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7 18:18:39

네스토르 라코바

<colbgcolor=#c70125><colcolor=#ffe400> 초대 압하지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네스토르 라코바
Нестор Лакоба
파일:Lakoba_Nestor.jpg
출생 1893년 5월 1일
러시아 제국 수후미 특별구 리흐니
사망 1936년 12월 28일 (향년 43세)
소련 그루지야 SSR 트빌리시
국적
[[소련|]][[틀:국기|]][[틀:국기|]]
가족 사리야 라코바 (아내)
라우프 라코바 (아들)
학력 트빌리시 신학교 (퇴학)
하리코프 대학교 (법학부 / 중퇴)
종교 무신론
직업 정치인
정당
[[소련 공산당|]]

1. 개요2. 생애
2.1. 청소년기2.2. 혁명 활동2.3. 압하지야의 실권자2.4. 사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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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스토르 라코바(Нестор Лакоба, 1893~1936)[1]러시아, 조지아, 압하지야의 공산주의 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2. 생애

2.1. 청소년기

1893년 러시아 제국 수후미 특별구(Сухумский округ) 리흐니(Лыхны)에서 농부 아폴로 라코바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1905년 트빌리시 신학교[2]에 입학했으나 불온서적을 읽거나 혁명적 활동을 하다가 1911년 퇴학당했다.

2.2. 혁명 활동

이후 바투미로 옮겨 잠시 과외로 생계를 꾸리다 1912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바투미, 아자리야, 그로즈니 등을 떠돌며 공산주의를 전파하다 1916년 하리코프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낙향하여 다시 공산주의를 전파하는데 힘썼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해체되자 압하지야 현지의 볼셰비키에 가담해 멘셰비키와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했다. 1921년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으로 멘셰비키가 주도하던 조지아 민주공화국이 패망하자 라코바는 압하지야의 실권자로 떠올랐다.

이 해 부유한 아자르인[3] 상인의 딸인 사리야 아흐메도브나 지흐오글리(Сария Ахмедовна Джих-оглы)와 결혼했다. 둘은 아들 라우프를 낳았다.

2.3. 압하지야의 실권자

라코바는 압하지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1921~1931)의 인민위원회 의장과 압하스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931~1992)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압하지야의 지위 변화와 상관없이 라코바는 압하스 SSR과 압하스 ASSR의 실권자로서 스탈린과 자신의 친밀한 관계를 활용하여 압하지야를 거의 개인 영지에 가깝게 통치했다. 라코바는 압하지야의 농업을 발전시키고 강제적 집산화를 최대한 늦추었으며, 또한 압하지야 학회(АбНО), 압하지야의 문맹퇴치를 위한 특별위원회(Абчекаликбез), 압하스어문학학술원(ААЯЛ) 설립 등 압하스 민족문화의 진흥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2.4. 사후

1936년 급사하고[4] 이듬해 "인민의 적"으로 선포되었으며 유족들은 모두 대숙청에 휘말려 죽는 비극을 겪었다.[5]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집권기에 복권되었다. 오늘날 압하스인들은 라코바를 민족영웅으로 기린다.

1997년 압하지야 공화국은 그를 기리는 우표를 발행했다.

3. 여담

  • 생전 심한 청각장애를 앓아서 트로츠키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에게 대화하기 참 힘들다는 소리를 들었다.


[1] 압하스어: 네스토르 아폴론이파 라코바(Нестор Аполлон-иԥа Лакоба). 조지아어: 네스토르 아폴로니스 제 라코바(ნესტორ აპოლონის ძე ლაკობა)[2] 이오시프 스탈린이 다닌 그 곳이 맞다. 즉 라코바는 스탈린의 학교 후배가 되는 것이다.[3] 조지아인의 근연민족으로 조지아인 무슬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4]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독살당했다는 음모론이 있다.[5] 아내 사리야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남편을 비난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다 끝내 미쳐서 1939년 옥사했고, 아들 라우프는 감옥에 갇혔다가 1941년 총살되었다. 라코바의 두 형제도 1937년 11월 4일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