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F272A><colcolor=#fff> 김정흠 金貞欽 | |
출생 | 1927년 4월 20일 |
평안북도 용천군 | |
사망 | 2005년 10월 2일 (향년 78세)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물리학 / 석사) 로체스터 대학교 대학원 (물리학 / Ph.D.) |
직업 | 물리학자, 교수 |
소속 |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 명예교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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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물리학자 겸 저술가이며 과학평론가, 교육평론가, 수필가이다.2. 생애
1927년 4월 20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중국 베이징대학 교육학과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1946년 귀국하여 1951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3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961년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 대학원에서 양자역학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63년부터 1992년 8월 31일까지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일했다. 이후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겸 선문대학교 물리학과 석좌교수로 재직했다.
2005년 5월 뇌종양으로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2005년 10월 2일 사망했다.
3. 과학의 대중화
그는 국민들이 과학의 중요성을 깨닫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급격한 경제 발전과 사회 변화를 겪고 있던 1960-70년대의 한국사회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 현저히 높아졌지만, 선진국에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던 첨단과학기술의 내용을 쉽고 흥미있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전문가가 부족했기에 이에 대한 대중의 갈증도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왕성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벌여 나갔다. 전국 초등학교 어머니회, 중고등학교 과학의 날 행사, 각 도 과학관의 과학의 날 행사, 대학교 축제에 초청되어 첨단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상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그가 강연을 진행한 횟수만 해도 연 평균 100회, 최대 연간 180회에 달했다.
과학 대중화를 위한 지속적인 활동 결과 그는 대중에게 과학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고, 이는 방송 출연으로 이어졌다. 그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약 20년간 KBS 과학프로그램에 출연해 과학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했다. 14년 가까이, EBS 라디오 프로그램 <왜 그럴까요[2] >에 출연하며 초등학생들에게 직접 질문을 받고 답을 해주는 코너를 맡기도 했다.
이렇게 대중들로부터 인지도가 높아져서 삼성전자의 8비트 컴퓨터인 SPC-1500의 광고모델도 하게 된다.
1987년에 방송된 광고 |
1998년에 토요일 미스테리에서 출연하여 4차원 관련하여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1998년 05월 23일에 방송된 내용 |
4. 한국 물리학계 기여
1967년에는 물리학회 편집위원장으로서 영문 학술지인 Journal of Korean Physics Society의 창간을 단행했고, 1972년부터 1982년까지는 10년 동안 학회 산하 물리학 용어 심의위원장을 맡아 『물리학용어집』의 간행을 주도했다. 그리고 1985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물리학회 제11대 회장으로 봉직하며 학회의 운영을 개선하고 물리학 실험교재를 편찬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1977년 한국과학기술저작인연합회 창립을 주도했고, 그러한 활동은 지적재산권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의 창립 부회장(1984-1989)과 회장(1989-2003)을 역임하면서 지적재산권 제도를 한국에 받아들이는 데에도 기여했다. 그의 과학 대중화를 위한 노력은 강연과 저술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여러 정부위원회에 참여하여 과학문화 진흥과 확산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일례로, 그는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으로서 초중고 교과과정에 컴퓨터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고, 문교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오늘날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5. 어록
연구실을 집으로 옮겼을 뿐 '과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는 계속해나갈 것.
늙은 교수는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3]
1992년 9월 5일 오후 3시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가진 고별강연회[4]에서 남긴 말.
늙은 교수는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3]
1992년 9월 5일 오후 3시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가진 고별강연회[4]에서 남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