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김영윤(金榮潤) |
본관 | 김해 김씨 |
출생 | 1902년 7월 9일 |
경상북도 하양군 와촌면 시천동 (현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시천리)[2] | |
사망 | 1949년 7월 8일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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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달윤은 1902년 7월 9일 경상북도 하양군 와촌면 시천동(현 경산시 와촌면 시천리)에서 태어났다.그는 계성학교 학생으로서 1919년 3월 8일 대구부 서문밖 장터에서 이만집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8일 아침 대한 독립 만세 또는 태극기에 독립만세라고 쓴 유인물이 대구부내 경상북도청을 비롯한 여러 곳에 뿌려졌으며, 계성학교 학생 100명은 장터 근처로 집결하고, 성경학교 학생 20명도 도착하였다. 신명여학교 학생 50명도 시장 근처에서 궐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3시경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200명이 헌병기마대와 격투를 벌이면서 돌진해오자, 계성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헌병들을 격퇴하고 시장에 몰려들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태극기가 배포되면서 학생시위대가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학생과 군경은 가두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벌어졌고 그 사이 군중들이 합류해 시위대열은 약 1,000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열이 종로통을 지나 달성군청이 있는 지점까지 진출하였을 때, 일본 제국 육군대구 80연대의 병력이 출동하여 총기로 탄압하였고, 부상자가 속출하므로 학생 시위대는 뒷날 다시 궐기하기로 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이날 시위에 참여했던 그는 이후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9년 7월 8일 사망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