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이름 | <colbgcolor=#fff,#191919>누아르 데지르 Noir Désir |
활동 | 1983년 ~ 2010년 |
활동지점 | 프랑스 보르도 |
장르 | 포스트 펑크,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 |
레이블 | Barclay Records |
멤버 | Bertrand Cantat Jean-Paul Roy Denis Barthe Serge Teyssot-Gay Frédéric Vidalenc |
링크 | 공식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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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보르도를 기반으로 하는 포스트 펑크, 얼터너티브 록 밴드. 밴드 명은 프랑스어로 "검은 욕망(Black Desire)"을 뜻하며, 프랑스 내에서 가장 성공한 밴드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8~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밴드이다. 유럽에서 열린 록페에서 자주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올랐고, 티켓 파워도 상당했던 록밴드였다.그러나 2003년 보컬 베르트랑 캉타가 폭행치사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밴드는 2010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베르트랑 캉타는 출소 후 복귀해 솔로활동을 하고 있다.
2. 커리어
1980년 당시 10대였던 동급생 베르트랑 캉타(Bertrand Cantat)와 세르주 티소게이(Serge Teyssot-Gay)가 밴드를 결성하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창단 당시 이름은 "Psychoz"였으며, 이후 "6.35", "Station Désir", "Noirs Désirs"[1]를 거친 뒤 누아르 데지르라는 이름으로 최종적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밴드원을 모으며 4인조 체제로 굳어졌다.결성 이후 여러 데모를 만들어 음반사에 보내기 시작했고, 프랑스에서 상당히 규모있는 음반사인 바클레이 레코드와의 계약을 따내는데 성공한다. 첫 정규 앨범 Où veux tu qu'je r'garde은 1987년 발매했으며, 5000장을 판매하면서 무명에 가까웠던 누아르 데지르는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누아르 데지르가 본격적으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음반은 1989년 발매한 2집 정규 Veuillez rendre l'âme (à qui elle appartient) 이후 부터인데, 이 음반은 발매 직후 골드 인증을 하는 등 성공적인 판매량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 평론가들의 좋은 평가를 받으며 현재까지 프랑스 록 음악사에서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는 작품이다. 또한 이 음반은 최고의 프랑스 록 그룹에게 주어지는 Bus d'Acier을 수상받기도 했다.
1991년 발매한 3집 Du ciment sous les plaines는 홍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2집 만큼의 성공을 하지는 못했으나, 역시나 좋은 얼터너티브 록 앨범으로써 평가받는 작품이다. 밴드는 1년 뒤인 1992년 런던에서 음반 작업을 한 밴드는 또 다른 정규 Tostaky를 발매했으며, 이 음반 역시 롤링 스톤 프랑스에서 베스트 프렌치 록 앨범 2위에 랭크 될 만큼 현재까지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The Christian Science Monitor)에서는 1993년 누아르 데지르를 "그런지 물결의 선봉장"으로써 소개하며 큰 주목을하는 등 누아르 데지르였으나, 1994년 보컬 베르트랑의 성대 결절로 인해 누아르 데지르는 휴식기에 들어간다.
휴식기 도중 베이스 프레데릭 비달랑(Frédéric Vidalenc)이 밴드를 탈퇴하고, 장 폴 로이(Jean-Paul Roy)가 새 멤버로 들어오는 등 여러 밴드의 변화가 있었고, 베르트랑은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으며 다시 복귀를 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1996년 음반 666.667 Club으로써 다시 복귀했으며, 프랑스 앨범 차트에서 1위를 기록, 2x 플래티넘을 기록하는가 하면 한층 더 발전한 밴드로써 돌아왔다는 평가를 받으며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누아르 데지르의 마지막 정규 <Des visages des figures>는 2001년 발매되었으며,[2]이 작품은 누아르 데지르의 커리어에 있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음은 물론, 상업적인 면 역시 프랑스 뿐만 아니라 스위스, 벨기에 등 유럽 전역에서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등 커리어 하이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수록곡인 Le vent nous portera는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 등 많은 국가의 차트 상위권에서 오르내렸고, 기존의 포스트 펑크, 얼터너티브 록 뿐만 아니라 누벨 샹송 프랑세즈, 포크 록 등 다양한 장르를 잘 섞어내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듬 해인 2002년에는 프랑스에서 전국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그러나 2003년, 보컬 베르트랑 캉타가 빌뉴스의 한 호텔에서 연인이자 유명 배우였던 마리 트랭티냥을[3] 마구 구타해 뇌사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4][5] 베르트랑은 사건 다음 날에야 경찰에 신고했으며, 마리는 입원 5일만에 숨지고 말았다. 베르트랑은 폭행치사 혐의로 기소되어 8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유명 밴드의 보컬이 인기 여배우를 구타해 숨지게 한 사건은 당시 유럽 전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6]
