌다. 노나카는 정계 은퇴를 걸고 후지이 다카오를 옹립했지만, 고이즈미의 총재(총리) 재선을 허용당하며 낙선했다. 결국 노나카는 공언한 대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실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고이즈미 집행부는 누카가 후쿠시로를 정무조사회장, 규마 후미오를 총무회장으로 기용해 약 2년만에 집행부에 입성했다.

2004년, 헤이세이 연구회 정치자금 수입 불기재 논란[8]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무라오카 가네조는 검찰에 의해 구속되고 유죄를 선고받는 사태가 벌어져 7월 30일, 하시모토는 책임지고 회장직에서 사퇴하며 헤이세이 연구회를 탈퇴했다.

2005년, 제44회 중원선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우정 민영화 법안 반대파들을 대거 공천 학살해 당내 제1파벌의 자리를 뺏겼다.

하시모토 회장 사퇴 이후 회장직이 공석으로 있다가 11월 4일, 쓰시마 유지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2.5. 쓰시마파 시절

2007년 참원선에서 아오키 미키오는 불출마했고,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참의원 간사장과 다케미 게이조는 낙선해 참의원에서도 세이와 정책연구회에 이은 제2파벌로 떨어졌다.

2008년,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사퇴로 치러진 총재선에서 파벌 간부는 위공회 소속 아소 다로와 무파벌인 요사노 가오루 지지, 젊은 인사들은 이시바 시게루를 옹립하는 등 총재선을 두고 다시 한 번 분열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2009년 7월 19일, 쓰시마 유지 회장이 제45회 중원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해당 선거에서 자민당은 대참패하여 헤이세이 연구회 소속 중의원 의원도 선거 직전 45명에서 14명으로 줄었다.

2.6. 누카가파 시절

2009년 9월 8일, 쓰시마 유지 후임으로 누카가 후쿠시로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시바 시게루, 하토야마 구니오 등 연쇄적으로 주요 인사들이 이탈하여 제3파벌로 떨어졌다.

이렇듯 파벌 상황이 좋지 않았고, 2012년 총재선에서는 후보를 옹립하지 못했지만, 제46회 중원선에서 자민당 정권교체에 성공하며, 파벌 소속 의원들이 49명으로 대폭 늘어나 제2파벌로 돌아왔다. 그러나 2015년 총재선에서 후보를 옹립하지 못했고, 2017년, 지공회에게 밀리며 몇 년 안가서 다시 제2파벌 자리를 뺐겼다. 이때문에 2018년 1월, 요시다 히로미 참의원 의원을 중심으로 누카가에게 회장직 사퇴를 요구했고, 3월, 누카가는 회장직에서 사퇴했다.

2.7. 다케시타파(다케시타 와타루) 시절

누카가 후임으로 다케시타 노보루의 막내동생 다케시타 와타루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2018년 총재선에서는 다케시타는 후보 옹립을 모색했지만, 파벌 내 다수의 중의원 의원은 아베 신조를 지지, 참의원 의원은 이시바 시게루를 지지하며 중·참의원이 분열되었다. 사실상 자주 투표로 결정되었고, 이번에도 파벌이 분열된 모습을 보여줬다.

2021년 1월 9일, 다케시타가 식도암 투병으로 인해 누카가 후쿠시로, 모테기 도시미쓰, 요시다 히로미가 회장 대행을 맡았다. 다케시타의 건강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9월 17일, 식도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2.8. 모테기파 시절

자민당이 제49회 중원선에서 선전한 이후 11월 11일, 파벌 회의를 통해 11월 4일에 자민당 간사장으로 취임한 모테기 도시미쓰[9]를 후임 회장으로 선임했다. 같은달 25일, 파벌 총회에서 모테기 간사장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2023년 12월에 불거진 정치자금 파문으로 인해 오부치 유코 등 파벌 중요 인사들이 이탈하는 출혈이 발생했고, 모테기 회장은 본 파벌을 자금 모집과 인사 추천 기능이 없는 정책집단으로 바꿨다.[10]

2024년 4월 17일, 모테기 도시미쓰 회장이 정치 단체로서의 신고를 철회할 방침을 결정했다.

3. 역대 회장

<rowcolor=#fff> 대수 이름 파벌 호칭 임기
1 다케시타 노보루 다케시타파 1987년
2 가네마루 신 1987년 ~ 1992년
3 오부치 게이조 오부치파 1992년 ~ 1998년
4 와타누키 다미스케 1998년 ~ 2000년
5 하시모토 류타로 하시모토파 2000년 ~ 2004년
공석 (2004~2005년)
6 쓰시마 유지 쓰시마파 2005년 ~ 2009년
7 누카가 후쿠시로 누카가파 2009년 ~ 2018년
8 다케시타 와타루 다케시타파 2018년 ~ 2021년
9 모테기 도시미쓰 모테기파 2021년 ~


[1] 중의원 의장 취임으로 일시 이탈.[2]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일시 이탈.[3] 굉지회도 보수본류 파벌로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었으나 2023년 12월에 불거진 정치자금 파문으로 인해 해산되었다.[4] 다케시타 노보루, 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5] 중국 고전의 경세제민에서 따왔다.[6] 그래서 가네마루 회장 시절 파벌 호칭이 '다케시타파'였다.[7] 이때 다케시타 칠봉행들 중 다케시타 계열이었던 오부치, 가지야마, 하시모토는 잔류, 오쿠다, 와타나베는 하타, 오자와를 따라갔다.[8] 2001년 7월 2일, 하시모토 류타로, 노나카 히로무, 아오키 미키오가 일본치과의사연합에게 받은 수표 1억엔을 정치자금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았다.[9] 노나카 히로무 이후 약 21년만에 헤이세이 연구회 소속 간사장이 배출되었다.[10] 그러나 오부치 유코의 파벌 탈퇴는 선거대책위원장 취임을 위한 준비여서 정치자금 문제와는 별 연관성이 없다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