어쨌든 보컬인 베르트랑이 교도소에 수감되자, 구심점을 잃은 밴드는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워졌다. 베르트랑이 콩밥을 먹는 동안 멤버들은 밴드 활동을 잠시 접은 체 개인활동을 모색했으며 이렇게 잠정적으로 활동을 미루고 있었다. 2007년 베르트랑은 수감 4년 만에 가석방되었고, 복귀를 위해 노력했지만 사건의 여파가 너무 엄청나서 바로 복귀는 어려웠고 수감생활 동안 멤버들과의 사이도 멀어져 결국 무산된다. 재결성이 무산되자 멤버들은 하나둘씩 밴드를 탈퇴하였고 결국 2010년 공식적으로 해체를 발표했다.[7]
베르트랑은 2010년 8월 프랑스 보르도에서 열린 음악 페스티벌에 출연해 7년만에 복귀를 했다. # 당시 관객들의 반응은 환호와 야유가 교차하는 미묘한 상태였으며, 같이 출연하기로 되어있었던 벨기에의 여가수 엘레나 루게는 베르트랑의 출연 소식에 격분해 무대를 펑크냈다.[8] 이 후 공연을 위주로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건의 여파가 엄청나서 이전의 명성은 거의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3. 디스코그래피
- Où veux tu qu'je r'garde (1987)
- Veuillez rendre l'âme (à qui elle appartient) (1989)
- Du ciment sous les plaines (1991)
- Tostaky (1992)
- 666.667 Club (1996)
- Des Visages des Figures (2001)
4. 기타
- 베르트랑 캉타는 누아르 데지르의 해체 이후에도 솔로 활동을 하고는 있는 중이다. 사건 이후에는 예전 만큼의 인기를 얻고 있지는 않긴 하나 솔로 데뷔 음반 Amo fati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면서 폼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연인을 구타해 죽게 만들고 교도소까지 실형까지 살았음에도 반성하는 기미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아 논란이 되었으며, 2010년 그의 전처 크리스티나 라디(Krisztina Rády)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폭행 혐의를 받는 등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상태. 다만 현재까지도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송라이터 중 한명으로써 평가받고 있으며, 그 만큼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프랑스의 대표적인 악마의 재능으로 평가받고 있다.
- 2010년 롤링 스톤에서 올 타임 베스트 프렌치 록 앨범 순위를 발표했을 때 세르쥬 갱스부르와 더불어 리스트에 5개의 앨범을 올려 두번째로 가장 많은 앨범들을 랭크시켰다. 참고로 가장 많은 앨범을 랭크 시킨 뮤지션은 6개의 앨범을 랭크시킨 알랭 바슝.
[1] 프랑스어에서 마지막 철자가 s인 경우 발음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나 누아르 데지르로 읽는다.[2] 공교롭게도 9.11 테러 당일 발매되었다.[3] 장루이 트랭티냥의 딸로, 아역으로 출발해 성인이 되어서도 가수와 배우로 좋은 커리어를 남겼다. 한국에서는 뽀네뜨의 엄마 역으로 유명한 인물. 참고로 두 사람은 마리가 남편과 별거한 뒤 만난 관계로, 영화 <콜레트> 촬영 스케줄 때문에 리투아니아에 함께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4] 두 사람이 심하게 언쟁을 벌이다가 베르트랑이 마리에게 4차례 주먹을 날렸다고 한다.[5] 처음 조사에서 베르트랑은 마리가 뒤로 넘여저 다친 거라고 거짓 진술을 했지만, 부검으로 인해 들통나고 말았다.[6] 얼마나 파장이 컸냐면, 누아르 데지르의 인지도가 한국에서 엄청 높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국내 언론에서도 여러차례 보도한 적이 있다. 마리의 양부였던 영화감독 알랭 코르노가 타계했을 때 그와 인연이 있었던 임상수가 씨네21 부고에서 이 일을 언급했을 정도였다. 링크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등장한 가정폭력에 대해 한 미국인이 "너네 나라는 아직도 남편들이 마누라를 이렇게 패냐?" 라는 비아냥 섞인 질문에 이 사건을 사례로 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만 양부인 건 나중에 알았다고. 마리의 장례식에서는 문화부 장관이 추도사를 남기는 등 2003년 당시 유럽 사회의 엄청난 화제거리였다. 특히 사건 이전까지 베르트랑은 나름 '의식있는 예술가' 포지션으로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기에 충격과 배신감이 엄청났다는 후문이다.[7] 해체 직전 기타리스트인 세로주 티소게이가 베르트랑과 자신은 인간성과 음악적인 성향이 너무 달라 활동하기 힘들어서 탈퇴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프랑스 언론의 정보에 따르면, 2010년 멤버들이 모여 녹음을 하고 있었던 회식에서 베르트랑이 마리의 사망과 관련해 했던 발언이 기폭제가 되었다고 한다. 사건 전후로 언론의 과도한 관심과 이메일 테러가 지쳐있었던 세르주는 이에 환멸감을 느꼈고, 밴드를 탈퇴한 뒤에는 베르트랑과 거의 의절 상태라고.[8] 엘레나 루게는 생전 마리와 절친한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